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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英陵,사적), 조선 4대 세종과 소헌왕후 합장릉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 영릉(英陵, 사적)이다. 조선 4대 세종과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능으로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다. 1469년 여주로 이장하면서 예종 때 반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석물은 난간석 영저(靈杵), 영탁(靈鐸), 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해 조선 왕릉 난간석의 기본을 확정하였으며, 혼유석을 받치는 북모양의 석물인 고석을 기존의 5개에서 4개로 줄였다. 또한 방위를 표시하기 위해 난간석에 조각했던 십이지신상을 간소화하여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를 보자면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했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원찰을 별도로 세우지 않았으며, 인근 남한강변에 있는 신륵사에서 원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주 영릉(사적)>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英陵, 사적). 조서의 예법을 정리한 <국조오례의>가 선포된 이후 이장하면서 조성된 왕릉의 후대의 표준이 되었다. 1970년대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숲이 훼손되는 등 지금은 전통적인 조선왕릉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홍살문>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조선왕릉 참도는 혼령이 지나가는 신도와 제주(국왕)이 지나가는 어도로 구성된 2개의 길이 있으나, 70년대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삼도를 깔아 놓았다. 또한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의미로 거친 박석을 깔아야 하는데, 이곳은 화강석을 깔아놓고 있다.

<왕릉에서 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다른 왕릉 정자각에 비해 월대를 낮게 쌓았다. 월대 옆 계단도 원래 2개가 있어야 하나 참도와 마찬가지로 3개이 계단으로 되어 있다.

제례 때 제무을 진설(차림)하고 제례를 드리던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丁’자 모양을 하고 있어 정자각이라 부른다.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입서출로 진행됨을 의미한다. 뒷벽의 중앙칸에 달린 문짝은 제례를 드릴 때 열어 놓게 되어 있으며 뒤편 서쪽에는 제문을 태우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출처:여주군청>

<정자각 내부>

<수복방>

제기를 보관하거나 수릉관(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처하던 곳이다.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발굴하여 1977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수라간>

산릉제례 때 제례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곳이다. 주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옛 모습을 찾아 복원하였다.

<표석이 세워진 비각>


<무덤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


<신도비>

서울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헌.인릉 부근 원래 세종대왕 능에 있던 신도비. 세조대 이후 왕릉 조성을 간소화하면서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이때 신도비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세종대왕릉은 원래 헌릉 서쪽 산줄기에 있었는데 예종 원년(1469)에 이곳으로 천장하였으며, 왕비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다. 영릉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그리고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영조 21년(1745)에 세웠고, 비각도 이때에 건조되었다. <출처:여주군청>

<예감>

정자각 뒤의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합으로 제례가 끝난 뒤 철상(제례음식을 치움) 하면서 축문을 여기에 태워 묻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 봉분>

예종때 반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2008년 여름>


<문석인>


<무석인>

<석마>

<석양>


<장명등>


<망주석>


<곡장>

세종은 소헌왕후가 죽은 후 부모가 묻힌 서울 내곡동 헌릉 서쪽에 쌍실 무덤은 영릉을 만들었으며, 그가 죽은 후 그곳에 능이 마련되었다. 풍수가 최양선이 ‘후손이 끊기고 장자를 잃는다.”는 곳이라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이후 문종이 단명하고,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와 예종의 장자인 인성대군이 일찍 죽게되자 예종 때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게 되었다. 현재의 영릉은 1970년대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크게 정비하였는데, 다른 왕릉에 비해서 깨끗한 편이지만, 일부는 원래의 모습이 일부 훼손되었다. 여주 영릉내에는 세종의 업적을 기리는 여러가지 전시품들이 복원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과학사적인 업적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영릉 입구 재실>

<영릉으로 들어가는 길>

화강석을 깔아 전통적인 능역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이다.

<능역에 조성된 연못>

<금천교와 금천>

능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높이 일컬어 어구 또는 금천이라 하고 여기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 한다. 금천교는 주로 능역의 수계가 맞닿는 홍살문 앞에 설치한다. 금천교는 그 안쪽이 바깥쪽과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 즉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풍수지리설의 배산임수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물은 산으로부터 흘러온 땅의 기운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금천교는 1930년대까지는 남아 있었으나 그 후 훼손되어 없어진 것을 발굴하여 2008년 5월 복원한 것이다. <출처:여주군청>

<영릉의 원찰 역할을 했던 신륵사>

여주 영릉, 사적,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제4대 왕으로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승하하니 재위 32년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록)을 창제하고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고 4군과 6진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를 개량하여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농사직석, 삼강행실도, 팔도지리지, 석보상절, 의방유취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어진 성덕이 하늘같이 높았다. 영릉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예종 원년(1469)에 여주로 옮겨왔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보하고 그 위업을 오늘에 이어 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새로 짓고 경역을 정비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