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봉일천리 파주 삼릉(사적)에 위치한 영릉(永陵)이다. 조선 21대 영조의 장자이자 사도세자의 형인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효장세자는 영조가 즉위한지 4년되는 해인 1728년에 어린 나이로 죽었기때문에 처음에는 왕자의 묘로 조성되었다. 이후 영조 38년 사도세자가 죽은 후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고, 정조 즉위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대한제국 선포 이후인 1908년에는 다시 황제로 추존되었다. 추존 내력은 영릉에 있는 3기의 표지석에 기록되어 있다. 왕릉으로 격상되었지만 봉분과 석물은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영릉의 조성 경위와 절차, 부장품 등에 대한 기록은 의궤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파주 삼릉은 조선초기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을 이끌었던 훈구대신 한명회의 딸로 왕비가 되었던 예종 비 장순왕후와 성종 비 공혜왕후의 능이 있는 곳이다. 한양도성에서 비교적 먼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조때 이곳에 묻힌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3기의 왕릉이 있는 파주 삼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파주 삼릉 영릉(사적)>
영조의 큰아들인 추존왕 진종의 능이다. 파주 삼릉에서 제일 늦게 조성되었다. 원래 왕자의 묘로 조성되었으나 정조 때 진종으로,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로 추존되었다.
<영릉 들어가는 길>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다른 왕릉과는 달리 신도만 깔려 있다.
<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정자각 내부>
<정자각 뒷편 표석이 세워진 비각>
여러번의 추존과정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윗쪽 표석>
<봉분>
진종으로 추존되었지만 봉분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배치된 쌍릉 형식을 하고 있다. 왕릉과는 달리 무석인을 세우지 않았다.
영릉의 부장품
부장품은 돌아가신 분이 저승에서도 살아 있었을 때처럼 생활할 수 있도록 무덤 속에 넣는 물품이다. 조선왕릉의 부장품은 화려함보다는 예를 기반으로 소박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파주삼릉에 모셔진 인물 가운데 진종과 효순왕후의 부장품에 대한 기록이 각각의 상례 준비 과정을 기록한 의궤에 자세히 남아 있다. 의궤에 따르면 진종과 효순왕후의 부자움은 대례복과 장신구류인 복완, 실물보다 작게 만든 식기.제기.악기 등의 다양한 명기로 구성되어 있다. 진 종과 효순왕후의 부장품 항목은 조금 다르다. 복식과 장신구류는 부부의 성별에 따라 달리 구성되었으며, 무기류는 남성인 진종의 부장품에만 있다. 이밖에 목노비, 목악인 등은 고대 순장 풍습의 흔적으로 조선초기부터 왕릉 부장품이었으나, 영조가 인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금지하여 효순왕후의 상례를 치를 때부터 조선 왕실 부장품 항목으로 넣지 않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효장세자의 장례과정을 기록한 의궤>
파주 삼릉 영릉, 사적, 경기도 파주시 봉일천리
영릉은 추존왕인 진종(1719~1728)과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진종은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맏아들이자 사도세자의 이복형이다. 1725년(영조1)에 왕세자가 되지만 1728년 10세의 어린나이로 돌아가셨다. 이후 효장이라는 시호를 받아 효장세자로 불리었다. 효순왕후는 1727년(영조3)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1751년에 돌아가신 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진종의 옆자리에 모셔졌으며, 효순이라는 시호를 받아 효순현빈으로 불리게 되었다.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은 돌아가신 후 두차례에 걸쳐 추존되었다. 영조는 1762년(영조38) 사도세자를 폐한 후, 당시 세손인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에따라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은 정조가 왕이 된 후에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었으며, 무덤의 이름도 영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 황제인 순종에 의해 황제와 황후로 다시 한 번 추존되었다. 이러한 추존 과정은 영릉에 있는 3기의 표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릉은 처음에 왕자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난간석과 무석인이 없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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