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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어진과 진전의 역사

2015년 겨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이 열렸다.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왕의 초상화가 가지는 상징성, 어진 제작과정,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화원 및 문인화가, 어진을 모셨던 다양한 진전들, 어진과 관련된 의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조선시대 왕의 초상화가 가지는 의미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전시회였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왕의 초상화는 어진 외에 진용(眞容), 진영(眞影), 어용(御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조선 숙종 때 왕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어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어진은 국왕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로 고대 이래로 대부분의 통치자들에서 볼 수 있는 형태 중 하나이다. 진전(眞殿)은 어진을 모시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셨던 진전이 전국적으로 세워졌으며 국가적으로 크게 중요하게 관리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진전으로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주 경기전과 창덕궁 내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이 있다.

<창덕궁 구선선원전(보물)>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익종), 헌종의 어진을 봉안했던 진전 건물이다.

우리나라 어진과 진전의 역사
국왕의 초상화에 대한 본격적인 기록은 고려 시대부터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왕과 왕후들의 초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초상 조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고려의 어진은 궁궐 안의 진전인 경령전(景靈殿)과 원찰(願刹)내의 진전에 봉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경령전에는 고려 태조와 선대 왕 4대의 어진을 모시고 원찰 내의 진전에는 왕과 왕후들의 어진을 개별적으로 모셨다. 조선 왕실은 고려의 어진 제작과 진전 운영의 전통을 선별적으로 계승하여 지속적으로 어진을 제작했다. 어진과 진전에 대한 관심은 조선 후기로 올수록 증대되어 재위 중인 왕들의 어진이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어진 제작 및 봉안과 관련된 의례들이 보다 확대되고 세부적으로 정비되었다. 선원전(璿源殿)과 영희전(永禧殿) 등 궁궐 내외의 진전에 선대 왕들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행사들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왕 자신의 정통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창덕궁 구선원전 내부.

경복궁 태원전.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어진을 모셨던 건물이다.

순종황제 어진 보존처리
국립고궁박물관은 2007년 영조어진.철종어진.연잉군 초상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직후 피난지 부산에서 화재 피해를 입은 조선왕실 어진을 꾸준히 보존처리하고 있다. 순종황제 어진은 오른쪽 반이 소실되고 표제도 사라져 주인공을 알 수 없었으나, 보존처리를 위한 기초조사 과정에서 1928년 김은호가 그린 순종황제 어진임이 밝혀졌다. 보존처리 과정은 ‘조사-이물질 제거 표접 – 구배접기 제거 및 배접 – 표장비단 및 상하축 연결 – 보관’의 순수로 진행되었다. 먼저 어진의 기초구성 및 상태를 조사하여 보존처리 방향을 결정하였다. 그 후 표면 이물질을 제거한 후 보호막을 부착하고, 뒷면에 부착되어 있던 구배접지를 최대한 제거하여 손상된 물질이 다른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였다. 유물원형의 조직과 색상에 가깝도록 메움견을 준비하여 손상된 부분을 채움으로써 어진의 원래 크기를 회복하였다. 표면 보호막을 제거하고 새로운 배접지로 여러 차례 뒷면을 보강하면서 표장비단을 연결하고, 상축.하축.낙영.유소 등으로 족자형태를 꾸밈으로써 보존처리를 완료하여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하였다. 보존처리를 통해 순종황제 어진의 보존상태가 안정화되었으며 외형적 완성도까지 갖추게 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순종 어진 보존처리 과정,

조선 왕실 기록화에 보이는 왕의 존재
대부분 조선 왕실 기록화는 왕이나 왕세자, 대비 등 왕실의 주요 인물들을 위해 거행한 행사를 기념하여 제작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기록화에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자리에 놓인 용상이나 일월오봉도 병풍과 같이 왕을 상징하는 의물들을 통해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양상은 중국 황제의 경우 기록화에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었던 것과 대비된다. 『성종실록』에는 어느 일본인이 그린 세조의 초상화를 두고 신숙주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신하와 백성들이 임금의 성용(聖容)을 만들지 못하며, 범한 사람은 중죄를 받는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국왕의 모습을 함부로 형상화하는 것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인식하여 금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의 모습은 국왕의 명에 의해 엄격한 절차와 형식을 지켜 제작되는 초상화의 형태로만 형상화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이 조선 말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고궁박물관>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베푼 왕실 잔치 그림,

조선시대 왕실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국왕은 직접 그리지 않고 의자나 일월오봉도 등으로 왕의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1767년(영조 43) 12월 16일 영조가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왕세손과 대신에게 베푼 연회를 그린 그림이다. 중앙의 빈 의자가 국왕의 자리인데, 왕을 직접 그리는 대신 일월오봉도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개성 경령전 유적

고려시대 어진과 진전
현존하는 고려 국왕의 어진은 없지만 기록을 통해 국왕과 왕후들의 어진이 꾸준히 제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의 경두 다수의 초상화와 조상이 제작되어 진전에 봉안되었고 이들이 조선초기까지 전해 왔으나, 조선 왕실은 전 왕조의 어진들을 불태우거나 땅에 묻는 방식으로 없애 버렸다. 고려 왕실은 중국 송나라 황제의 초상화를 봉안한 경령궁을 본떠 개성의 궁안에 경령전을 설치하고 그곳에 역대 국왕의 어진을 봉안했다. 경령전은 5실로 구성되어 제1실에 고려 태조의 어진을 영구적으로 봉안하고 나머지 4개의 감실에는 현재 왕을 기준으로 4대조의 어진을 각각 모셨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가장 오래 된 왕의 어진은 궁궐 밖 원찰에 마련된 진전으로 옮겨졌다. 원찰은 특정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로, 고려 왕실에서는 원찰 안에 진전 건물을 마련하여 왕과 왕후들의 어진을 봉안하고 기일마다 불교식 재를 올려 명복을 빌었다. 원찰과 연계한 진전 운영은 고려 왕실의 조상 숭배 문화가 불교와 융합하여 나타난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현화사비 탁본첩, 20세기초,

고려 제8대왕 현종이 부모인 안종과 헌정왕후를 기리기 위해 현화사를 지으면서 건립한 비석의 뒷면 탁본이다. 현종이 안종과 헌정왕후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현화사에 봉안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사찰을 짓는 공사가 거의 끝나고 불상의 모습도 갖추어지자 다시 절안 서북쪽에 별도의 진전 한 곳을 지어 임금님의 돌아가신 아버님이신 안종현경영문효대왕과 돌아가신 어머님이신 효숙인혜순정대왕태후 그리고 돌아가신 누님인 성목장공주원정왕후 등의 진영을 봉안하고 …

연천 숭의전에 모셔진 고려 태조의 위패와 초상화.

초상화는 후대에 다시 그려진 것이다.

조선시대의 어진과 진진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여 활발하게 어진을 제작하고 진전을 운영했으며, 이는 조선 왕실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여러 본이 제작되어 전국 여러 곳에 봉안되었다. 세조의 경우 그의 능인 광릉의 원찰 근처에 마련된 진전(봉선전)에 어진이 봉안되었으나, 다른 국왕의 어진들은 대부분 경복궁 선원전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어진들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망실되고 태조 어진 일부와 세조 어진만 보전되었다. 광해군과 숙종은 전란으로 흐트러진 진전 제도를 재정비하고 태조 어진의 모사와 봉안에 힘을 기울였다. 숙종은 자신의 초상화 제작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한동안 중단되었던 어진 제작의 전통을 되살렸다. 뒤를 이은 영조는 어진에 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약 10년 주기로 꾸준히 어진을 제작했으며 정조를 포함한 후대 왕들도 이러한 전통을 따랐다. <출처: 고궁박물관>

국조오례의, 조선,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기본 예식을 길례.가례.빈례.군례.흉례로 구분하여 정리한 책이다. 길례에 진전 의례의 내용이 속해 있으며 태조 진전에 올리는 제향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국조오례의 서례, 조선,

국조오례의를 시행하는 데 필요한 참고사항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책이다. 조선 초기 진전 건물의 평면도가 실려 있어 당시 진전의 운영 상황과 함께 진전 건축의 특징을 알게 해 준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실 어진의 특징
조선 왕실 어진은 대부분 의례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진전에 걸어 봉안하기 적합한 괘축(족자) 형태이다. 현존하는 조선 왕실 어진은 전체적인 크기가 일반 사대부나 공신 초상에 비해 상당히 크다. 대개 몸과 얼굴이 약간 오른쪽을 향하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이다. 두 손을 앞에 모아 포개어 잡은 공수자세를 취한 경우가 많으며 이때 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비교적 다양한 옷차림의 어진이 그려졌지만, 기본적으로 익선관.곤룡포 차림과 원유관.강사포 차림이 선호되었다. 표현기법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주로 선묘로 이목구비를 표현하고 부분적으로 물감을 번지게 하여 얼굴 윤곽을 묘사했다. 18세기 이후에는 도드라진 부위에 붓질을 덜하고, 들어간 부위에는 붓질을 반복하여 어둡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보다 입체감 있게 얼굴을 묘사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춘관통고, 조선 1788년경,

춘관통고, 조선 1788년경,

정조의 명으로 예제와 의례 관련 업무를 오례를 기준으로 종합하여 정리한 책이다. 숙종과 영조, 정조대를 거치며 새롭게 정비된 의례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창덕궁 주합루에서 행해진 정조 어진 관련 의례도 수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 영정모사도감의궤, 대한제국 1901년,

1900년부터 약 1년간 진행된 7조의 어진 모사 작업과 봉안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조선시대 어진 제작 체계
조선시대의 어진 제작 방식은 대개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摸寫)로 구분된다. 도사는 살아 계신 국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리는 방식을 말하며, 추사는 살아 계실 때 그린 어진이 없는 경우 그 얼굴을 아는 이들의 기억에 의존해 그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모사는 기존의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기존 어진을 그대로 두고 다른 진전에 추가로 봉안해야 할 때, 기존 어진을 바탕으로 또 한 본의 어진을 제작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국왕과 신하들이 논의하여 어진을 제작하기로 결정하면 임시 기구인 도감을 설치하거나 담당 관리를 임명하여 어진 제작에 대한 전반적인 일을 주관하도록 했다. 선대 왕의 어진을 모사하는 경우에는 대개 도감을 설치한 반면, 재위 중인 왕의 어진을 도사할 때에는 따로 도감을 설치하지 않고 종친이나 신료들 중에서 담당자를 정하여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화원이 본격적으로 어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는 단계별로 어진의 제작 상황을 살펴보는 봉심(奉審)이 이루어졌다. <출처: 고궁박물관>

어진 제작과정
도감 또는 담당 관원이 정해지고 어진화사(御眞畵師)가 선발되면 본격적으로 어진을 제작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어진 제작은 일반적으로 초본제작-상초(上綃)-설채(設彩)- 장축(粧軸)-표제(標題)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초본은 밑그림을 말하는데 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리는 도사의 경우 국왕의 마음에 들 때까지 여러 본의 초본이 제작되기도 했다. 초본이 완성되면 그 위에 비단천을 겹쳐 놓고 비단 위로 비쳐 보이는 형상을 따라 그리는 작업을 하는데 이를 ‘상초’라 하였다. ‘설채’는 채색작업으로서 조선 왕실 어진에는 시간이 흘러도 안료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비단의 뒷면에도 채색을 하는 배체(背彩) 기법이 사용되었다. 채색이 끝나면 초상화를 종이와 비단으로 장황하고 위아래에 축을 달아 족자 형태로 꾸민 다음, 화면 위에 주인공과 제작 시기를 알려 주는 표제를 썼다. 이렇게 완성된 어진을 진전 또는 궁궐 내외의 특정한 장소에 봉안하고, 어진 제작과 봉안 과정에 참여했던 관리와 화원, 장인들에게 상을 내림으로써 마무리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숙종 어진 도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조선 1713년,

1713년(숙종 39)에 있었던 숙종 어진 도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궤에는 어진화사를 선발하는 과정, 어진 도사 시 국왕의 의관 선택, 어진 봉안 절차를 둘러싼 논의 등 어진 도사에 관한 상세한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세조 어진 모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조선 1735년,

1735년(영조 11) 영희전 제2실에 봉안되어 있던 세조의 어진을 모사한 일을 기록한 의궤이다. 어진의 상태가 나빠질 때를 대비하여 모사한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숙종 어진 모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조선 1748년.

어진을 봉안하는 과장을 그린 반차도가 수록되어 있다.

숙종의 어진을 영희전에 봉안하기 위해 1748년(영조 24) 창덕궁 선원전의 숙종 어진을 새롭게 모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새롭게 모사한 숙종 어진을 영희전에 봉안할 때의 행렬을 기른 반차도 18면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왕의 초상을 그린 화가들, 어진화사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담당하는 어진화사(御眞畵師)의 역할은 어진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어진화사는 대개 궁중에 필요한 그림을 제작하는 일을 담당했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나 지방 출신의 화사, 그리고 정조대 이후 새롭게 마련되어 국왕과 관련된 중요한 그림을 담당했던 규장각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중에서 선발되었다. 어진화사는 기량과 역할에 따라 주관화사(主管畵師), 동참화사(同參畵師), 수종화사(隨從畵師)로 구분했다. 주관화사는 초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을 그리는 일을 담당했고, 동참화사는 의복과 신체 등을, 수종화사는 배경을 그리거나 채색하는 일을 맡았다. 주관화사는 왕이 지목하기도 하고 공개적으로 실력을 검증하는 시재(試才)를 거쳐 선발되기도 했다. 직업화가인 화원이나 화사들 외에 인물화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문인화가들이 어진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문인화가의 경우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고 화원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조언하는 역할을 했는데, 영조대의 조영석과 정조대의 강세황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영복 초상, 조영석, 조선 1725년, 보물

영조 때 숙종 어진 모사에 감역관으로 참여한 문인화가 조영복이 그린 초상화이다. 당시 어진 제작에 참여한 문인화가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사대부 출신의 문인화가 조영석(1686~1761년)이 그린 조영복의 54세 초상이다. 조영복은 조영석의 형이다. 조영석은 1743년(영조 24) 숙종 어진을 모사할 때 화원들의 작업을 감독하는 감역관(監役官)으로 참여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윤증 초상, 장경주, 조선 1744년, 보물

조선후기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을 그린 초상화이다.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화원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윤증 초상화의 얼굴부분.

영조대 어진화사로 활동한 장경주(1700~?)가 그린 조선중기 유학자 윤증(1692~1711년)의 초상이다. 장경주는 1744년(영조 20) 영조의 51세 어진 도사와 1748년(영조 24)의 숙종 어진 모사에서 주관화사로 활약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채제공 초상, 이명기, 조선 1792년, 보물

정조 때 전성기를 이끌었던 채제공을 그린 초상화이다. 어진제작에 참여했던 화원 이명기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채제공 초상 얼굴 부분. 사실적인 표현과 섬세한 필치가 돋보인다.

이명기(1756~1802년 이후)가 그린 채제공(1720~1799년)의 73세 초상이다. 1791년(정조 15) 정조의 어진을 도사할 때 도제조를 맡았던 채제공을 치하하기 위해 그려졌다. 이명기는 1791년과 1796년 정조 어진 도사에 주관도사로 발탁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