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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보물), 웅장한 표현이 돋보이는 거북받침돌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 탑비(보물)이다. 고려초 활동했던 원종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원진 탑비이다. 절터에는 글자가 기록된 비몸은 없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거북받침돌의 머리는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험상궂으며, 땅을 딛고 일어서려는 다리와 땅을 누르는 발톱 등 사실적이며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이 돋보인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생동감있게 조각해 놓았다. 통일신라 조각 기술이 남아 있던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탑비로 웅장하고 섬세하면서 힘이 넘치는 걸작이다.

원종대사는(869~958년) 통일신라 경문왕때 태어나 고려광종 때까까지 활동했던 승려로 이름은 찬유(璨幽)이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출가하여 중국에서 공부하였으며, 이곳 고달사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고려 광종 때 고달사에서 입적했으며, 원종이라는 시호와 혜진이라는 탑이름을 받았다. 탑비(보물)의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고달사지에 남아 있으며 글씨가 적힌 비몸은 현재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보물)>

고달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이다. 비몸이 없지만 높이가 2 m인 상당히 큰 규모의 탑비이다.

<앞에서 본 모습>

거북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험상궂은 얼굴로 정면을 향하고 있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지 않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날고 있는 용의 모슴을 입체감있게 조각해 놓고 있다. 가운데 비석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뒤에서 본 모습>

<왼쪽에서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

고달사지(高達寺址, 사적)는 여주시 남한강변에서 강원도 내륙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신라 때 창건되어 고려 광종 이후 크게 번창했다가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다. 고달사에는 석조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편인데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현 남아있는 유물로는 국보로 지정된 고달사지 승탑(국보), 원종대사탑(보물), 원종대사탑비(보물), 석불대좌(보물) 등이 절터에 남아 있으며, 쌍사자석등(보물)는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최근에 발굴작업이 완료되어 당시 절의 규모가 확인되고 있는데 상당히 규모가 컸던 사찰로 보인다.

<여주 고달사지(사적)>

<절터 뒷편 언덕에 세워져 있는 원종대사탑(보물)>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보물,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이 귀부와 이수는 원종대사탑비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석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신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현재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는 신라 경문왕 9년(869) 13세에 출가하여 상주 공산 삼랑사에서 융제선사에게 사사하였다.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3세에 입당하여 서주 동성현 적주산에서 자선화상에게 사사하였으며 경명왕 5년(921)에 환국하여 봉림사에 거주하였다. 그후 광주 천왕사에서 고려 광종 9년 (958) 8월에 90세로 입적하니 왕이 애도하여 원종대사 혜진이라 추시하고 ‘진영일정’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 입적 후 17년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귀부는 거대한 단일석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장방형의 비좌는 운문이 예리하나 귀두의 면모는 흔히 볼 수 있는 용형이다. 이수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 (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