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왕실과 백자, 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 3. 지방의 백자, 4. 문인문화의 유행, 5. 백자의 제작, 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 7. 문양이 된 문자, 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백자는 유교사회를 추구했던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의 취향에 잘 맞아 떨어졌다. 조선전기에는 사대부 취향의 백자와 서민취향의 분청사기가 같이 만들어졌으나 사옹원 산하 관요에서 수준높은 백자를 만들게 되면서 민간에서도 백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조선후기에는 중국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골동품이나 그림, 글씨 등을 수집하고 평가하는 풍조가 유행하면서도 도자기도 수집의 대상이 되었으며, 민간에서는 사대부 취양에 맞는 다양한 백자들이 만들어졌다.
백자청화 송죽인물문호(松竹人物紋壺), 보물, 조선 16세기
문인문화의 유행
조선은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사회를 주도하였기에, 그들이 수용한 기명(器皿)인 백자에는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문인들의 가치관과 미감이 반영되어 있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 난초, 국화 등의 소재들은 군자의 덕과 충절, 상서로움 등을 상징하며 백자문양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문인들이 가까이하던 시, 잠언, 고전산문의 구절 등과 그들이 동경하던 이상적인 삶의 공간인 산수풍경을 백자에 장식하여 문인의 아취를 더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골동품과 그림, 글씨 등을 수집하고 감평하는 풍조가 문인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면서, 도자기를 감상과 수집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특히 문방구류에 대해서만은 사치와 호사를 용인하였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백자 문방용품의 생산과 소비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화는 점차 비양반 출신 중서층인 여항문인(閭巷文人)으로까지 확대되면서 백자에는 더욱 다양한 수요층의 취향이 반영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조선후기 문인들이 사용했던 문방구류.
필통 등 백자로 만든 화려한 문방구류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백자청화 운룡문 팔각 연적, 조선 19세기
백자양각 재명 매죽문선형필세.필가, 조선 19세기
백자청화투각 용문원형연적.필가, 조선 19세기
책거리(冊巨里) 속 그릇들
책거리, 조선 19세기, 종이에 채색
백차청화 기명문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모란기명문 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연화분재문접시, 조선 19세기
백차청화 화접기명문호(花蝶器銘文壺), 조선 19세기
시와 문구
백자청화 ‘천일생수(千一生水)’명 연적,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산수문시명(山水紋詩銘) 원형 연적, 조선 19세기
백자청채음각.청호 시명병(詩銘甁), 조선 19세기
백자청채음각.청호 시명병(詩銘甁), 조선 19세기
국화, 난초, 매화, 대나무
백자청화 매조죽문호(梅鳥竹紋壺), 조선 16세기
백자청화 매조죽문 호, 조선 18세기
백자청화 매란죽문 팔각 병, 조선 18세기
백자청화 매죽시문 사각 연적,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매죽문 호, 조선 18세기
백자청화 매조문 병, 조선 19세기, 백자청화동화 매죽문 병, 조선 19~20세기
백자청화 난초문 호, 조선 18세기
백자청화 국화파초문 주자,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난국접문호, 조선 18세기
산수(山水)
백자철화 매죽문 시명호(詩銘壺), 조선 17세기
이 시는 본래 이정귀(1564~1635년)의 문집인 『월사집(月沙集)』에 실려 있는 것으로, 원본과는 첫 구의 ‘呑’이 ‘天’으로 바뀐 부분이 다르다. 이정귀의 문집에는 해당 시에 “술이 취하여 병에 쓰다”라는 제목이 있어 술자리에서 백자 주기(酒器)의 미덕을 기려 지은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백자 산형 연적. 필가, 조선 19세기
백자 산형 연적, 조선 19세기
백자 산형 필가,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산수문 시명 팔각병, 조선 18세기
백자청화 산수문 연적, 조선 18~19세기
백자청화 산수문 편병, 조선 18세기 후반~19세기
백자청화 산수문 호,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산수문 접시.찬합,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산수문 주자, 조선 19세기
<출처>
-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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