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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또 한분의 왕, 어진

어진(御眞)은 국왕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로 국가적으로 소중하게 다루어졌다. 어진을 제작할 때는 도감을 설치하거나 담당관리를 임명하여 전체적인 일을 주관하도록 했으며,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나 궁중화원들이 어진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어진은 당대 미술 중 인물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라할 수 있으며, 선원전이나 영희전 같은 진전에 모셔져 특별히 관리되었다.

하지만 전쟁이나 화재 등을 피하지 못하고 실제로 남아 있는 역대 국왕의 어진은 많지 않은 편이며, 남아 있는 어진 또한 대부분 구한말에 제작된 것들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어진으로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 서울 창덕궁에 보관되었던 영조. 철종, 익종의 어진과 영조의 연잉군 시절 초상화 등이 남아 있다. 일반 사대부가문에서 소중히 보관했던 초상화보다 많이 남아 있지 못한 형편이다

영흥 준원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1913년 촬영)

또 한분의 왕, 어진
어진은 또 한 분의 국왕과 같은 존재였다. 어진을 옮길 때 가마를 사용하고 의장을 갖추는 등 살아 계신 왕과 다름없이 예우하였으며, 진전과 어진이 화재 등으로 없어졌을 때에는 왕과 백관, 왕실 여성들이 소복을 입고 곡을 하는 등 애도하며 진전이 있던 곳에서 위안제를 지내게 했다. 광해군과 숙종이 전란으로 소실된 진전을 재건하고 태조 어진을 봉안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나, 자신의 어진을 신하들이 정기적으로 예를 갖추어 살피도록 한 정조의 조치는 어진이 국왕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상징물이기도 했음을 알게 해 준다. 1930년대 기록에 의하면, 창덕궁 신선원전에는 이 무렵 새로 모사된 2본의 어진을 포함해 모두 48본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어진 전체가 부산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피난지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대다수가 소실되고 지금은 극히 일부의 어진만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남아 있다. 비록 소수이고 그나마 상당 부분 소실되어 제 모습을 알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남아 있는 어진과 관련 기록을 통해 조선 왕실의 어진 제작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태조 어진 모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조선 1838년,

1837년(헌종 3) 9월 함경도 영흥 준원전에 도둑이 들어 어진이 심하게 훼손되자, 준원전에 있던 다른 태조 어진을 범본을 새로 어진을 제작하여 봉안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한양에서 영흥까지의 봉안행렬을 그린 반차도가 실려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태조와 원종 어진 모사를 기념하는 시를 새긴 현판, 조선 1872년

영희전의 태조 어진과 원종 어진,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새로 제작한 일을 기념하여 고종과 37명의 신료들이 읊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이때 태조 어진은 영희전 봉안본을 바탕으로 2본을 모사하여 각각 영희전 제1실과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정을 이모하여 우리나라 사람들 칭송하는데
친히 제사를 지내니 때는 천중절이라네
재계하러 하룻밤 이문원에 묵으며
신류들을 불러보고 함께 역사를 강론하네
– 고종 어제 –

우리나라도 오래된 나라로 새로운 천명을 받았는데
영정이 단정하게 전각에 임하였네
후세 임금 탄생하여 전대 임금의 법을 계승하니
하늘의 상서로운 구름 빛깔은 예나 지금이나 같네
– 원임 직제학 신 이유원 –

태조.원종 어진이모도감도청의궤, 조선 1872년,

영희전과 경기전의 태조 어진 및 영희전의 원종(1580~1619년, 1627년 추존) 어진이 오래되어 희미해지자 1872년(고종 9) 어진을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태조 어진은 영희전본을 바탕으로 2본을 제작하여 각각 영희전과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태조 어진 모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대한제국 1900년,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하기 위해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범본으로 태조 어진을 모사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그러나 1900년에 제작된 태조 어진은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새로운 어진이 제작되어 선원전에 봉안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 태조 어진, 조선천, 채용신 등, 대한제국 1900년,

경운궁(덕수궁) 선원전에 봉안하기 위해 1900년에 제작된 태조 어진이다. 얼굴을 포함한 절반가량이 소실된 상태이다. 당초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하였으나 화재로 봉안되었던 어진이 모두 소실되어, 선원전을 새로 짓고 태조 등 일곱 임금의 어진을 다시 모사하였다. 이 어진 속의 태조는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달리 홍색 곤룡포를 입고 있으나 자세와 용상 및 채전이 형태는 경기전본과 거의 동일하다. 태조의 장년기 모습일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우측 상단 가장자리에 ‘태조고황제어진 광무사년경자 어모’라는 표제가 적힌 붉은 비단이 붙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 태조 어진, 복제, 조중묵, 박기준 등, 조선 1872년.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이다. 국왕을 그린 어진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태조 어진 중 얼굴 부분.

1872년(고종 9) 영희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전주 경기전에 봉안한 어진이다. 청색 곤룡포를 입고 두손을 소매 속에 모은 정면전신상으로 바닥에는 화려한 채전이 깔려있다. 화면 우측 상단에는 ‘태조대왕어용 소자사복지구년임신 이모’, ‘태조고황제어진’이라는 표제가 적힌 비단이 붙어 있다. 앞쪽의 표제는 1872년 제작 당시에 붙인 것이고, 뒤쪽의 붉은 비단에 적힌 표제는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태조를 황제로 추존한 뒤 1900년에 새로 써서 붙인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원종 어진, 김은호, 1936년,

일제강점기에 많은 초상화 작품을 남겼던 김은호의 작품이다.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추존임금 원종의 어진이다. 화면의 오른쪽이 소실되었으나 얼굴과 복식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왕자군만 사용할 수 있었던 백택 흉배가 달린 흑단령에 사모를 쓰고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원종은 선조의 아들이자 인조의 생부로, 1623년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고 1632년 다시 왕으로 추존되었다. 원종이라는 묘호가 올려졌다. 원종의 어진은 1872년에 이모된 뒤 1935년에 다시 모사되어 이듬해에 완료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숙종대의 어진제작과 봉안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전란으로 흐트러진 진전제도를 재정비하고 어진을 제작하는 데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1688년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한양 남별전에 봉안함으로써 창업주의 어진을 도읍과 지방에 봉안하는 체제를 회복시켰으며, 남별전에 영희전이라는 정식 이름을 부여했다. 또한 재위 중에 어진을 그리던 전통을 부활시켜, 1635년 자신의 어진을 개인적으로 제작하여 강화도와 궁궐에 보관하게 했다. 이때 숙종은 조선 전기 경복궁 선원전의 예에 따라 궁궐 내의 어진 보관처를 선원전이라 하였다. 숙종의 재위 40년을 맞은 1713년에는 전담 기구인 어용도사도감을 설치하고 각 단계별로 신하들과 상의하고 점검하며 어진을 제작했다. 그리고 국왕의 초상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어진(御眞)’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정하였다. 생존 시에 여러 차레 자신의 어진을 제작해 궁궐 내외의 장소에 봉안하는 전통은 숙종 대에 확립되어 영조와 정조 등 후대 왕들에 의해 계승되고 고종대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연잉군 초상, 조선 1714년, 보물

젊은 시절 영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기 전인 21세 때 숙종의 명에 따라 제작된 초상화이다. 왕자군만 사용할 수 있었던 백택흉배가 부착된 녹포단령에 사모를 쓰고 호피가 깔린 교의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일반 공신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얼굴과 몸이 상당 부분 보전되어 있다. 화면 왼쪽 상단에 “처음에 연잉군에 책봉되었고, 호는 양성헌이다”라고 적혀있어 임금이 되기 전 연잉군 시절의 도사본임을 알 수 있다. 잠저였던 창의궁 장보각에 모셨다가 경희궁 태령전을 거쳐 1778년(정조 2)에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모셨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조.정조 대의 어진 제작과 봉안
영조와 정조는 숙종 대에 마련된 진전 운영과 어진 제작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더욱 활성화시켰다. 1735년 영조는 영희전의 세조 어진을 새로 모사하게 했으며 1748년에는 영희전을 증축하고 숙종 어진을 모사하여 영희전 제4실과 선원전에 봉안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대략 10년 주기로 자신의 어진을 제작했다. 그의 초상화는 연잉군 시절에도 그려졌으며 왕으로 즉위한 이후 총 6회에 걸쳐 어진을 도사하여 생시에 제작된 어진에 다른 국왕에 비해 현저하게 많았다. 영조의 어진은 연잉군 시절의 거처인 창의궁과 경희궁,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 등 궁궐 내외의 전각에 봉안되었다. 19세기 말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총 12본의 영조 어진이 궁궐 내외에 봉안되어 있었다. 정조는 영조 대의 전례를 따라 재위 기간 중 대략 10년 주기로 세 차례 어진을 도사했다. 정조의 어진은 규장각 주합루, 그리고 부친인 사도세자의 사당과 묘소에 봉안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조 어진, 채용신, 조석진 등, 1900년, 보물

태조 어진과 함께 가장 익숙한 왕의 초상화이다.

1744년(영조 20) 장경주 등이 도사한 육상궁 냉천정의 영조 어진을 채용신과 조석진 등이 1900년에 이모하여 제작한 어진이다. 1900년 경운궁 선원전의 화재로 어진들이 모두 소실된 후 다시 제작된 7조(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 가운데 하나로 화면 우측에 “영조대왕 어진 광무사년경자 이모”라는 표제가 있다. 수염이 희끗한 51세때의 모습을 그린 반신상으로, 익선관을 쓰고 홍룡포를 착용하였으며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니다.

연잉군 초상 중 얼굴 부분

영조 어진 중 얼굴부분.

나이가 들면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만 얼굴의 특징은 거의 비슷해 보인다.


문조(익종) 어진, 1826년,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어진이다.

순조의 아들인 문조(1809~1830년)의 어진이다.문조는 1812년 왕세자(효명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대리청정을 하는 도중 183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익종으로 추존되었다. 화면 우측 상단에 “익종 돈문현무 인의효명 대왕 십팔세 어진”이라 묵서되어 있어 18세이던 1826년(순조 26)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묵서 옆의 “문조익황제어진”이라는 표제는 대한제국기에 문조를 황제로 추존한 뒤에 첨부된 것이다. 면복을 착용하고 교의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왼쪽 옆얼굴이 약간 보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철종어진, 이한철, 조중묵 등, 조선 1861년, 보물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권위가 낮았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철종이 군복을 입고 있는 어진을 남겼다는 것이 특이하다.

철종의 31세어진으로 군복을 입고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이다. 『어진도사사실』과 『철종실록』에 따르면 1852년과 1861년에 철종 어진이 각2본씩 도사되었으며 이 어진은 1861년(철종12) 강사포본과 함께 제작된 군복본이다. 이한철과 조중묵이 주관화사로 참여했다. 어진 우측 상단에는철종 친필로 “내 나이 31세 초상”이라고 적혀 있다. 그 옆에 “철종 희륜정극 수덕순성 문현무성 헌인영효대왕”이라는 표제는 철정 연간 이후에 적힌 묘호와 존호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고종 대의 어진 제작과 봉안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한 시기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태조 관련 유적을 정비하며, 어진 제작과 진전 건립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아관파천 이후 1897년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선원전을 새로 지어 경복궁 선원전의 어진들을 옮겨 봉안했다. 기존의 선원전에는 태조 어진이 봉안되어 있지 않았는데, 1900년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했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선원전과 어진이 모두 소실되자, 즉시 선원전을 중건하고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익종).헌종 7조의 어진을 다시 제작하여 1901년에 봉안을 완료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태조 어진을 1본 더 모사하여 새로 중건한 개성의 목청전에 봉안했다. 고종 자신의 어진은 공식적으로 두 차례 제작했는데, 1872년에는 면복본을 포함하여 5본을 제작했고 1902년에는 고종 어진 5본과 황태자(순종) 예진 6본을 제작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1902년 무렵의 고종과 순종 사진

고종 어진과 순종 예진 도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1901년 9월부터 1902년 9월까지 진행되었던 고종 51세 어진과 황태자 29세 예진 제작 및 봉안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주관화사로 조석진과 안중식이 참여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고종 어진, 1902년 즉위 40주년을 맞아 그린 어진이다.

얼굴부분,

20세기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사진처럼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표현이 특징이다.


순종 예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어진을 제작할 때 같이 그린 그림이다.


순종 초상 사진, 이와타 카나에, 1909년경,

육군대장복 차림의 순종 초상 사진이다. 일제 통감부 시기 황실 어용사진사 역할을 했던 이와타 카나에가 촬영한 것으로 촬영시기는 1909년으로 추정된다.


순종 어진, 김은호, 1928년,

순종이 승하한 뒤인 1928년에 이당 김은호가 제작한 어진이다. 익선관에 황색 곤룡포를 착용하고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이다. 김은호는 초상화를 그릴 때 전통적인 초상화법 대신 사진을 보고 얼굴의 윤곽과 음영을 파악하여 부드럽게 그리는 사진영상식 수법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8년의 순종 어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순종은 1874년 2월 고종과 명성황후의 두번째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1910년 국권을 빼았긴 뒤 이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다 1926년 4월25일에 승하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순종 어진 복원모사도, 2014년,

1928년에 김은호가 그린 순종황제 어진의 소실된 복원하여 제작한 모사도이다. 유물에 남아있는 부분을 토대로 소실된 부분에 대한 디지털 복원 작업을 더해 초본을 제작하였다. 얼굴의 소실된 부분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순종 어진 초본>과 1916년 김은호가 그린 순종 어진의 흑백사진을 활용하여 복원하였고, 곤룡포의 용보는 세종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황룡포의 오조룡보를 참고하였다. 유물 자체에 대한 상태조사 결과에 더해 관련 문헌자료를 검토하여 원본과 최대한 가깝게 채색하고 장황하여 마무리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의 국왕과 어진
조선의 국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왕위에 오른 최고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최고의 지위에 있는 왕의 모습을 형상화한 어진은 살아 있는 왕과 다름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던 어진은 그것이 제작되고 봉안되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별한 의미와 역할이 부여되었다. 어진은 현실 속의 국왕 자신을 대신해 돌아가신 부모님 곁을 지키는 분신으로서의 의미를 갖기도 했다. 영조와 정조는 친부모의 사당이나 묘소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게 했는데 이는 부모님께 효를 다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어진은 살아 있는 권력자의 권위와 힘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더욱 확고하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정조는 어진 봉심의례를 정하고 신하들이 이를 따르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어진을 권력강화에 활용했으며, 고종은 역대 국왕들의 어진, 그 중에서도 태조 어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수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도 어진 제작과 진전 운영의 전통이 꾸준히 지속된 점은 조선의 국왕들에게 어진과 진전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며, 어진이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다른 의미의 상징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출처: 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