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장릉산 자락에 위치한 장릉(章陵, 사적)이다. 조선 16대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인원왕후의 능이다. 원래 양주군에 있었는데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후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인원왕후의 능 또한 현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이장하였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며, 조선후기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장릉은 약간 경사진 언덕에 홍살문, 정자각, 봉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 오른편에 비각과 수복방이 있다. 인조가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까닭에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능역이 넓고 깨끗하게 조성되어 있다. 왕릉 앞쪽에는 넓은 연못과 재실을 두고 있으며, 원찰로 금정사를 두고 있다.
<김포 장릉(사적)>
추존왕 원종과 인원왕후의 능인 장릉(사적). 선조의 5번째 아들로 인조가 반정에 성공해 왕위에 오르면서 왕으로 추존되었다. 인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김포에 큰 규모의 독립된 능역을 조성해 놓고 있다. 승가대학이 있는 금정사를 원찰로 두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정자각 월대를 오르는 계단>
<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정자각 내부>
<능을 관리하는 수복들이 사용하는 수복방>
<정자각 뒷편 표석이 세워진 비각>
<옛 육경원 비석 받침돌>
<봉분>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있는 쌍릉 형식을 하고 있다. 둘레석이나 난간석을 두르지 않고 혼유적을 제외하고는 석물을 같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왕릉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은 선조의 5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임진왜란때에는 다른 왕자들과는 달리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을 동행했으며, 임란후에는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왕자시절에는 정원군으로 불렸다. 광해군때 집권세력에 밀려났던 서인들과 많이 어울렸던 것으로 보이며, 광해군의 견제를 많이 받기도 했다. 그의 사저는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로 광해군에 의해 쫓겨나고 서궁이라 불렸던 경희궁이 세워졌으며, 셋째 아들 능창군은 무고로 강화도로 유배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격이 활달하여 서인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추존왕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이 실권하고 인조가 집권한 것으로 볼 때 광해군의 견제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에 대한 인물평은 그로 좋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후손이 조선후기 왕위를 이어왔고 서인이 집권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후대에 그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거의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김포 장릉 재실>
<능역 아래 큰 연못>
<장릉으로 들어오는 길>
홍살문 앞에 금천교를 만들어 놓았다.
<장릉 금정사>
인조가 부모의 능인 장릉을 조성하면서 인근에 있던 사찰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원찰로 크게 알려져 있는 사찰은 아니지만 그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있다.
<조선후기 서궐이라고 불렸던 경희궁>
이곳은 원종이 살았던 사저가 있었던 곳으로 왕기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이 이곳에 궁궐을 조성했다.
김포 장릉, 사적,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조선 제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정원군으로 책봉되었으며(1587), 광해군 11년(1619)에 40세로 돌아가셨다. 그의 맏아들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1623), 대원군에 추존되었다가 인조 10년(1632)에 대왕으로 추존되었고, 원종의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인원왕후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3세에 혼인하여(1590) 연주군부인에 봉하여지고, 인조4년(1626)에 49세로 돌아가셨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부부인에 봉해지고, 원종과 함께 왕후로 추존되었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자리한 쌍릉을 이루고 있으며 문무석과 호석을 세웠는데 난간은 없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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