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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지에 있는 선각왕사비(보물)이다. 동쪽편에 나옹선사탑과 떨어져 회암사 서쪽편 언덕에 홀로 서 있었다. 고려초기 탑비처럼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려져 있으며 머릿돌은 따로 올려놓지 않았다. 몸돌 윗부분에 두마리 용을 생동감있게 조각했으며 중앙에 비명칭을 적은 공간을 두고 있다. 비문의 글은 고려말 학자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것으로 중원고구려비 이후 처음으로 예서체로 적혀져 있다. 1997년에 성묘객의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비각이 손실되고 비의 몸돌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비의 몸돌은 현재 보존처리를 위해서 경기도 박물관에 있고, 현재는 훼손된 받침돌과 복제품이 놓여 있다.

나옹선사(1320∼1376년)는 고려말을 대표하는 승려로 무학대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나옹(懶翁)은 그의 호이며, 시호는 선각(禪閣)이며 공민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중국 원나라 법원에서 인도의 승려 지공의 지도를 받았으며,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머물면서 불법을 전했다고 한다. 회암사 주지를 지냈으며, 고려말에서 조선초 불교를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승려로 전국의 많은 사찰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의 승탑은 양주 회암사를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원주 영전사에 세워졌으며, 여주 신륵사에는 그를 모신 조사당이 있다.

<양주 회암사지 절터 뒷편 언덕에 있는 선각왕사비(복제품)>

고려말 고승인 나옹선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1997년 화재로 소실되어 그 자리에는 복제품이 놓여 있다.

<화재로 피해를 입은 후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북받침돌>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거북모양으로 외형이 일부 훼손되었다.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앞에서 본 모습, 복제품>

<뒤에서 본 모습>

<화재로 소실되기 전 선각왕사비>

비몸 머리부분에 용을 생동감있게 조각해 놓고 있다.

<머릿돌, 복제품>

‘선각왕사비’란 글자는 원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암사 동쪽 언덕에 있는 나옹선사탑과 석등>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보물,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懶翁)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비의 모습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비의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두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비문의 글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 것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이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