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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상 (2016년)

1. 삼국시대 불상, 2. 반가사유상, 3. 통일신라 불상, 4. 고려, 조선시대, 5, 석조불상, 철조불상

고구려 소수림왕(372년)때 불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진 이래로 국가와 민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다. 불교에서는 원래 스투파라 불리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탑이 신앙의 중심이었으며, 서방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교에서는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이 점자 신앙의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통일신라 이후 선종이 자리잡으면서 탑은 형식적인 면을 보이게 되는 반면에 불상을 모신 금당이 사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삼국시대에는 불상들이 많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황룡사 장륙전같은 금당에 모셔졌던 거대 불상들은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반면에 개인들이 소장했던 작은 금동불상들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그중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반가사유상(국보)이 삼국시대 금동불상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삼국시대 금동불상들은 크기는 작지만 그 만든 수법의 섬세함이나 뛰어난 조형미 등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아고 있으며, 대부분 국립박물관이나 민간이 운영하는 대형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연가칠년」이 새겨진 부처, 국보, 경남 의령발견, 삼국시대

고구려 539년. 뒷면에 ‘연가 칠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성경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은 불상이다. 실제로 발견된 곳은 경남 의령이지만, 평양에 있던 동사에서 만들어 전국에 유포한 천불상 중의 하나이다.

광배 뒷면에 제작연대와 제작지 등이 기록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539년 고구려 낙랑(樂浪, 평양)에 위치한 동사(東寺)에서 승려 40인이 참여하여 제작.유포하려던 천 점의 불상 가운데 스물 아홉번째 불상이다. 이 불상은 경남 의령에서 발견되어 불상의 출토지와 제작지가 다른 대표적인 사례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고구려불상

고구려가 북한과 만주지역에 존재했던 국가였던 관계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많은 불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중앙박물관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2점의 금동불상을 볼 수 있다.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금동불상은 뒷면에 제작 내력을 적어 놓고 있어 고구려 불상임을 말해주고 있다. 고구려는 불교를 처음으로 도입한 국가로 남북조시대 북위, 동위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고구려 특유의 불상양식이 만들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중국의 전진(前秦)으로부터 경전과 함께 불상이 전해졌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기원후 4세기에는 고구려에 불상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불상은 대부분 6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구려 불상은 대체로 중국 6세기의 북위(北魏)와 동위(東魏)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하였다. 여기에 단순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고구려인들의 미감이 반영되었다. 고구려 불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로, 고구려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연대와 조성 배경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보살,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보물, 삼국시대 6세기.

 머리에 특히한 형태의 관(冠)을 쓰고 있는 보살상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옷 때문에 신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삼국시대 보살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살, 소조보살입상(塑造菩薩立像), 평양 원오리 절터 출토, 삼국시대 고구려 6세기.

평양근처 절터에서 발견된 흙으로 빚어서 만든 소조불상이다.  서역의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천불상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원오리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흙으로 구워 만든 수백 점의 불.보살상 가운데 하나이다. 틀을 사용하여 뒷면이 평평한 불상을 동일한 형태로 대량 생산하였다. 다불(多佛) 신앙에 기초하여 건축물을 꾸미는 용도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면에는 흰색이나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부처,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 강원 횡성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전반.

경기도 양평에서 발견된 불상한 비슷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

균형 있는 신체 비례와 입체감이 조화를 이룬 불상이다. 지그시 감은 눈과 잔잔한 미소, 층층이 흘러내리는 옷주름과 내의를 묶은 매듭이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불상의 등에는 주조하고 난 뒤 안쪽의 흙을 파낸 구멍이 있는데, 흙을 모두 긁어 낸 후에는 구멍을 막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금동불 제작 기술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불상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보살,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강원 영월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전반

왼쪽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오른쪽으로 하체를 기울여 몸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보살상이다. 긴 신체와 목걸이 형태는 중국 수나라 보살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두 팔에 걸쳤던 천의는 남아 있지 않지만 왼팔의 구멍고 대좌에 남은 끝자락의 구멍으로 미루어 따로 주조하여 결합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금동 관음보살입상, 삼국시대 7세기

백제 불상

중국 북조를 통해서 불교를 수용한 고구려, 신라와는 달리 백제는 남조의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서 수도를 한성에서 공주, 부여로 천도를 해서 그런지 불교가 국교와 비슷한 수준으로 크게 융성한 국가였다. 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에는 정림사지를 비롯하여 많은 절터가 있으며, 군수리사지에서 알 수 있듯이 왕궁과 사찰이 같이 있을 정도로 불교국가에 가까웠다.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으며 불교 조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백제가 불교를 수용한 시기는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으로, 중국 남부에 세워진 왕조 중 하나인 동진(東晉)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서 였다. 현재 남아 있는 백제 불상은 대부분 6~7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주로 금동이나 돌로 만든 소형의 불.보살상과 삼존불상이 많다. 이 밖에도 비교적 큰 석불과 마애불도 전한다. 삼국시대 당시의 대외 관계와 불상의 특징을 고려할 때, 백제 불상은 고구려의 영향과 함께 중국 남조 여러 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의 불교 조각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 보주(寶珠,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는 구슬로, 여의주라고도 함)를 든 보살상의 유행과 백제관음이라고 알려진 일본 호류사(法隆寺)의 보살상은 이러한 백제와 일본의 긴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관음보살, 금동관음보살입상, 국보, 서울 삼양동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전반.

우리나라에서 관음신앙이 정립된 시기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관음상으로 보관을 쓰고 있고,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을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서유기에 많이 등장하며 삼장법사 일행을 도와주던 관음보살을 모습이 보이는 듯한 불상이다.

중앙에 부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보관을 쓰고,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7세기 전반부터 보관에 부처의 모습이 나타나고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이 제작되어 이 시기에는 본격적인 관음신앙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부처, 납석제불좌상, 보물, 충남 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 삼국시대 백제 6세기,

부여 궁남지 부근에 위치한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불상이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불상으로 도교적인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1936년 부여 군수리 절터의 목탑 자리에서 보살상, 광배파편, 각종 옥, 토기편과 함께 발굴된 백제 불상이다. 탑을 세우거나 사리기를 넣을 때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에는 백제 특유의 잔잔한 미소가 돋보이며 대좌 위로 흘러내린 옷주름선도 자연스럽다. <출처: 중앙박물관>

부처, 금동불좌상(金銅佛坐像), 서울 뚝섬 발견, 삼국시대 5세기.

현존하는 불상 중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때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불상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불상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불상이다. 두 어깨를 덮은 옷 모양과 앞으로 모은 두 손, 대좌 양옆의 사자 표현 등은 4~5세기 중국에서 유행하던 초기 불상의 형태와 비슷하다.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의 불상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부처,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 충남 서산 보원사터 발견, 삼국시대 6세기 중엽,

백제를 대표하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부근에 있던 화엄십찰 중의 하나인 보원사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이다.

금동광배, 부여 부소산, 7세기전반,

화려하게 잘 만들어진 광배로 연꽃무늬와 식물의 넝쿨처럼 생긴 장식이 들어가 있다.

부처나 보살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는 머리에서 나오는 빛과 모에서 나오는 빛으로 이루어진다. 이 광배는 원형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두광임을 알 수 있다. 두개의 금동판을 중앙과 가장자리에 작은 쇠못을 박아 결합하였다. 뒷면에는 ‘하다의 장법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광배를 만든 사람과 관련된 것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신라 불상

신라는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황룡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을 건립하는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크게 융성하였다. 황룡사 장륙전에는 신라 3대 보물 중 하나인 거대 불상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의 금동불상은 불교를 고구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까닭에 신라 고유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특히 돌을 깍아서 만든 석불과 마애불을 많이 만들었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은 6세기 전반에 불교를 공인했다. 이에 따라 현존하는 대부분의 신라 불상은 6세기 후반과 7세기에 만들어진 비교적 늦은 시기의 것들이다. 여기에는 금동이나 돌로 만든 부처, 보살, 반가사유상이 포함되어 있다. 신라 불상은 중국 북위(北魏)와 동위(東魏) 불상의 영향을 보이는 예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상은 중국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입체감 있는 불상의 영향이 직.간접으로 보이거나, 신라만의 묵직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특징으로 한다. 7세기에는 특히 화강암을 깍아 만든 비교적 큰 석불과 마애불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는 훗날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 석불 조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출처: 중앙박물관>


부처,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 국보, 경기 양평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전반.

 1970년대에 발견된 이 불상은 단순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문화재청 설명에 따르면 수나라 영향을 받은 불상으로 신라에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불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양평 한강변에서 발견된 불상으로 정면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입체감을 확인할 수 있는 금동불이다. 이 불상은 중국의 북제, 북주에서 수대로 이어지는 연속된 옷주름 형태와 원기둥과 같은 인체 표현을 보여준다. 자신감에 찬 이러한 입체감 표현은 주조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삼국시대 금동불의 수준을 한층 끌어 올렸다. <출처: 중앙박물관>


부처,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 삼국시대 7세기 전반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와 신체 비례가 특징인 불상으로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고 왼쪽 어깨와 오른쪽 허리에 옷을 걸친 모습(偏袒右肩)이다. 허리는 약간 꺾은 자세이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둥근 물건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이국적인 옷과 자세의 불상은 삼국시대 신라 지역에서 특히 유행하였다. <출처: 중앙박물관>

부처,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 삼국시대 7세기 전반

<출처>
1. 중앙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