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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어진 봉안공간, 진전

진전(眞殿)은 국왕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 사찰의 조사당(祖師堂), 일반 사대부 가문의 사당인 영당(影堂)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진전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나타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고려태조와 선대 왕 4대의 모신 경령전을 도성내 두었으며 역대 국왕들을 위해 세워진 원찰에 국왕과 가족의 초상화를 모시는 진전을 두었다고 한다. 조선은 개국 초기에 전조의 수도였던 경주, 개성, 평양과 이씨 왕조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전주와 영흥에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경기전 등을 두었다.

어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조선후기에는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신 전각으로 궁궐내에는 창덕궁에 선원전을, 궁궐밖 도성 안에는 영희전을 두었다. 또한 전쟁 등을 대비하여 강화행궁에 별도의 진전을 두었으며, 수원 화성행궁 내 정조 어진을 모신 화령전처럼 특정 왕을 모신 진전이 세워지기도 했다. 조선후기 진전은 어진을 보관하는 장소의 의미를 넘어서 영당이나 조사당처럼 사당의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다례나 작헌례 같은 의례를 거행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셨던 대표적인 진전인 창덕궁 선원전(보물).

어진 봉안공간, 진전
진전은 어진을 모시고 여러 가지 의례를 거행하는 건물이다. 조선시대 진전은 한 분의 어진을 위한 진전과 여러 임금의 어진을 위한 진전으로 구분된다. 한 분의 어진을 위한 진전으로는 조선 초기부터 한양과 지방 여러 곳에 세워진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진전이 대표적이며,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던 수원 화성의 화령전도 이에 해당한다. 여러 임금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으로는 궁궐 안에 있었던 선원전과, 그와 별개로 도성 안에 마련된 영희전이 있었다. 조선 전기에 선원전은 어진 보관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조선후기에는 국왕들이 자주 찾아뵙고 기념일에는 다례(茶禮)나 작헌례(酌獻禮) 등의 의례를 거행하는 곳으로서 중요성이 커졌다. 조선 후기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영희전은 태조와 세조 등 공이 크다고 평가되는 왕들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서 선원전보다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영희전 운영과 이곳에서의 의식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국가 전레서에 수록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집경전구기도, 19세기말,

경주 있던 태조 진전인 집경전 터를 그린 그림이다. <경주읍내전도>와 집경전 연혁에 대한 설명이 첩으로 묶여있다. <집경전구기도>에는 옛터에 남아 있는 후중문, 비각, 삼문 등이 표현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태조 진전
조선초기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진전은 한양을 포함 영흥, 경주, 전주, 평양, 개성에 세워졌다. 가장 먼저 세워진 진전은 영흥 준원전과 경주 집경전으로 태조 재위 중인 1398년에 태조 어진이 봉안되었다. 태종 대에는 전주 경기전(1410년)과 평양 영숭전(1405년 이전), 그리고 개성 계명전(1419년)이 세워졌다. 계명전은 나중에 목청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양 문소전에도 태조의 어진을 봉안했으나, 문소전의 태조 어진은 얼마 뒤 선원전으로 옮겨졌고 이후에도 한양에는 태조 진전이 세워지지 않았다. 지방 다섯곳의 태조 진전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각과 어진이 소실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조선 말기까지 영흥 준원전과 전주 경기전 두곳만 운영되다 1901년 고종의 명으로 개성 목청전이 다시 세워지고 새로 제작된 태조의 어진이 봉안되었다. 이 중 개성 목청전 건물이 현재 북한에 남아 있으며, 전주 경기전은 현재까지 어진을 봉안하고 있는 유일한 진전으로서 조선시대 진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경묘경기전도형, 대한제국, 1899년 이후

태조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과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그의 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의 건물 배치도이다. 경기전 정전과 부속건물들을 자세히 묘사하였으며, 나무에 날아든 학을 통해 신성함을 표현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전주 경기전.

영흥 준원전과 함께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전주 경기전.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진전이다.

경기전의, 20세기 전반

전주 경기전의 규모, 연혁, 권원의 임무, 제향 절차, 소요되는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을 기록한 책이다. 1897년 이전에 간행된 책을 후대에 필사한 것이다. 시작 부분에 정전과 부속 건물들이 배치도가 실려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개성 목청전 사진.

구한말 고종 때 새로 세워진 목청전이다. 전주 경기전과 마찬가지로 태조 어진을 모셨다.

목청전 축판, 1900년경

진전 의례에서 축문을 올려두었던 직사각형의 판이다. 한쪽면에 “목청전축판”이라는 명문이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어, 태조 어진을 봉안한 개성 목청전에서 제사 때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목청전 태조 어진 봉안 행렬 반차도, 대한제국 1901년

고종 연간에 재건된 목청전에 봉안할 태조 어진을 모시고 개성으로 이동하는 행렬의 인원과 배치를 표시한 반차도이다. 행렬을 구성하는 인원과 의장물, 어진을 모신 신여 등을 판화 형태로 찍어서 표현한 후 그 위에 채색하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흥 준원전 정전.

전주 경기전과 함께 남아 있었던 태조 어진을 모신 영흥 준원전이다.

영흥 준원전 전경.

준원전과 부속건물 전체를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준원전도, 조선 1808~1840년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영흥 준원전을 그림으로, 함경도에 위치한 태조의 4대조의 능과 태조 관련 사적지를 그린 <북도각릉전도형>에 실려 있다. 주변 산세를 그리고 가운데 정자형 정전과 부속 건물들을 그려 넣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희전 중수 공사를 기록한 의궤, 조선 1748년

1748년(영조 24) 낡은 숙종의 어진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기 위해 진행된 영희전 중수 작업을 기록한 의궤이다. 당시 태조, 세조, 원종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숙종 어진을 추가 봉안하기 위해 3실에서 5실로 늘려 지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희전 사진.

일제강점기 영모궁이 있었던 서울대 의대에 있던 영희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희전(永禧殿)
영희전은 여러 임금의 어진을 봉안한 열성 진전으로 한양 도성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영희전은 처음에 남별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1619년(광해군 11)에 태조와 세조의 어진이 처음 봉안되고 인조 대에 추존왕 원종의 어진이 추가로 모셔졌다. 그러나 전란에 대비해 강화도로 옮겨진 태조 어진이 병자호란 때 크게 훼손되어, 이후 남별전에는 세조와 원종의 어진만 봉안되어 있었다. 숙종은 남별전을 증건하고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제1실에 봉안했으며, 영희전이라는 정식 이름을 정하였다. 영조는 기존 3실이었던 영희전을 5실로 늘리고 숙종의 어진을 제4실로 봉안했으며 정조 대에는 제5실에 영조 어진을, 철종 대에는 제6실에 순조 어진을 봉안했다. 19세기 말, 영희전 주변에 외국인의 왕래가 늘자 고종은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자리에 있던 경모궁으로 영희전을 옮기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1900년 이곳으로 영희전을 옮기고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의 어진을 봉안했으나, 1908년 일제의 조치에 의해 어진들이 모두 덕수궁(옛 경운궁)으로 옮겨졌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희전 이전 공사를 기록한 의궤, 1900년

1900년 서울 훈도방에 있던 영희전을 숭교방의 경모궁 터로 이전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1899년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신위를 경모궁에서 종묘로 옮겨 모심에 따라 경모궁 자리로 영희전을 이전하게 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희전지, 조선 1751년

영희전지, 조선 1751년.  운형상황 등 세부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여러 왕들의 어진을 봉안한 영희전의 연혁, 규모, 봉안된 어진의 내역, 제향의 종류와 절차 등을 기록한 책으로 1751년 김용겸이 편찬하였다. 당시 영희전의 운영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희전 사진이 실린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앨범,

1932년. 영희전과 부속 건물 등 전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의 의학부 졸업앨범으로 1908년 영희전이 폐진된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실려 있다. 어진을 봉안했던 정전을 비롯해, 재실 등 부속 건물을 포함한 영희전의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희전이 있던 서울대 의대 교정에 있는 함춘원지.

동궐도에 표현된 선원전.

정전인 인정전 왼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궁궐 안의 진전, 선원전
초기에 선원전은 어진뿐 아니라 왕실족보인 선원록을 함께 보관하던 곳으로 궁궐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선원전이 경복궁 안에 건립된 것은 세종대의 일이다. 조선 전기에 수십 본의 어진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훼손되었고, 전란 이후에도 한동안 운영되지 않다가 숙종대부터 다시 운영되기 시작했다. 숙종은 1695년에 제작한 자신의 어진을 창덕궁 춘휘전(春輝殿)에 보관하게 하고 건물 이름을 선원전으로 바꾸었다. 이후 창덕궁 선원전에는 숙종 어진에 더하여 영조, 정조, 순조, 문조(익종), 헌종의 어진이 차례로 봉안되었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김에 따라 창덕궁의 어진들도 경복궁 선원전으로 옮겨졌고, 1897년 다시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겨져 새로운 선원전에 모셔졌다. 이전에는 선원전에 태조 어진이 봉안되지 않았으나 고종은 경운궁 선원전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고, 창덕궁과 경복궁의 선원전에도 태조 어진을 위한 감실을 마련했다. 경복궁과 경운궁의 선원전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창덕궁에는 기존의 선원전(구선원전)과 함께 1921년에 지어진 12실 규모의 신선원전이 남아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어제선원전기, 1772년

1772년(영조 48) 5월 영조가 경복궁 문소전과 선원전 옛터를 방문한 감회를 쓴 글이다. 글씨는 예조판서 김학성이 썼다. 이글에 따르면 당시 문소전 동쪽에 위치한 선원전은 세 칸 건물터와 월대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 고궁박물관>

경운궁 선원전 재건 공사를 기록한 의궤, 1901년

1900~1901년 진행된 경운궁 선원전 중건 공사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1900년 화재로 인해 경운궁 선원전과 일곱 임금의 어진들이 소실되자 고종은 즉시 도감을 설치하고 선원전 재건 공사와 어진 모사 작업을 진행하도록 명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경운궁 선원전 사진.

덕수궁 뒷편. 빈터만 남아 있는 선원전 옛터.

경안당 현판, 19세기 후반

고종 대에 중건된 경복궁 선원전 재실인 경안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되자 고종은 1868년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된 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익종).헌종 어진을 경복궁 선원전에 옮겨 모셨다. <출처: 고궁박물관>

창덕궁.경복궁 선원전증건도감의궤, 1900년

1900년 창덕궁과 경복궁의 선원전을 각 1실씩 중건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고종은 1899년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추존한 뒤, 창덕궁과 경복궁 선원전에 태조를 위한 감실을 마련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강화부궁전도> 제3폭, <장령전도>, 19세기, 복제,

숙종 어진을 봉안했던 장령전을 그린 도형이다. 장령전과 향실, 재실 등 부속 건물들이 그려져 있다. 1695년 숙종은 태조 어진을 봉안했던 영승전 옛 터에 장령전을 짓고 조세걸이 그린 자신의 어진 2본 중 1본을 봉안하게 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강화부궁전도> 제4폭, <봉선전도>.<만령전도>, 19세기, 복제

강화도에 있었던 봉선전과 만령전을 그린 도형이다. 봉선전은 1622년 세조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처음 세워졌으며, 만령전은 1713년 장령전의 별전으로 세워졌다가 1745년 영조 어진을 봉안하면서 만령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복원된 외규장각과 빈터만 남아 있는 강화부궁 옛터.

어진봉안각 현판, 1792년

사도세자의 묘인 수원 현륭원 재실에 마련된 어진봉안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1789년 정조는 현륭원을 조성하고 이곳에 자신의 군복본 어진 1본을 두게 하였다. 1792년 여름 좌의정 채제공이 왕명을 받아 현판 글씨를 썼다. <출처: 고궁박물관>

화성 융건릉 재실

화령전응행절목, 1804년

정조 어진을 봉안한 수원 화령전(華寧殿)에서 이루어지는 어진의 보관, 봉심, 제향 등에 대해 정리한 절목이다. 정조의 대소본 어진 2본의 보관 및 봉심에 대한 규정과 화령전 운영을 위한 각종 원칙들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수원 화령전 옛 사진.

정조의 어진을 모신 수원 화성행궁 내 화령전.

성일헌 현판, 19세기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의 신위를 모셨던 경우궁 재실인 성일헌의 현판이다. 1837년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하교에 따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순조 어진 2본과 문조(익종) 어진 3본을 성일헌에 봉안했다. <출처: 성일헌 현판>

『경모궁의궤』에 실린 경모궁 도설 중의 망묘루

평락정 현판, 19세기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의 평락정에 걸었던 현판이다. 1899년 사도세자의 사당인 영묘궁의 망묘루를 선희궁으로 옮겨 평락정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조.순조.문조(익종).헌종.철종의 어진도 함께 옮겨 봉안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