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에 있는 운주사지(사적)이다. 운주사는 돌로 만든 석불과 석탑이 각각 1천구씩 있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현재는 절터에 석불 93구와 석탑 21기가 남아 있다. 운주사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많은 석탑과 석불과 함께 창건했다고 전하나 옛기록이나 유물조사 등에서 밝혀진 것은 아니다. 운주사는 나즈막한 동산이 만든 작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 가공하기 쉬운 응회암이 많은 자연조건과 천불천탑과 관련된 불교신앙이 전래되면서 사찰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운주사 창건과 천불천탑 조성에 관한 옛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국가의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고 지역 호족세력의 후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주변 지역에 장흥 보림사, 곡성 태안사, 남원 실상사, 구례 화엄사 같은 큰 사찰이 번창했기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보인다.
운주사지 절터에는 크기가 10 m나 되는 큰 불상부터 작은 불쌍까지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불상들이 흩어져 있다. 불상들은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모양, 돌기둥 모양의 신체, 균형이 맞지 않아 어색한 옷과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탑은 21기가 남아 있는데 사각평면의 전통적인 석탑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둥근 원형탑, 원판형탑과 같은 형태의 석탑도 있다. 석탑들은 통일신라 석탑에 비해 조형미나 조각수법 등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며 층수도 3층, 5층, 7층 등 다양하다. 현재 남아 있는 불상이나 석탑 등은 그 양식적 특징을 살펴보면 고려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화순 운주사지(사적)>
고려시대 지방세력 후원으로 천불천탑이 조성되었던 사찰이다. 나즈막한 동산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에 사찰이 들어서 있다. 현재의 운주사는 조선후기 폐사된 것을 일제강점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운주사 들어가는 길
운주사 입구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지나 주불전까지는 비교적 평지에 가까운 지형을 하고 있다. 옛 사진을 보면 일주문 안쪽으는 마을주민들이 경작하는 농경지가 있었고 농경지 한가운데에 석탑이 서 읻있다. 운주사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평지사찰로 고려시대에 번창했던 사찰들이 가지는 지리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운주사 일주문>
<운주사 들어가는 길>
<작은 불상들>
<들어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연장바위와 석재들>
이 바위는 운주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이 있다. 천 불과 천 탑을 하루 만에 세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하여 석공들과 동자승이 천불천탑을 하루만에 세우고 있었다. 이때 일하기를 싫어한 동자승이 일부러 닭 소리를 내자 석공들이 날이 샌 줄 알고 연장을 이 바위에 두고 갔다고 하여 이 바위를 연장바위라고 한다. 연장바위 앞에는 운주사 안 여기저기에 있던 석재 중 원반형 옥개석 1개와 활주초석 1개 등을 모아 놓았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석재들>
운주사 안 여기저기에 있던 석불의 불신 및 불두와 석탑의 면석, 옥개석, 상륜부 등 분실될 우려가 있는 석재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우뚝 솟은 석탑
일주문을 지나 길을 따라 들어가면 작은 언덕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에 천불천탑의 흔적이 남아 있는 운주사를 볼 수 있게 된다. 폭이 넓지 않은 평지에 구층석탑(보물호)부터 석조불감(보물), 원형다층석탑(보물)까지 운주사를 대표하는 크고 웅장한 석탑들과 불상들이 세워져 있다. 그 형태는 조형미나 섬세한 조각수법 보다는 크고 웅장함을 강조한 고려시대 지방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양쪽 언덕에도 크고 작은 불상들과 석탑들이 세워져 있다.
<운주사지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구층석탑(보물)>
자연암석을 기단으로 사용하여 9층 탑신을 올렸다. 일반적인 고려시대 석탑과 비슷하지만 각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문양이나 기단부 등에서 지방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2번째로 볼 수 있는 칠층석탑>
직육면체 형태로 다듬은 석재 위에 탑신을 올려 놓았다. 칠층으로 되어 있는 탑신은 전통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3번째로 볼 수 있는 쌍교차문 칠층석탑>
몸돌에 쌍교차문(XX)과 마름모꼴(◇)을 새겨놓고 있다. 3개의 거대한 석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3기의 석탑을 지나면 볼 수 있는 불상>
기둥에 불상을 새겨놓은 것처럼 보이며, 평면적이고 투박한 고려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석조불감
불상 뒷편으로 운주사의 중심영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조불감(보물)와 불전 건물들이 보인다. 석조불감은 앞.뒤로 불상을 모신 거대한 불감이다. 지붕은 목조건물처럼 팔작지붕형태를 하고 있다. 감실안에는 2구의 불상이 등을 맞대고 앞뒤로 향하고 있다. 돌로 만든 큰 규모의 석조불감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는 편이며, 제작방법에서도 독특한 면을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 지방색이 강한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앞쪽에는 칠층석탑이, 뒷편에는 원형다층석탑(보물)가 세워져 있다. 주변에 건물들이 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운주사 석조불감(보물)>
거대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석조불감 앞에 세워진 칠층석탑>
다른 석탑과는 달리 지붕을 넓게 만드는 등 백제계 석탑 양식을 적용하고 있다. 전체적인 비례는 안정적이지 못하며 세부 조각수법도 투박한 편이다.
<운주사 원형다층석탑(보물)>
사각형을 하고 있는 일반 석탑과는 달리 둥근 원형을 하고 있다. 기단은 둥근 바닥돌 위에 5장의 돌로 10각형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연꽃잎을 장식한 윗받침돌을 올려 놓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 모두 원형을 하고 있다. 현재는 6층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그 보다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운주사 불전
운주사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는 일제강점기에 중건된 불전들이 세워져 있다.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지장전, 미륵전 등 부처를 모시는 불전들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들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전통적인 사찰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형태의 다층석탑이 세워져 있는 불전 주위에도 크고 작은 불전과 불상들이 세워져 있다. 대웅전 뒷편 언덕에서 운주사 영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대웅전이 있는 영역>
일제강점기에 운주사는 중건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에 큰 사찰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주불전인 대웅전>
<지장전>
<대웅전 아래 마당에 있는 요사채>
<요사채 앞 마당에 세워져 있는 석탑>
<뒷동산 아래 미륵전>
<미륵전 아래 마당에 세워져 있는 발형다층석탑>
탑의 양식은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탑신 4층이 남아 있는데 원래 7층이었다고 한다. 탑신의 모양이 주판알을 얹어놓은 모양이다.
<미륵전 맞은 편 바위 아래에 있는 불상군>
법당에서 약 20 m 떨어진 공사바위 아래에 있는 암벽 남쪽에 있다. 암벽은 높이 15 m, 너비 20 m로 마애 여래 좌상이 새겨진 암반과 연결되며 중앙부와 하단을 깎아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감실 형태를 이루고 있다. 주존불은 상대, 중대, 하대를 모두 갖추었고 대형 석불 입상은 왼팔만 가슴에 댄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원래는 다른 석불군과 마찬가지로, 암벽 아래에 좌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입불을 배치한 석불군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군에는 암벽과 방향이 같은 좌상과 그 오른쪽에 소형 좌상 1구, 중앙에 구멍이 있는 불두의 조각과 서로 어깨를 기댄 입상 2구가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불사바위가 있는 언덕.
운주사 주불전이 있는 공간 뒤편에는 작은 동산이 자리잡고 있다. 높지는 않지만 동산 중턱 불사바위에 올라서면 운주사 경내의 풍경이 한폭의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불사바위는 도선국사가 운주사를 세울때 감독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이다. 아마도 주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형적 특징때문에 그런 전설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산신각>
<산신각 뒷편 원반형 석탑>
기단부를 다른 석탑의 부재를 사용하고 있어 원래의 모습은 아닌듯 하다.
<산신각 뒷편에 위치한 사층석탑>
원반형 석탑과 사층석탑
원반형 석탑은 원래는 원형 석탑이지만 사각형 탑의 면석들이 조립되어 원형을 알 수 업사. 현재의 상태로 보아서는 기단부와 1층탑신에 다른 석탑의 부재를 사용한 듯 하다. 석탑의 기본 구조는 단층 기단 위에 탑신부를 만든 것인데 4매의 판석으로 짜인 중석은 남면의 1매가 없어졌다. 운주사에는 이 탑 이외에도 몇기의 원형탑이 있으나 모두 서로 형태가 달라서 주목된다. 사층석탑은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단층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부를 올린 형식의 탑이다. 이 석탑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부재를 혼합한 흔적이 있어 본래의 석탑과는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불사바위가 있는 언덕을 오르는 길>
<중턱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상>
운주사에 남아 있는 많은 불상 중 유일하게 바위에 새겼다. 불상은 눈썹과 코는 양각으로, 나무지 부분은 대부분 음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각수법이나 표현이 투박하고 거친 편이다.
<불사바위>
도선국사가 운주사에 많은 석탑과 석불을 만들 당시 이곳에 앉아 운주사를 내려다 보며 공사 감독을 했다고 해서 불사바위라 부른다.
<불사바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
운주사자 나즈막한 동산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 터를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불전이 있는 영역뿐 아니라 운주사 영역내 불상과 석탑이 세워진 전체 지역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와불이 있는 서쪽편 언덕
운주사는 불전이 있는 영역과 평지뿐만 아니라 양쪽 언덕에도 지형에 맞추어 크고 작은 불상과 석탑이 세워져 있다. 그 중 서쪽편 언덕에는 운주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불상인 와형석조여래불상이 있다. 불상은 평평한 바위를 깎아서 만든 거대한 불상으로 투박하지만 편안한 느낌을 준다.
<동쪽 언덕에서 본 서쪽 언덕>
정상부에 와불이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쪽에는 채석장이 있다.
<대웅전에서 서쪽 언덕을 오르는 길>
<첫번째로 보이는 거북바위에 세워진 오층석탑>
거대한 바위를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을 올렸다.
거북바위 오층석탑.
거북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반 위에 1매의 방형판석을 지대석으로 삼고 탑신부를 세웠다. 초층 탑신은 4매 판석으로 짜맞추었는데 각 면의 귀퉁이에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뚜렷하며 상면에 탑신괴임이 생략되었다. 상륜부는 복발형의 부재가 안치되고 그 위에 보주가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치석의 기법이나 각 부재의 비례가 안정된 탑으로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로 보인다. 전체 높이는 5.57 m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안쪽에 있는 거북바위 칠층석탑>
탑신 1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2층부터는 몸돌에 X자 무늬가 새겨졌다.
<거북바위 아래에 있는 석불군>
서쪽 산기슭에 있는 와불로 가는 길 중간의 암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 산자락에는 석불군이 다섯이 있는 것에 비해 이곳에는 석불군이 한 곳 뿐이다. 암벽의 크기는 높이 5 m, 너비 15 m, 공간의 넓이는 일부 암반이 떨어져 내린 결과로 추정된다. 암벽에는 높이 4 m 지점에 지름 1 m 정도의 암벽을 다듬은 흔적이 보여 석불군 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대형 불상을 모시려던 것으로 짐작된다. 불상은 중앙에 좌상, 그 주위에 입상들이 배열되어 있다. 불상은 9구이나 대좌는 12개이다. 이로 보아 불상 3구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와형석조여래불>
2기의 불상이 머리를 남쪽으로 하고 누워있다. 불상의 표현이 투박하고 추상적이며, 조각수법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 천불천탑이 세워진 운주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불상으로 운주사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와불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 본 운주사>
<서쪽 언덕 칠성바위에 세워져 있는 칠층석탑>
주위에는 칠성신앙과 관련된 둥근 원형 석재들이 놓여져 있다.
<석탑 주위 놓여진 둥근 석재>
<채석장>
운주사의 많은 석불과 석탑이 이곳의 석재를 사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석재의 결을 따라 구멍을 일렬로 뚫고 그곳에 쐐기를 박아 돌을 쪼갰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동쪽편 언덕.
동쪽편 언덕은 비교적 낮은 편이며, 현재는 2기의 석탑이 남아 있으며, 언덕 아래 바위에는 비교적 많은 석불들을 볼 수 있다. 석불들은 삼존불 형태로 되어 있는 것도 있으며, 독립적으로 역할이 있는 불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표현이 투박하며, 단순화된 고려시대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쪽 언덕에서 본 동쪽언덕>
입구와 석조불감이 있는 북쪽편에 석탑이 남아 있다.
<운주사 입구 구층석탑 동쪽편 바위 아래에 있는 석불군>
운주사 입구 9층 석탑의 동쪽에 있다. 암벽은 높이 약 8 m, 너비 약 20 m이며, 수직 단애면에 대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불상을 모셨다. 현재는 좌불 1구와 입상 5구가 있는데 입상 1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좌대를 갖추고 있다. 석불군은 두 손을 합장한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하여 나머지 불상이 배치되어 있다. 1984년 발굴 조사 시, 맨 오른쪽 불상 대좌 뒤편에서 8~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상과 여래 입상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입구 안쪽에 있는 석불군>
이 석불군은 운주사 동쪽 산등성이에 있는데 석불군 가와는 10여 m 정도 떨어져 있다. 이 석불군이 있는 암벽은 높이 5 m, 너비 25 m로 석불군 가 보다 규모가 작으며 암결은 수평을 이루고 있다. 중앙에 높이 4.75 m의 대형입상인 주존불이 있으며, 주존불 좌우에 입상 7구의 협시불이 배열되어 총 8구의 석불로 되어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운주사 층상응회암
운주사 주변의 돌들은 중생대 백악기에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와 돌덩이가 켜켜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응회암입니다. 이곳의 석불과 석탑은 일반적으로 화성암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비교적 납작하고 형태가 뚜렷치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석불과 석탑이 운주사 주변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응회암층을 그대로 떼어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옛 선조들은 층의 형태로 잘 깨지고 부스러지기 쉬운 이 응회암의 암석학적 특성을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여 석불과 석탑을 제작했던 것입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뒷편 바위에 세워진 석탑>
<동쪽 언덕에서 보이는 운주사>
<석조불감 동쪽편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칠층석탑>
수직문 칠층석탑
운주사 동쪽 산중턱의 높직한 암반 위에 있는 석탑이다. 지대석 등의 별다른 시설없이 암반 위에 방형단을 만들어 기단부를 대신하고 탑신부를 얹었다. 모서리 기둥 사이의 면석에는 가늘게 층에 따라 7~11선의 수직 종선문을 음각하였는데 각 층이 똑같은 형태이다. 각층의 옥개석 하면에는 받침을 생략하고 대신 마름모꼴을 음각하였다. 현재 6층까지 탑신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7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7.2 m이며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석탑 아래에 있는 불상들>
<불상들>
운주사 동쪽 산등성이의 암벽 좌우에 위치하는데, 오른쪽에는 불두 5편, 석불입상 3구가 있다. 이 중 가장 큰 석불 입상은 세 조각으로 파손된 것을 1993년 보수하여 세워놓은 것이다.
화순 운주사지, 사적, 전남 화순군 도암면 천태로
운주사는 석불과 석탑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는 특이한 사찰이다. 현재는 석불 100여구와 석탑 21기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1530년에 편찬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석불, 석탑이 각 1천구씩이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까지는 실재했었을 것이다. 여러 종류의 석불상은 10m의 거불에서부터 수십 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산과 들에 흩어져 있다. 이들 불상은 대개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모양, 돌기둥 모양의 신체,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팔과 손, 거칠고 규칙적인 옷주름, 두툼한 돌다듬 기법 등은 운주사에 있는 불상만의 독특한 모습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석불상 양식과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석탑 21기도 산이나 들 여기저기에 즐비하게 서 있는데 전형적인 석탑 의외에도 구형탑, 원판형탑 같이 특이한 탑도 있으며 3층, 5층, 7층, 9층 등 층수도 다양하다. 일반적인 사각형 탑들은 탑신의 너비가 좁고 높으며 옥개석이 평면적이어서 고려석탑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기단이나 탑신석의 면석에 X ◇ Ⅲ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돋을새김과 선새김 등으로 새겨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무늬를 사용한 것은 불상의 기하학적 주름과 더불어 큰 특징으로 주목된다. 이처럼 특이한 석불, 석탑이 한 절에 수십기씩 봉안되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예로 천불천탑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아울러 불교 미술사 연구에 크게 이바지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운주사는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네 차례나 발굴조사를 하였지만 정확한 창건시대와 창건세력, 조성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지 못하여 여전히 신비로운 사찰로 남아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출처>
- 문화재청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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