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사적)에 있는 목릉(穆陵)이다. 임진왜란을 겪었던 조선 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같은 산에서 내려온 능선에 3개의 봉분을 따로 만든 동원이강능이다. 원비 의인왕후 박씨의 능을 건원릉 서쪽편에 조성하고 이후에 선조의 능을 조성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했던 당시의 국가 경제 사정을 고려한 측면도 있고, 국난을 극복하면서 제2의 창업을 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인목왕후의 능을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도 이곳에 옮기면서 3곳을 합쳐서 목릉이라 칭했다. 이는 인조반정의 명분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릉은 특이하게 하나의 정자각에서 3곳의 봉분이 있으며, 입구인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거쳐서 각 봉분으로 연결되는 참도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구리 동구릉 목릉>
동구릉 조선 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목릉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 동구릉에 선조의 능을 모신 것은 새로운 왕릉을 조성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을 절감하고, 조선을 태조를 모신 이 곳에 능을 조성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살문>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참도>
주변 지형을 고려하여 참도가 ‘ㄱ’자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정자각 월대에서 내려다 본 참도>
<정자각 월대로 오르는 계단>
<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정자각 내부>
<표석이 세워진 비각>
<정자각 뒷편 선조의 능>
오른쪽에 정비 의인왕후의 능이, 그 오른쪽에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배치된 동원이강릉의 형식을 하고 있다.
<정인왕후의 능>
참도가 봉분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다.
<정자각 동남쪽에 언덕에 위치한 인목왕후의 능>
인조반정을 지지한 인목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목릉을 옮기면서 3기의 능이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를 하게 되었다.
<봉분>
동구릉(사적)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1408년에 승하하면서 조성한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동구릉 재실>
<목릉으로 들어가는 숲>
작은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어 금천교 역할을 하고 있다.
선조.의인왕후.인목왕후 목릉, 사적,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1552~1608)는 중종의 손자로 제13대 명종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돌아가시자 선조가 왕위에 올랐다. 선조가 임금의 자리에 있을 때 임진왜란과 같은 위기가 있었지만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유학을 증진하였기 때문에 훗날 선조의 시대를 지칭할 때 그 능의 이름을 따서 ‘목릉성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조의 첫번째 비는 의인왕후이다. 두번째 비는 인목왕후인데, 의인왕후가 돌아가신 후 1602년(선조35)에 왕비가 되었으며, 영창대군을 낳았다. 하지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도 왕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며 인목왕후는 다시 대왕대비에 오르게 된다. 목릉은 본래 1600년 의인왕후가 돌아가실 때 ‘유릉’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조성하였다. 1608년 선조가 돌아가신 후 건원릉의 서쪽 언덕에 목릉을 만들었다가 1630년 현 지역으로 능을 옮겼다. 1632년 인목왕후의 능을 조성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목릉이라는 하나의 능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하나의 정자각에 세기의 봉분이 있는 조선왕릉은 목릉이 유일하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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