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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헌릉(獻陵, 사적),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獻陵, 사적)이다. 한강 이남 대모산 남쪽편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봉분이 같은 언덕에 조선된 쌍릉으로 태종의 명에 따라서 고려왕릉의 불교적 요소를 제거하였다. <국조오례의>에 따라 조성된 조선중기 이후 정형화된 왕릉과는 달리 고려왕릉의 형태가 일부 남아 있다. 봉분 앞에 혼유석,장명등 등 석물이 따로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현릉.정릉과 정종의 후릉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봉분에는 병풍석을 두르고 있으며 바깥에 난간석을 둘로 왕릉으로서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왕릉 앞에는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헌릉에는 불교적인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 원찰은 따로 세우지 않았다. 그의 아들 세종의 능도 원래 이곳에 자리잡았으나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고 하여 예종 때 여주로 옮겼다.

<서울 헌릉(사적)>

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헌릉(사적). <국조오례의>에 왕릉조영이 제도화되기 이전 조성된 능으로 하나의 언덕에 2개의 봉분이 나란히 배치된 쌍릉형식을 하고 있다. 태조 건원릉의 양식을 대체로 따르고 있다.

<홍살문>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연결되는 참도>

후대 왕릉과는 달리 혼령이 다니는 신도와 왕이 지나가는 어도가 별도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산릉제례를 올리는 건물인 정자각>

후대 왕릉의 정자각과는 달리 월대는 낮게 쌓았다. 건물은 앞면 3칸의 정전과 제사를 준비하는 툇간인 배위청이 연결되어 ‘丁’자 모양을 하고 있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수복방과 수라간은 남아 있지 않다.

<정자각 오른쪽에 있는 비각>

태종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보물)와 왕릉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봉분>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 나란히 있는 쌍릉 형식을 하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의 왕릉과는 달리 봉분에 병풍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비롯하여 석물들을 별도로 설치해 놓고 있으며,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석물을 1쌍씩 두고 있다. 헌릉 봉분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혼유석>

<봉분 앞 석물>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1쌍씩 세워져 있다. 이는 고려의 현릉, 정릉과 조선 2대 정종의 후릉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봉분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정자각과 비각>

태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종을 옹립하고,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종종을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태종대에는 조선을 건국한 공신들을 제압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헌릉 입구 재실>

<헌릉으로 들어가는 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능역의 모습을 하고 있다.

헌릉.인릉, 사적,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에는 조선 3대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를 모신 헌릉과 제23대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를 모신 인릉이 있다. 태종은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고, 정종 2년(1400)에 세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랐다. 재위 18년(1418)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종 4년(1422)에 56세로 돌아가셨다. 원경왕후 민씨는 고려 공민왕 14년(1790)에 태어나 정종 2년(1400) 정빈에 책봉되고, 정비가 되었으며 56세로 돌아가셨다. 순조는 정조 14년(1790)에 태어나 11세에 왕위에 올랐고, 재위 34년(1834)에 45세로 돌아가셨다. 순원왕후는 정조13년(1789)에 태어나 순조 2년(1802)에 왕비가 되었고, 철종 8년(1857)에 69세로 돌아가셨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