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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대표적인 백제계 석탑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있는 오층석탑(국보)이다. 고려초에 세워진 백제계 오층석탑으로 추정된다. 높이 9 m의 거대한 석탑으로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기단부가 낮아 균형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탑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세겨 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옆면에도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얇고 반듯하며, 귀퉁이를 약간 치켜 올렸다. 지붕돌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올려 놓았다. 탑신부 1층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고, 지붕돌이 평평한 점 등 백제 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1층 지붕돌과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엄장구(국보)가 발견되었다.

석탑이 있는 곳은 마한시대 도읍지로 알려져 있으며, 백제 무왕이 왕궁을 조성했던 장소이다. 왕궁리는 서동요로 잘 알려진 무왕이 궁궐로 조성했으나, 의자왕대에 이르러 사찰로 변모했다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존속했다. 최근 발굴.조사 결과 석탑 기단부 아래에 목탑으로 추정되는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또한 석탑 주변으로 절터 배치를 알 수 있게하는 많은 유물들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 등이 발견되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백제 궁궐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익산 왕궁리 절터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이다. 1층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으며, 지붕돌이 얇고 평평한 백제계 석탑의 특징이 많이 남아 있다.


<앞에서 본 모습>

탑은 1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려놓고 있다. 기단부는 땅에 파묻혀 있었는데 해체.수리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기단부 낮고 좁게 만들어 통일신라 석탑에 비해 안정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기단부>

기단부는 모서리에 8각을 깎은 주춧돌을 기둥으로 삼고, 그 사이에 길고 큰 돌을 맞물리게 올려 쌓은 목탑의 형식의 형식을 재현하고 있다. 주춧돌과 바깥쪽 네모난 돌 사이에는흙을 다져서 메웠다. 탑의 1층 지붕돌과 주춧돌에서 사리엄장구가 발견되었다.

<탑신부>

탑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얇고 반듯하게 만들었으며 귀퉁이는 치켜 올려 경쾌한 느낌을준다. 지붕돌위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 넣었다.

<사리구 (국보)>

왕궁리오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구(국보, 7세기 전반)이다. 함께 출토된 불상과 함께 제작연대가 9기말 ~10세기 초로 알려졌으나, 미륵사지 사리구가 발견되면서 백제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옆에서 본 모습(동쪽)>

<뒤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왼쪽에서 본 모습>

<2009년 발굴.조사 당시의 모습>

석탑 기단부 아래에는 목탑 기단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2017년 모습>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주변 건물터>

<익산 왕궁리유적>

백제 무왕이 왕궁으로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유적이다. 많은 건물터와 주변을 둘러싼 성벽 등이 발견되고 있다.

<2017년 모습>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높이가 9m인 이 석탑은 단층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 3단 옥개 받침 등이 특징적이다. 1965~1966년에 해체.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에서는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같은 사리장엄구(국보 123호), 석탑 밑에는 가로 16.8m, 세로 12.7m인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 기초를 보면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는 ‘왕궁사(王宮寺)’, ‘관궁사(官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대관궁사(大官宮寺)’라는 글자가 적힌 통일신라 시대 명문 기와가 여럿 출토되었다. 지금도 이 탑의 축조시기를 놓고, ‘백제, 통일 신라, 고려 초’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4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