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靖陵, 사적)이다. 조선 11대 중종의 능으로 왕비의 무덤이 없는 단릉 형식을 하고 있다. <국조오례의>에 충실히 따랐으며 선릉과 마찬가지로 봉분에 둘레석을 두르고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원래 중종의 능은 고양 서삼능에 계비 장경왕후와 함께 동원이강릉의 형태로 있었으며, 그 곳을 정릉으로 불렀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였던 문정왕후는 서삼릉에 있던 정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선릉이 있는 이 곳으로 능을 옮겼다. 문정왕후는 자신은 죽은 후 이곳에 정릉에 묻힐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자신의 내세를 위해서 원찰로서 봉은사를 보우대사와 함께 크게 일으키도 했지만, 자신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동구릉 부근 태릉에 묻혔다. 아마도 당시 중종의 능인 정릉의 이장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 정릉(사적)>
서울 강남구 삼성동 도심에 위치한 조선 11대 중종의 정릉(사적). 원래 고양 서삼릉에 있던 것을 풍수지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사후에 이곳에 중종과 함께 묻힐 의도로 능을 옮겼으나 이곳은 물에 자주 잠기는 등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동구릉 부근 태릉에 묻혔다. 문정왕후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홍살문>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홍살문 바깥 울창한 숲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고층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산릉제례를 올리는 건물인 정자각>
<정자각 월대>
<표석이 세워진 비각>
<봉분>
봉분 주위에 둘레석을 두르고 십이지신상을 새기는 등 성종의 능인 선릉의 석물제도를 따르고 있다.
서울 강남구에 도심 한가운데 공원처럼 존재하고 있는 선릉 정릉(사적)은 조선의 전성기를 이끈 성종대왕의 능인 선릉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능이 자리잡고 있다. 중종이 계비 문정왕후가 선릉과 정릉을 위해 원찰로 봉은사를 세웠다. 선릉과 정릉은 왜(倭)를 경계하고자 한강 이남에 터를 잡은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는 피해를 입었다. 1970년대 강남개발로 주변지역이 급격히 도심화되어 왕릉에 속한 영역의 대부분이 아파트, 빌딩, 주택으로 바뀌었지만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소나무를 비롯하여 많은 수목들이 들어선 도심속의 공원 역할을 하고 있다.
<능역 입구에 있는 재실>
원래는 따로 재실이 있었으나 구한말 이후 관리상 편의를 위해 통합하여 운영하고 있다.
<정릉 원찰 봉은사>
봉은사는 성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원찰 역할을 할 작은 사찰인 견성사를 중창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걸 중 한명인 문정왕후가 고양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옮기면 선릉 옆에 있는 사찰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크게 중창하였다.
서울 정릉, 사적, 서울 강남구 삼성동
정릉은 중종대왕의 능이다. 중종은 1488년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1506년 9월 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성종의 차자인 진성대군을 조선 제11대 왕으로 추대하였다. 재위기간 중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왕도정치를 펼치려 현량과를 설치하였고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자치를 시도하였다. 서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여 사림의 기틀이 되었고, 주자도감을 두어 신증동국여지승람, 소학, 삼강행실, 이륜행실, 속동문선을 편찬하였다. 북방야인의 침법에 대비하고 삼포왜란을 진압한 후 비변사를 설치하여 국방체제를 정비하였다. 인종.명종 등 9남 11녀를 두고 1544년 인종에게 전위하고 다음날 창경궁에서 승하하니 재위 39년 보령 57세였다. 1545년 고양 희릉에 예장하였으나 1562녀 선릉 동쪽 동남향 둔덕에 천장되었다. 비는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 제1계비는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 제2계비는 윤지임의 딸 문정왕후이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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