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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릉] 왕릉을 지킨 사람들

조선왕릉을 지키는 관리는 정2품에 해당하는 수릉관을 비롯하여 종 5품 관리 1명과 종9품에 해당하는 관리를 임명하였다. 그중 왕릉을 관리하는 업무는 재실에 머물면서 왕릉을 수호하고 능역을 관리.감독하는 능참봉이라 불렸던 종9품의 관리가 맡았다. 능참봉은 2명이 교대로 한달에 15일씩 왕릉 재실에서 근무했는데, 제사를 준비할 때 외에는 할일이 그리 많지 않고 과거시험 없이 임용이 가능했기때문에 주요 사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2~3개의 왕릉에서 연이어 근무한 후 지방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김반 영릉 영 임명 문서, 1789년

1789년 10월 13일 김반을 영릉(英陵) 영(令)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왼편 연호와 숫자 사이에 10×10㎝의 발급주체가 국왕임을 의미하는 ‘시명지보’가 찍혀 있다.<출처: 고궁박물관>

김조연 희릉 참봉 임명 문서, 1814년

조선시대 고과를 관장하던 이조에서 1814년 12월 25일에 내린 국왕의 명을 받들어 김조연을 희릉(禧陵) 참봉(參奉)에 임명한 문서이다.<출처: 고궁박물관>

능침일기, 1899~1901년

1899년부터 1901년 사이에 작성된 왕릉 관리자의 기록 및 잡록이다. 날씨, 방문자, 당시의 사건, 각관서의 세입과 세출 항목 등이 적혀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융릉관장 인장

강릉관관방 인장

희릉효릉예릉소경원관장 인장

헌릉관관방 인장

태릉관관방 인장

인릉관관방 인장

건릉관장 인장

헌릉인릉관장 인장

태릉강릉관장 인장

예릉관장 인장

능참봉의 일상
조선왕릉의 관리 업무를 담당하였던 능참봉은 비록 종9품의 낮은 벼슬이었지만 왕릉에 속해 있는 전답과 산의 나무 등 조선시대의 중요한 재물을 출납할 수 있는 큰 권한이 있었다. 또한 왕실에서 특별히 관리에 신경을 썼던 왕릉 관리의 실적인 책임자로서 중요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며, 품계만 있으며 과거 시험 없이 임용될 수 있는 자리였기에 관직에 진출하고자 하는 사족들에게 인기 있는 관직이었다. 능참봉은 대개 2명이 한달에 15일씩 나누어 교대로 근무했으며, 왕릉의 재실에 머물며 제례 준비와 시행.분향.능역 내의 산림 수호 및 범죄 예방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제례일 전후에는 매우 바쁜 일상을 보냈지만 그 외에는 능역 내 순찰 이외에는 할일이 그리 많지 않아 주변 능참봉들과의 교류.중앙 정계 정보 수집.과거 시험 준비 등 개인 업무를 볼 수 있었다. 능참봉은 2~3개의 왕릉에서 연이어 근무하고 그 이후 지방관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출처: 고궁박물관>

장릉 선생안, 1788년 이후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그의 비인 인헌왕후의 능인 장릉의 영과 참봉 명단을 기록한 선생안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왕릉을 돌본 사찰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왕실은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재(齋)를 관장하고 능을 관리.수호하는 사찰을 왕릉 가까이에 두었다. 이러한 사찰을 원찰(願刹)이라고 하였는데, 돌아가신 선왕의 신위를 모시고 능을 보살핀 사찰을 특별히 능사(陵寺)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산릉제례에 필요한 두부 등 제수용품을 공급하는 사찰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자 능사의 역할이 점차 축소되었다. 능사의 경우 조성에서는 이들을 국가 공인 사찰로 인정하여 노비와 토지를 하사하는 등 그 위상에 걸맞은 대우를 하였다. 대표적인 사찰로는 정릉의 흥천사, 태강릉의 불암사, 선정릉의 봉은사, 융릉의 용주사 등이 있다. 태조 건원릉의 원찰은 개경사였으나 폐사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용주사 상량문, 1790년

원 제목은 「화산용주사상량문」으로 1790년 용주사를 건립할 때 정조의 명으로 채제공이 직접 짓고 글씨를 쓴 것이다.<출처: 고궁박물관>

어제화산용주사봉불게 탁본, 1795년 이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에 내린 기복게의 탁본첩이다. 정조는 현륭원 근처에 용주사를 능침 사찰로서 건립하여 부친의 명복을 빌도록 하였다.<출처: 고궁박물관>

『백곡집』 중 「봉은사중수기」, 1682년

승려 처능의 시문집으로, 이 책에 실려 있는 「봉은사중수기」에 봉은사를 중수하여 능침 사찰로 운영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을 지킨 사람들
왕릉 관리는 조상의 사후 공간을 지키는 일이라는 점에서 왕실의 존엄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왕실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왕릉 관리는 삼년상을 치른 뒤 종5품 1명과 종9품의 참봉 1명이 능관으로 임명되어 이루어졌다. 이 중 참봉은 관직 중 가장 하위직인 종9품직임에도 불구하고 왕릉을 수호하는 직무의 상징성으로 인하여 엄격한 기준을 두고 선발하였다. 각 왕릉에 배속된 참봉은 능과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참봉은 정자각의 청소와 능의 경비를 담당하는 수복.화소역과 화재예방 및 능역의 제초작업을 담당함 능을 지키는 수호군과 같은 잡직의 관리감독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참봉은 2명이 교대로 15일 간격으로 재실에 거주하며 업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참봉과늘 별도로 수릉관(守陵官)이라는 관직도 존재했다. 정2품에 해당하는 수릉관은 왕을 대신하여 왕릉에 남아 참회복(상복)을 입고 종실에서 시묘(侍墓)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