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사적)에 있는 희릉(禧陵)이다.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이자 인종의 어머니인 정경왕후의 능이다. 봉분에 둘레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만 두고 있는 단릉으로 조선전기 왕릉의 석물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장경왕후는 중종의 계비로 조선 12대 인종의 어머니이다. 아들인 인종의 능인 효릉이 서삼릉 능역에 같이 조성되었다.
희릉은 왕릉을 옮기는 천장 중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곳이다. 희릉은 원래 태종의 능인 헌릉 부근에 조성되었는데 김안로가 정적을 축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희릉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중종은 죽은 후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묻힌 이곳에 묻혔다. 명종대에 문정왕후 주도로 이곳에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고 하여 성종의 능인 선릉 능역으로 옮겼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2번의 천장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고양 서삼릉 희릉>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다. 원래 중종의 능이 이곳에 조성되면서 정릉이라 불렸으나 문정왕후에 의해 중종의 능이 강남으로 옮기면서 다시 희릉으로 바뀌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정자각 내부>
<표석이 세워진 비각>
<봉분>
봉분에 둘레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만 두고 있는 단릉으로 조선전기 왕릉의 석물 양식을 따르고 있다.
서삼릉은 희릉, 효릉, 예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종 때 내곡동 헌릉부근에 있던 희릉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곳으로 천장하면서 능역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아들인 인종과 인종비의 효릉, 25대 철종과 철종비의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으로 불리기 되었다. 서삼릉에는 왕릉 외 소현세자의 소현묘가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실의 태실, 왕자묘, 후궁묘, 공.옹주묘 등을 대부분 옮겼다.
고양 서삼릉 희릉(禧陵), 사적,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희릉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다. 병풍석 없이 난간만을 두른 단릉(單陵)으로 단아한 느낌이다. 배치나 수법은 조선 전기 양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문석인과 무석인은 기둥 같은 몸체에 큰 머리를 올려놓았으며 목이 거의 없어 어깨가 약간 굽어보인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나 그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희릉은 처음에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에 조성하였다, 그런데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가 세자인 인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켰다. 그 옥사의 구실 중 하나가 희릉 천릉 사건이다. 김안로는 희릉의 입지가 불길하니 당시 능 조성에 관련되었던 자들을 처벌하고 능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1537년(중종 32) 희릉을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기고, 그와 동시에 당시 능을 조영하는데 관련되었던 자들을 처벌하였다. 그 뒤 중종의 정릉(靖陵)이 희릉의 곁에 안장되면서 동원이강 형식의 능을 취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하였다.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에 의해 정릉은 현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 곁으로 옮겨지고 장경왕후의 능은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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