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의 초상화를 모신 진전(眞殿)은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비슷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조선후기 진전에는 전담 관원들을 배치하여 크고 작은 제향을 올렸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진전은 국왕이 직접 제향을 올리는 국가차원의 제향시설로 격이 높아 졌다. 전시에서는 진전의례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제기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 구한말에 사용된 것으로 종묘 제기와는 약간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는데 은제 그릇이 많고 서구의 영향을 받은 당시의 제향문화을 엿볼 수 있었다.
창덕궁 신선원전 태조 어진 감실 재현
복원한 태조 이성계 어진 속 얼굴.
어진 봉안용 회화
조선시대 왕이 있는 곳에 항상 일월오봉도가 놓였던 것처럼 어진 제작 과정이나 완성된 어진을 봉안할 때에도 일월오봉도가 배치되었다. 어진 관련 의궤의 도설에서도 확인되는 삽병(揷屛)은 한 판으로 된 일월오봉도를 삽기(揷機)라고 하는 지지대에 끼워 세우는 형태의 글미이다. 일월오봉도 삽병은 어진의 밑그림인 초본을 걸어서 제작 상태를 살필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진을 봉안한 진전에도 윌월오봉도가 설치되었는데, 영조 대에 이루어진 영희전 증축 관련 기록을 담은 의궤에도 감실 안에 설치할 오봉산 병풍 제작에 대한 내용이 있으며, 전주 경기전 정전 뒷벽과 창덕궁 신선원전 감실의 당가에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모란도 역시 왕실의 중요한 의례용 그림으로서, 1901년에 편찬된 『7조영정모사도감의궤』에는 어진 봉안용 모란도 제작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이때에는 6폭짜리 모란병풍 7좌와 4폭짜리 모란병풍 2좌, 그리고 선원전 뒷벽 설치용으로 총 28폭의 모란도가 제작되었다. 현재 창덕궁 신선원전 감실 뒤쪽의 벽에 모란도가 부착되어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출처: 고궁박물관>
1921년에 세워진 창덕궁 신선원전 제1실 태조 어진 감실을 실물에 가까운 크기로 재현하였다. 신선원전에는 12개의 감실이 있으며 각 감실마다 일월오봉도로 3면을 장식한 당가(唐家)가 설치되어 있다. 당가 안에는 높은 등받이를 갖춘 용상이 있고 당가 앞에 답상이 놓여 있다. 당가 안쪽 천장에 두마리의 용 조각이 부착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다.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감실 뒤쪽 벽에 모란도가 부착되어 있으며 감실의 전면은 화려한 투각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각 감실 사이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다. 감실 안에 걸려 있는 어진은 1900년 함흥 준원전 봉안본을 모사하여 제작한 태조 어진 롱룡포본을 복원하여 모사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준원전 태조 어진 유리건판 사진을 참고하여 복원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모란도 병풍, 19세기말 ~20세기초
초대형의 4폭 모란도 병풍으로 2좌가 한 쌍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왕실에서는 국태민안과 태평성대의 상징인 모란 그림을 대형 병풍으로 만들어 가례, 흉례 등의 중요 의례와 진전에 어진을 봉안할 때 사용하였다. 진전 주벽에 설치하기 위한 모란도 제작에 대한 기록이 어진 관련 의궤에 수록되어 있으며, 1921년에 건립된 창덕궁 신선원전 각 감실의 뒤쪽 벽에 대형 모란도가 부착되어 있다. 1901년 간행된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 영정모사도감의궤』에는 7좌의 6폭 모란병풍, 진전 설치용 모란도 28폭, 2좌의 4폭 모란병풍 제작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일월반도도 병풍, 19세기말 ~29세기초, 보물
무릉도원 등에 나타나는 복숭아의 도교적인 상징이 반영된 그림이다.
2좌가 한 쌍을 이루는 초대형 일월반도도 4폭 병풍이다. 파도치는 바다 위에 해와 달이 떠 있고 복숭아나무에 열매가 열려 있는 모습을 단순화하여 그렸다. 선명하고 화려한 채색과 정교한 필치로 대표되는 궁중 장식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해와 달의 배치는 일월오봉도와 유사하나 복숭아, 불로초와 같은 소재는 왕실의 영원함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01년 간행된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 영정모사도감의궤』에는 4폭 해반도병 2좌를 제작하는 데 쓰인 재료와 참여한 화원 10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병풍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고궁박물관>
일월오봉도 삽병, 19세기말 ~20세기 초
일월오봉도는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궁중 회화로 왕이 머무는 곳에는 실내와의 구분이 없이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를 배치했다. 이 삽병은 대형 액자 형태의 화면에 그려진 일월오봉도를 별도의 나무지지대에 끼워 세우는 형태로 제작된 병풍이다. 어진 제작 과정에서 어진을 봉심할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며, 지지대의 양옆에 달린 고리와 삽병 꼭대기에 달린 두 개의 도르래에 끈을 연결하여 고정시켰다. 1901년 간행된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 영정모사도감의궤』와 1902년 간행된 『고종어진.순종예진 도사도감의궤』에 이와 거의 같은 모양의 일월오봉도 삽병 그림이 실려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진전의례
어진을 모신 진전에는 전담 관원들을 배치하고 의례용 물품과 제물을 갖추어 크고 작은 제향을 올렸다. 제향의 주관자는 경우에 따라 왕이 되기도 하고, 국왕이 특별히 보낸 대신이나 지방관들이 담당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진전과 어진 관련 의례는 왕실 차원의 행사가 아닌 국가 전례로 정비되었으며, 국왕이 직접 제향을 올림으로써 의식의 규모와 격을 높이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태조 진전에서 거행되는 의례를 정비하여 전례서에 명시하고 정월 초하루와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및 납일(동지 후 세번째 미일)에 제향을 올리도록 했다. 숙종대 이후에는 영희전에 국왕이 행차하여 음식과 술을 올리는 작헌례 등의 제향을 직접 거행했다. 영조 대부터는 선왕의 탄신일에 선원전에 작헌례나 다례를 올렸다. 진전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어진의 제작과 봉안행사도 순서와 내용을 규정하여 예를 잃지 않도록 했으며, 봉안된 어진을 살펴보는 봉심도 공식적으로 정해진 예법을 따르도록 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희전에 작헌례를 올린 감회를 담은 글을 새긴 현판, 1759년
1759년 6월 10일 영조가 영희전에서 작헌례를 행하고 돈녕부에서 보첩을 봉심한 뒤 지은 글을 새긴 현판이다. 영희전에서는 숙종대부터 2~3년에 한번씩 길일을 택하여 국왕이 직접 작헌례를 거행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진전에서 사용한 제기목록, 1851년
1851년(철종 2) 5월 17이에 진전 제6실에서 사용된 의례용 기명의 종류, 수량, 무게를 기록한 발기이다. 첫째 줄의 은시접부터 마지막 줄의 주칠궤까지 총35종의 기명의 명칭이 적혀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진전에서 사용한 제기목록, 1846년
1846년(헌종 12) 8월 초6일에 진전 제 4.5실에서 사용된 의례용 기명의 종류, 수량, 무게를 기록한 발기이다. 첫째 줄의 은시접부터 마지막 줄의 왜질향합함까지 총 34종의 기명의 명칭이 적혀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어진보관함, 19세기 말 ~20세기 초
어진을 옮기거나 보관하는 데 사용했던 함이다. 어진이 그려진 족자를 말아서 보관할 수 있도록 가로로 길고 낮은 몸체에 뚜껑을 경첩으로 고정하였으며, 꽃무늬가 새겨진 장석을 부착하였다. 함의 안쪽 전체 면에 비단을 발라 마감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어진 보관통, 흑장통, 19세기 말 ~20세기 초
어진 보관통, 흑장통, 19세기 말 ~20세기 초
어진 보관통, 흑장통, 19세기 말 ~20세기 초
전쟁과 같은 위급 상황에서 어진을 신속히 피난시키는데 사용한 통이다. 어진 족자를 말아서 넣을 수 있도록 긴 원통형 몸체에 용무늬가 조각된 뚜껑을 달았으며, 통을 담아 어깨에 멜 수 있도록 긴 끈이 달린 원통형 가죽주머니를 갖추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은제접시, 20세기 초,
비교적 높은 굽이 달린 오목한 은제 접시이다. 네 점 모두 굽의 표면과 바깥바닥에 “육실”일 새겨져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은제접시, 20세기초
넓은 굽이 달린 오목한 은제 접시로, 다른 진전 의례용 은제 접시들에 비해 지름이 큰 편이다. 굽의 바깥바닥과 표면에 각각 “사실”이 새겨져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도금된 은제잔받침, 20세기 초
잔을 받치는 도금이 된 접시이다. 구연부를 넝쿨문 형태로 제작하고, 그 가장자리 내부에 넝쿨문을 둘러 장식하였다. 중앙에는 커다란 꽃문양을 새겼다. 바깥바닥에 “십+”자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신선원전 제10실, 즉 철종의 어진을 모셨던 감실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고궁박물관>
수저를 담는 은제그릇, 20세기 초
제사 때 수저를 담아놓은 시접으로, 뚜껑 한쪽에는 사다리꼴 구멍과 덮개가 있어 수저를 꽂아 열고 닫을 수 있게 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은제병합, 20세기초
뚜껑을 갖춘 납작한 원형의 합으로, 뚜껑 윗면에 “수”자문을 크게 새기고 문양만을 도금하였다. 몸체의 앞면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 문양을 장식하였다. 몸체 바깥바닥에는 ‘미”와 “순은”명문이 찍혀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은제접시, 20세기초,
높은 굽이 있는 세밀한 꽃잎 형태의 접시이다. 굽의 표면에는 “십오량이전”, 바깥바닥에는 “이실”이 새겨져 있다. 이 접시는 “영종모사도감의궤”(1901년)에 실린 꽃잎 형태의 ‘은접시’도설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은제 주기, 20세기초
긴자루형 손잡이와 짧은 주구가 달린 주기로, 꼭지가 부착된 뚜껑이 있다. 몸체와 주구가 맞닿은 면에 꽃문양을 장식하였고 주구에는 덮개가 있다. 몸체 바닥과 손잡이 윗면에 “일실”이 새겨져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은제우리대, 20세기초
중박계.약과.산자.다식 등 유밀과류 제수를 여러 단으로 쌓은 우리(于里)의 받침이다. 여섯 점이 일괄을 이루는 우리대의 구연부와 바깥바닥에 각각 “이실”, “삼실”, “사실”, “오실”이 새겨져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은제잔받침, 20세기초
잔을 받치는 납작한 원형 접시이다. 접시 중앙에 약간 파인 원형 테두리를 두어 잔을 놓을 수 있게 하였다. 두 점 모두 굽의 바닥에 “목청전” 명문이 동일하게 새겨져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은제접시, 20세기 초
은제 식해기, 20세기 초
식해를 담는 그릇으로 굽이 달린 발형태를 하고 있다. 표면과 바깥바닥에 각각 “사실”이 1점, “육실”이 1점, “칠실”이 3점의 그릇에 새겨져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동제 향로, 20세기 초
진전 의례에서 사용된 세 발 달린 정형 향로이다. 사자 장식을 갖춘 뚜껑의 상단에 축수를 기원하는 ‘수’, ‘복’, ‘강’, ‘녕’의 네글자와 만(卍)자문을 새겼으며, 몸체에는 한 쌍의 봉황문과 변형된 뇌문을 둘러 새겼다. <출처: 고궁박물관>
은제 파란 향합, 20세기 초
진전 다례 때 사용된 것으로 은에 청색 유리질 유약을 올린 파란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전체적으로 국화와 넝쿨 문양을 새기고 여백은 어자문으로 메워 장식하였다. 『영정모사도감의궤 』에 실린 향합 도설과 거의 일치하는 유물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동제도금향로, 20세기 초
진전 의례에서 사용된 세 발 달린 역형 향로이다. 뚜껑에 다양한 꽃문양과 넝쿨문양을 투각하고 몸체의 앞뒷면에는 모란절지문을 섬세하게 새겼다. 『영정모사도감의궤 』에 실린 향로 도설과 거의 일치하는 유물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손잡이 두개가 달린 은제잔, 20세기 초
진전 다례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잔으로 몸체 양쪽에 한 쌍의 영지형 손잡이가 달려 있다. 몸체에 뇌문과 고사리문양을 새겼으며 뚜껑은 칠보문으로 장식하였다. 잔의 바깥바닥에는 “십”자가 새겨져 있어 신선원전 제10실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고궁박물관>
은제도금주전자, 20세기 초
신선원전 제10실인 철종 어진을 모신 감실에서 의례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주전자이다. 몸체 양쪽에 용머리 장식 손잡이와 괴수머리 장식 주구가 달려 있으며 앞뒷면에는 삼족오와 달에서 방아 찧는 토끼가 각각 새겨져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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