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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인평대군 묘, 인조의 셋째 아들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인평대군 묘이다. 인평대군은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병자호란 후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갔다고 돌아왔으며, 효종때에는 4차에 걸쳐서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병자호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헌신을 한 인물이다. 왕자의 신분이지만 묘역은 규모있게 잘 정비되어 있고, 지금까지도 묘역에 재실과 관리인이 남아 있다. 능(陵)이나 원(園)과는 달리 정자각 같은 제향시설은 두고 있지 않다.

묘역 앞쪽에는 신도비가 있고, 그 옆쪽 비각에는 효종,숙종,영조,정조.순조의 글씨가 새겨진 치제문비가 있다. 치제문비는 2기가 있는데 하나는 효종의 지은 제문과 숙종이 직접 짓고 쓴 제문이 새겨져 있다. 다른 하나는 정조때 영조.정조의 것을 먼저 새긴후 나중에 순조의 글씨를 적었다. 왕자의 신분으로 병자호란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공로를 후대 왕들에 깊은 감명을 준 것으로 보인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의 선조이다.

<포천 인평대군 묘>

인조의 셋째 아들로 조선시대 왕자 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묘역은 기와를 얹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봉분에는 낮게 둘레석을 둘렀다. 석물로는 상석, 장명등, 망주석, 동자석, 문석인과 비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북받침돌이 있다. 왕릉과는 달리 석호, 석양, 석마와 무석인은 두고 있지 않다.


<봉분 앞에 세워진 비석>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왕릉의 경우는 봉분 아래 비각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 앞 상석>

상석을 받치는 고석에는 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상석 앞 장명등>


<무덤의 위치를 알려주는 망주석>


<봉분 앞에 세워져 있는 동자석>

왕릉에는 없는 석물로 죽은 자를 위로하고 터를 지키는 지신이라고 한다.


<무덤을 지키는 문석인>

왕릉과는 달리 무석인은 두고 있지 않다.

<곡장 바깥쪽에 있는 거북받침돌>

다른 비석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역에서 내려다 보이는 포천시 신북면 일대>

<인평대군 묘가 있는 언덕>

<언덕 아래에 있는 신도비>

거북받침돌에 글씨가 적힌 몸돌, 용과 구름이 새겨진 머릿돌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신도비이다. 다른 비석에 비해서 조각수법이 섬세하고 힘찬 느낌을 주고 있다. 청나라 비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치제문비>

인평대군을 위해서 효종,숙종,영조,정조,순조의 글씨로 제문을 새겨놓은 비석 2기가 있는 비각.  다섯왕이 제문을 쓸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역 아래에 위치한 재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

<묘역관리인이 사는 살림집>

인평대군 묘 및 신도비,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 이요(1622∼1658)의 묘이다. 인평대군은 인조 18년(1640) 볼모(국가간에 침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왕자를 그 나라에 맡기는 일)로 중국 심양(지금의 북경)에 갔었으며, 돌아온 이후에도 인조 28년부터 4차례나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왕자의 신분으로 병자호란 후 국난 극복에 헌신하였다. 묘는 부인 오씨와의 합장묘이다. 주위에 낮은 돌담을 둘렀으며, 봉분 아랫부분에는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로는 문인석·망주석·동자상이 각 1쌍씩 서 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325㎝나 되는 큰 규모이며 비석의 조각장식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묘역 아래에는 효종·숙종·영조·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쓴 2기의 비석이 있는데 인평대군의 업적을 예찬한 내용이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