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백자의 제작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백자는 조선초기에는 전국 136개의 자기소에서 진상품으로 백자를 만들어 왕실에 납품했다고 하는데 이때 조선백자 제조기술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관요가 설치된 이후부터 임진왜란때까지는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가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는 원료공급 등의 문제로 백자의 질 떨어져 회백색 백자가 만들어졌으며, 안료가 구하기 쉬운 철화백자가 유행하기도 했다. 17세기말부터 백자의 질이 좋아지면서 흰백자와 한국적인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경기도 광주 분원리 가마터 출토품

조선백자의 색
백자는 고령토로 만들며, 1,250~1,3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 치밀하고 단단하게 완성된 도자기이다. 15세기경에는 우윳빛과 같은 유백색, 16세기에는 겨울눈과 같은 설백색, 17세기에는 회백색, 18~19세기에는 약간 푸른색이 도는 청백색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태토와 유약의 성분은 백자색에 영향을 미치는데 백토의 품질은 산지별로 달라, 조선시대 관요에서는 여러 지역의 백토를 선별 사용했다. 관요 이외 가마에서는 주변 지역에서 채취 가능한 백토를 사용하여 어둡고 회색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경기도 광주시 분원리 가마터 수습품

경기도 광주 번천리 가마터 출토품

경기도 광주군 번천리 9호 가마터 수습품

경기도 광주 선동리 가마터 출토품

백자철화 운용문호, 조선 17세기, 보물

1986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 관요가 있던 경기도 광주의 선동리 지역을 조사하고, 2호로 이름 붙인 가마터에서 3,500여 점의 도자기 파편을 발굴했다. 조사를 통해 원래 왕실에서만 쓰던 용 문양이 그려진 철화백자 항아리 편을 찾을 수 있었고, 일부 도자기에는 1640~1649년간의 제작연도가 새겨져 있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나라가 어려워져 본래 청화백자로 제작하던 용항아리(용준)를 철화백자로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용문양의 철화백자 편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였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645호 “백자철화 운룡문호”는 완전한 항아리 모양이 남아 있는 용문양 철화백자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왔는데, 선동리 가마터 출토품은 이 항아리가 언제 어디에서 제작되었는지를 추정하는데에도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경기도 일대 가마터 수습품.

조선백자의 번조방법
가마 안에서 그릇을 구울 때는 생산성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도구를 활용하여 채임했다. 바닥에는 도침을 놓고 그릇의 굽에는 받침을 고이며, 적재는 그릇의 품질에 따라 달라 고급품은 단독으로 갑발을 넣어,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여러 개를 포개어 번조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갑발, 도침 포개구이,

조선백자의 굽받침
굽받침은 굽 접지면에 붙여 그릇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한다. 조선시대에는 시기와 백자의 품질에 따라 다양한 받침이 사용되었다. 고급품은 굽 접지면에 고운 모래를 받치고, 포개구이할 경우에는 태토빚음받침이나 굵은 모래, 또는 모래와 흙을 섞어 만든 모래빚음받침이 사용되었다. 조선후기에는 굽 접지면에 흙물을 바르기도 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태토빚음받침,

가는 모래받침

모래빚음받침,

흙물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