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檜巖寺)이다. 고려시대 인도이 승려 지공선사가 처음 지었으며, 나옹선사와 무학대사가 수도했던 사찰이다. 조선중기 억불정책으로 폐사되었으며, 19세기 순조때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승탑과 탑비가 고의로 훼손되자 조정에서 이를 다시 정비하고 옛절터 옆에 절을 짓고 회암사를 계승하게 했다. 현재의 회암사는 옛 절터 뒷편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 조사당, 삼성각 그리고 강당이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사찰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크게 융성했던 회암사 옛절터에 비하면 초라한 느낌을 주고 있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정신적 지주이자 한양천도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곳으로 당시 전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이 곳에 머물렀으며, 세종때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머물면서 수행하기도 했다. 성종때 세조비 정희왕후가 절을 크게 넓혔으며, 명종때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전국에서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하던 사찰이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억불정책으로 절이 불태워졌다고 하며, 그 뒤로 폐사지가 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전국의 유명사찰들은 대부분 문정왕후 시절에 배출된 고승들을 중심을 임진왜란때 승병을 조직하여 난을 극복하는데 공을 많이 세워서 크게 중창된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회암사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문정왕후와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로 인해서 폐사지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양주 천보산 회암사>
조선 최대 사찰이었던 회암사지(사적)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19세기 순조 때 회암사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고승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승탑과 탑비가 훼손되자 이를 정비하면서 절을 새로짓고 옛 회암사를 계승하게 했다고 한다.
<중심 영역>
전통적인 사찰의 가람배치와 달리 지형에 맞게 강당, 조사당, 대웅전, 삼성각을 배치하고 있다. 대부분 최근에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주불전인 대웅전>
<회암사 조사당>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요사채>
승려들이 기거하는 요사채와 신도들이 설법을 듣는 강당 역할을 겸하는 건물이다.
<사찰 안쪽에 위치한 삼성각>
<뒷편언덕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본 회암사 경내>
<절터 뒷편 언덕에 있는 선각왕사비(보물, 복제품)>
고려말 고승인 나옹선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1997년 화재로 소실되어 그 자리에는 복제품이 놓여 있다.
<회암사 경내 동쪽편 언덕>
회암사를 창건하고 크게 일으킨 고승들의 승탑과 탑비들이 있다. 조선중기 폐사된 이후 구한말 회암사를 다시 세우면서 이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회암사 지공선사탑>
석등과 탑비가 앞쪽에 세워져 있다. 지공선사는 원나라에서 활동한 인도출신 승려로 고려를 방문할 때 회암사 창건을 요청했다고 한다. 공민왕 때 그의 사리 일부를 가져와 이곳에 승탑을 세우고 모셨다.
<나옹선사탑과 석등>
나옹은 고려말을 대표하는 승려로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그의 승탑은 여주 신륵사, 원주 영전사에도 세워졌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과 쌍사자석등(보물)>
<무학대사탑비>
조선후기 순조 때 파괴된 후 다시 세운 비석이다. 장식이 없는 사각형 받침돌 위에 비석을 올려 놓은 평이한 형태이다.
<양주 회암사지(사적)>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조선 최대의 사찰이었던 회암사는 조선중기 이후 사림세력들에 의해 폐사되어 건물터만 남아 있다. 전성기에는 262칸에 이르는 많은 불전과 요사채들이 있었으며, 궁궐 건축양식을 적용한 웅장한 사찰이었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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