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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인평대군 신도비와 치제문비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인평대군 묘역 앞에 서 있는 신도비와 치제문비이다. 효종때 세워진 신도비는 거북받침돌, 글씨가 새겨진 비몸, 용과 구름이 새겨진 머릿돌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비석의 형태를 하고 있다. 조각수법이 상당히 섬세하고 화려하면 전체적인 조형미를 뛰어나다. 청나라와 교류가 많았던 병자호란 직후에 세워진 것으로 중국 비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신도비 옆 비각에는 2기의 치제문비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인평대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길 때 형인 효종이 지은 제문과 숙종이 지은 제문이 새겨져 있다. 다른 하나는 영조, 정조, 순조가 직접 짓고 쓴 제문이 새겨져 있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효종과 함께 중 인질생활을 했으며 사신으로 청나라를 오가면서 했던 그의 노력이 후대에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천 인평대군 묘역 앞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와 치제문비>

신도비는 비각이 없이 세워져 있고, 2기의 치제문비는 비각속에 있다.

<인평대군 신도비>

높이 325㎝나 되는 큰 규모의 비석이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정형화된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비석의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비석에 비해 조각수법이 세밀하고 사실적이며, 전체적인 조형미 또한 뛰어난 편이다.

<섬세한 조각수법과 표현이 돋보이는 거북받침돌>

<비몸에 새겨진 글>

<머릿돌>

구름속에 두마리의 용이 싸우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새겨놓고 있다. 당시 청나라 비석 조각수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인평대군 치제문비>

효종,숙종,영조,정조,순조의 글씨로 제문을 새겨놓은 비석 2기가 나란히 있다. 다섯왕이 제문을 쓸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평대군 치제문비 중 숙종대 조성된 비석>

외형은 일반적인 비석의 모습을 하고 있다. 비에는 효종이 동생을 위해 지은 제문과 그 후 숙종이 직접 쓴 제문이 새겨져 있다.

<정조 때 세워진 비석>

영조.정조의 것을 먼저 새기고 순조의 것은 나중에 추가하여 새겼다.

인평대군 치제문비
인평대군(1622∼1658)의 묘 왼쪽에 지어진 한 채의 비각안에 2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치제문이란 공신이나 왕족이 죽은 후 제사지낼 때 임금이 친히 지어 내리는 제문(祭文)으로, 이 비들은 모두 인평대군을 위해 지어진 제문을 새겨 놓았다. 인평대군은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아우로, 여러 차례 청나라를 오가며 나라를 위해 힘쓰다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학문에도 능하고, 글과 그림에도 뛰어나 현재까지도 그의 몇 작품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2기의 비 중 하나는 경기도 광주에 있던 인평대군의 묘를 이 곳으로 옮길 때 효종이 지은 제문과 그 후 숙종이 직접 짓고 쓴 제문을 새겨놓았다. 또한 비의 끝부분에는 숙종 때에 비석을 갖추긴 하였으나 세우지 못하다가, 경종 때에 이르러서야 서평군 이요의 글씨로 비의 명칭을 더하여 비를 세웠다는 사실을 추가로 적어 놓았다. 앞면에 새긴 효종의 글씨는 그의 편지글을 모아서 하나씩 본뜬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조·정조·순조가 직접 짓고 쓴 제문을 새긴 비로, 앞면을 세 등분하여 각각 영조·정조·순조의 제문을 배치하였다. 정조 때에 영조·정조의 것을 먼저 새겨 비를 세운 뒤, 후에 순조의 것을 실은 것이다. 2기 모두 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고 있으며, 지붕돌에 새긴 조각외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간결한 구조이다. 앞의 것은 경종 4년(1724)에 세웠고, 나중 것은 정조 16년(1792)에 세운 것으로, 다섯 임금의 어필(御筆)을 함께 볼 수 있어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출처:문화재청>

<포천 인평대군 묘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