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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신림동 청춘] 고시촌

2015년 가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신림동 청춘’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던 특별전시회이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 형성되었던 고시촌 문화, 서울대학교와 함께 했던 민주화운동, 도시빈민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판자집 등 여러 형태의 삶과 문화가 신림동이라는 공간에 담겨 있다. 특별전에서는 신림동이란 지역이 형성과 변천된 과정을 바탕으로 한국 특유의 고시문화를 조명해 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스쿨제도의 도입과 함께 바뀔 것으로 보이는 고시촌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전시회이다.

2015년 가을에 열렸던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인 “신림동 청춘”.

법조인 양성을 위한 로스클제도가 도입되면서 없어지게 되는 사법시험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고시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던 신림동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전시내용이다.

신림동 고시촌

신림동이 인기 높은 고시촌으로 자리 잡게 된 데는 무엇보다 이곳이 도심지에서 벗어나 조용한 주택가라는 점과 서울대생과이 정보교환이 용이한 지역이라는 이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고 이곳 주민들은 보고 있다. 또한 고시원의 한달 비용이 하숙비보다 2~3만원 저렴하다는 것이 주머니 사정이 각박한 학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각종 시험을 앞둔 시점에는 돈이 있어도 방을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먼 길을 찾아왔다가 그냥 발길을 돌리는 경우는 물론, 심지어 순위를 정해놓고 대기하는 ‘파열현상’도 빚어진다.

『경향신문』 「신림동일대 전국 최대 고시촌으로, 해마다 합격자의 30% 배출」, 1989년 4월 19일

신림동 고시촌 풍경.

벼슬산 밑 신림동: 고시촌의 형성
‘벼슬산’이라 불리던 관악산에는 예부터 산속 절 방 한칸을 얻어 공부에 매진하던 고시수험생들이 있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 ‘돼지막’이라 불리던 무허가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일렬로 늘어선 5~6개의 1평짜리 방에 책걸상, 침구만 놓인 단순한 형태로 어려운 공부에 집중하기엔 최적의 장소로 여겨져 고시준비생들 사이에서 이미 이름이 나 있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근처로 이전해 오자 이 일대는 하숙생을 비롯해 고시준비생들이 더욱 많아졌으며, 1980년대 현재와 같은 고시원 형태이 건물이 50여 곳 들어서게 되어 본격적으로 ‘고시촌’을 형성했다. 또한 2000년대에 들어 사법고시 응시 제한연령이 폐지되고 선발인원이 1,000명에 육박하게 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 고시촌으로 몰려오게 되어 그 명성이 확고해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신림동 항공사진(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관악산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인 도림천 주변 황량한 벌판에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서울대학교가 이전해온 1980년대에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다.

신림동 항공사진(1990년대, 2000년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리지 않다.

윗동네 아랫동네: 고시촌의 분화
현재 신림9동을 거닐다 보면 고시촌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관악산을 향한 가파른 언덕길 근처의 윗동네는 1980년대 고시촌이 형성되던 초기의 중심 장소로, 과거 고시촌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곳의 고시원은 낙후된 시설과 고시생 감소로 문을 닫거나, ‘고시낭인’이라 불리는 장수생 및 기초생활 수급자, 불안정 노동자, 외국인 유학생 등이 살고 있다. 반면, 도림천과 신림로 부근 상권이 밀집되어 있는 아랫동네의 고시촌에서는 변화된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고시생들이 점점 방음이 잘되고 깔끔하며 개인시설을 갖춘 원룸을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1평짜리 방을 트거나 넓혀 풀옵션으로 개조한 원룸들이 들어선 것이다. 불편을 감내하며 공용 생활공간에서 공부하는 ‘배고픈 고시생’보다는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에만 집중하길 원하는 고시생들이 많아진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신림동을 대표하는 고시원.

산중턱에 지은 ‘돼지막’이라 불린 허름한 건물에서 고시준비를 하던 공간이 오늘날 1인가구의 삶을 대표하는 고시원으로 바뀌었다. 건물은 현대식이지만 밀집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팍팍한 삶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고시원이 있는 골목길.

고시식당
고시식당은 대체로 뷔페형식으로 메인요리와 후식을 즐길 수 있다. 식권은 주로 매식, 월식으로 판매하며, 서점이나 복사집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다량을 식권을 구매했을 경우 할인율이 커지므로, 고시생들은 월식으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으며 대체로 한끼에 2300원가량 한다. 그러나 최근 자금난에 못 이겨 폐업하는 식당이 늘고 있어, 고시생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입기도 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신림동 고시원와 함께 고시준비생의 삶을 잘 보여주는 고시식당.

고시식당 음식

고시식당 안내

식권.

독서실
독서실은 학원과 함께 운영되고 있는 곳이 많은데, 관악청소년회관~미림여고에 이르는 호암로 22, 24, 26길에 특히 넓게 분포되어 있다. 70~80년대에 고시생들이 주로 고시원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는 체제였다면, 90년대 이후는 주로 학원과 연계된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며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 학원 공부를 연장하는 선에서 많은 고시생들이 이용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고시원 독서실.

고시학원.

서점과 복사집
서점과 복사집은 도림천을 따라 형성된 고시학원 주변으로 위치해 있는데, 이는 수강생들에게 필요한 자료를 발 빠르게 공급하기 위해서다. 주로 판매하는 것은 학원 교재나 법전의 복사물, 고시식당의 식권으로 예전에 비해 이용률이 많이 줄어든 형편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점.

서점에서 판매하는 고시자료 복사물.

고시공원과 헬스장
체력을 길러야 오랜 수험생활을 잘 버틸 수 있기에, 운동을 틈틈이 하는 고시생들이 많다. ‘고시촌에서 불철주야 공부하는 고시생들의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고시공원은 고시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산책을 하거나 머리를 식히러 온 고시생들이 주로 이용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신림동 고시공원.

녹두거리
녹두거리는 고시촌의 유일한 번화 공간으로 고시생들의 유흥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식당과 술립, 카페, 오락실 등이 주 상권을 이루고 있으며, 최근에는 토크바(Talk Bar)로 불리는 술집이 성행하고 있다. 이곳은 성매매가 목적이 아니라, 손님이 주로 자신의 넋두리를 풀어 놓으면 종업원이 맞장구 쳐주는 위로의 공간으로 외로운 고시생들이 종종 이용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고시생들의 삶의 공간 중 하나인 녹두거리.

녹두거리 톡크바(Takl bar)

오로지 공부
고시생들은 효율적인 시간 배분으로 성공적인 수험생활을 마치고 하루빨리 고시촌을 떠나고자 한다. 1년에 4개월 단위로 이어지는 시험단계에 대응하기 위해 ‘토가 나올정도’로 열심히 공부한다. 고시생들은 하루 평균 10시간을 공부하며, 대체로 학원에서 수업을 듣거나 자습을 한다. ‘고시원-학원-식당-스터디’로 이어지는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은 또한 아주 쉽게 일탈로 이어질 수 있기에, 틈틈이 흐트러지는 마음을 체크하며 단속해야 한다. ‘누가 더 이 생활을 잘 이겨 내느냐’에 따라 합격여부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시를 준비하다 보면 장기간 수험생활로 지속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심리적 압박감을 다스리는 여유와 체력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고시준비생의 하루.

고시생 공부하는 모습.

고시원 내부구조.

책상만 놓여 있는 1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꿈을 찾아 청춘을 보내고 있다.

신림동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고시생.

공부를 위해 포기한 것
고시생이 고시촌에 입성할 때 포기하는 것이 두가지 있다. 바로 인간관계와 외모꾸미기다. 고시생들은 고시촌에 나를 아는 누군가가 적거나 없길 바라며 자신의 개인 정보가 공유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고시원에서는 출신대학과 연령 등을 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상식이며, 오직 ‘시험’과 ‘나’에게만 집중하기 위해서 타인과의 관계는 잠시 미룰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고시생’하면 덥수룩한 머리와 두꺼운 뿔테 안경, 늘어진 트레이닝복, 삼선슬리퍼에 한 손에 무거운 법전을 든 모습을 연상하듯, 실제 고시촌의 많은 이들은 ‘꾸미고 멋내고’ 싶은 마음은 접고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월평균 고시비용

알바와 수험생활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고시비용을 충당하고 공부를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부모에게 더 이상 손을 내밀기 어려운 장수생들은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번다.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고시촌 내에서 고시식당 설거지, 학원 조교, 고시원 총무, 서점 계산원 등이며, 단기간 돈을 벌기 위해서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거나 택배업무, 대리운전 등을 하기도 한다. 공부만 해도 부족한 시간을 일과 병행하자니 수험생활의 질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중고에 몸과 마음은 금방 지치고, 신림동 고시촌에 머무는 시간도 더 길어질 수 밖에 없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식당에서 알바를 하는 모습.

선택의 기로에서
누구나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는 고시는 많은 청춘을 고시촌으로 불러들인다. 긴 침묵의 시간 끝,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위해 고시생들은 자신의 젊음을 한없이 눌러댄다. 또한 먼 훗날 고시촌에서의 추억이 아픈 기억으로 남지 않길 바라며, 다가오는 유혹을 뿌리치며 버틴다. 그러나 고시 합격률은 다만 3%, 나머지 97%의 사람들은 여러 번의 실패 후 찾아오는 무력감으로 지칠대로 지쳐 신림동 고시촌을 조용히 떠난다. 로스쿨이 도입되고 2017년 사법시험이 폐지될 예정에 따라 고시촌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산꼭대기 근처 고시원에는 이른바 ‘고시낭인’이라 불리는 장수생들이 여전히 고시촌을 지키고 있다. ‘도인과 같다’는 그들의 10년이 넘는 오랜 수험생활을 그만두고 떠나는 일은, 삶의 중대한 결단이 필요한 쉽지 않은 일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고시원에 걸려 있는 합격 축하 안내.

많은 이들의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신림동 풍경.

고시촌 괴담

“예산에 관악 현대아파트가 들어오기 전에 거기가 원래 약수터였어, 그러니까 80년대 일ㄹ이지, 그때 사건이 있었는데, 두 명의 고시생이 약수터에서 싸우다가 한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야. 한 고시생은 고등학교만 나오고 고시 준비를 했고, 다른 고시생은 대학을 나온 모양인데, ‘고졸이 무슨 사시냐’고 놀렸다고 그래서 고등학교만 나온 고시생이 칼부림을 했다고.”
– 과거 고시원과 독서실 운영 –

“90년대 고시촌에 한창 사람이 많았을 때 시험날이 되면 골목에 가방을 맨 고시생들로 꽉차곤 했어요. 그들을 실어나르는 버스도 큰 길가에 쭉 서 있고, 시험이 끝나고 밤이 되면 아랫동네에서 술에 취해 골목을 올라오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거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심지어 자동차 사이드미러를 깨뜨리는 학생도 있었고, 돌을 던져 고시원 창문을 깨뜨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거기에 대해 뭐라 안했어요. 오죽 답답하고 힘들면 저럴까 싶어 그냥 넘어갔어요.”
– 고시원 운영 –

“인형뽑기 기계 있잖아요. 신림동 고시생이 10만원을 그 자리에 쌓아두고 하루 종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또 구경하고 있어, 우르르 주변에 모여서, 그래서 뽑아지면 박수 쳐. 끊임없이 실패를 맛봤던 애들이 이 인형조차 못뽑으면 자기가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 90년대 고시생 출신 –

고시생들이 많아 찾았다는 인형뽑기.

신림동 입장
신림동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고시촌’이다. 로스쿨 도입 전까지 이곳은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어 ‘신림동=고시촌’이라는 장소적 특성을 가졌다. 비록 서울 남부에 위치한 작은 동네지만 전국에서 몰려온 낯선 이들의 삶으로 채워진 이곳은, ‘고시촌’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꿈을 이루기 위한 기회의 땅으로 충실한 역할을 해왔다. 고시원, 고시학원, 고시서점, 고시식당 등 신림동 골목마다 찾아볼 수 있는 ‘고시’의 흔적들은, 꿈을 위해 잠시 젊음의 화려함을 유예해 둔 우리 시대 청춘의 삶을 증명한다. 그러나 신림동의 지난 세월에는 고시합격을 위해 매진해 온 이들의 팍팍한 인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신림동 사람들은 각자 그들의 방식으로 신림동에 머물렀으며, 시대와 조응하며 신림동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형성해 왔다. 해방 후 신림동으로 강제 이주된 철거민들은 이곳을 또 다른 고향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으며, 80년대 민주화를 갈망하던 대학생들은 이곳을 기반으로 세상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고시생이 떠난 뒤 ‘1인가구’라 불리며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현 청년들은 ‘오포세대’라는 자조 섞인 세상의 부름을 떠안으며 오늘도 고군부투하고 있다. 여전히 청춘들의 인생은 신림동에서 진행 중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