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군 영흥리에 있는 조선 6대 단종의 장릉(莊陵, 사적)이다. 단종은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물러난 후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한 복위운동으로 인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시신은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내고 묻었다. 중종 때 무덤을 찾았으며 그 이후 석물 등을 갖추게 되었다.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장릉으로 승격되었다. 단종비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봉되어 서민으로 살다가 남양주에 있는 단종 누이 경혜공주 집안 묘역에 묻혔다가 단종복위와 함께 사릉(思陵)으로 격상되었다.
장릉은 일반적인 왕릉과는 후릉의 예에 따라 간소하게 조성하였다. 봉분은 엄흥도가 단종을 묻었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언덕 아래에 정자각을 중심으로 제향공간을 조성했다. 봉분에는 둘레석과 난간을 두고 있지 않으며, 석물에는 무석인을 두고 있지 않다. 또한 다른 왕릉과 달리 장릉 주위에 단종을 위해 목숨을 잃은 충신들을 위한 배식단과 장판각을 두고 있으며, 장릉 입구에는 단종을 묻은 엄흥도의 정려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월 장릉(사적)>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단종의 장릉(사적). 조선후기 단종이 복위되면서 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봉분은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두고 그 아래에 제향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왕릉이 있는 신성한 공간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지형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ㄱ’자형으로 꺾여서 연결된다.
<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정자각(丁字閣)
이 건물은 숙종 25년(1699)에 건립하였으며 단종대왕 제향시 제를 올리는 곳으로, 집의 모양이 정(丁)자 모양으로 건립된 제전(祭殿)이므로 정자각 또는 배위청(拜位廳)이라 한다. <출처: 문화재청>
<정자각 월대>
<능지기들이 쉬는 공간인 수복실>
수복실(守僕室)
이 건물은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으로 숙종 28년(1699)에 정자각과 함께 세운 것이다. <출처: 문화재청>
<제향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
수라간(水剌間)
수라(水剌)는 원래 몽고어로서 탕미를 뜻하며, 수라를 짓는 주방을 의미한다. <출처: 문화재청>
<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진 비각>
단종비각
영조9년(1733)에 어명으로 단종대왕릉비와 비각이 건립되었다.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단종대왕장릉」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단종대왕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단종 봉분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엄흥도가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언덕에 묘역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종 장릉 봉분>
숙종의 명에 따라 조선 2대 정종의 후릉의 예에 따라 간소하게 조성했다. 봉분에 둘레석과 난간을 두지 않고 있다.
<장릉 봉분 앞에 세워진 석물>
일반 왕릉과는 달리 무석인이 세워져 있지 않다.
<봉분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 본 제향공간>
<능역 입구 홍살문 앞에 있는 배식단>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위한 제사 시설이다.
배식단(配食壇)
이곳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산위, 환자군노위,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홍살문 바깥쪽에 있는 사당인 장판옥>
배식단과 함께 장릉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장판옥(藏板屋)
이 건물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한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다. <출처: 문화재청>
<제사에 사용하는 물이 있는 우물인 영천>
영천(靈泉)
이 영천은 장릉(莊陵) 서쪽에 있는 우물로써 정조 15년(1791)에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때에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때 제향을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1.5m정도이며 하부는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 있고 상부는 정방형이다. <출처: 문화재청>
<능역에 심어져 있는 느릎나무>
수령 370년의 고목으로 조선후기에 심어졌다.
<단종 사후 시신을 이곳에 묻은 엄흥도에게 내려진 정려가 있는 정려각>
<장릉 재실>
<박충원 낙촌비각>
조선 중종때 영월군수를 지내면서 단종의 묘역을 찾아 재단장했던 박충원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각이다.
영월 장릉, 사적, 강원도 영월군 영흥리
조선왕조 제6대 임금 단종대왕의 능이다. 세조 2년(1456) 6월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등이 상왕복위사건으로 참형을 당하였으며, 다음해 6월 21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그 다음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2개월 남짓 기거하시던 중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세조 3년(1457) 여섯째 삼촌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계책이 발각되자 노산군은 패서인이 되었고 그해 10월 24일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춘추 17세였다. 단종의 유해가 동강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이곳에 밀장하였다. 중종11년(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중종36년(1541)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수축봉제 하였다. 숙종 24년(1698)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으로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신지 241년 만에 왕실의 정례를 되찾게 되었다. 능상의 석물들은 추복릉의 전례에 따라 후릉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의하여 봉분주위에 석호와 석양이 각각 1쌍씩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과 사각옥형의 장명등이 있으며, 능 양쪽에는 망주석과 문인석 2기, 석마 1쌍이 있고 무인석은 없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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