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오녀산성이 있는 환인성에서 성읍국가로 출발해서, 압록강 중류의 국내성, 마지막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고구려의 영역은 한반도북부와 만주 일대에 위치하고 있어 고구려 유물이나 유적을 오늘날 접하기 힘든 형편이다. 고구려 유적지가 많지는 않지만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진출했던 시기에 쌓은 아차산 일대 보루 고구려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고, 신라에서 가져간 고구려 물건들이 경주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부 출토되고 있다.
북방민족과 긴장관계에 있었던 고구려는 산성을 비롯하여 성곽을 쌓는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지배계층은 주로 성곽 안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지역에 있는 고구려 궁궐인 안악궁은 역사이래로 가장 규모가 컸던 궁궐건물로 보이며, 이로 미루어볼때 고구려의 생활 수준은 당대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을 볼 수 있으며, 이들 유물들 상당수는 서울의 고구려산성이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이라고 한다.
<오녀산성>
중국 요녕성 환인현에 위치한 오녀산성이다. 높이 200m의 절벽을 이용하고, 산세가 완만한 곳에 성벽을 쌓았다. 고구려 첫번째 수도인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전형적인 고구려 산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글자가 새겨진 평양성 성돌(제5석) 탁본, 개인소장,
평양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인 장안성이다. 양원왕8년(522)에 성의 축조가 시작되어 평원왕 28년(586)에 이곳으로 도성을 옮기게 된다. 이 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 해자로 삼아 평양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외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이 각기 언제 축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내성과 외성에서 발견되어 공사시기, 공사 책임자 등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전해 주고 있다. 이런 평양성 성돌은 현재 6점이 알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 3점은 실물로 남아 있으며, 나머지 3점은 조선시대 고문헌을 통해서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성돌은 내성 남벽에 박혀 있던 것으로 현재 북한의 조선 중앙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5행18자로 소형 가군이 공사구간 4리를 맡았다는 내용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 아차산 고구려 보루>
서울 아차산과 용마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고구려 보루를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처음 산성을 쌓았던 오녀산성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고구려의 성
고구려는 도성과 주요 교통로에 수백 개의 성을 축조하였다. 고구려인은 절벽과 가파른 산등성이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산성을 쌓아 비교적 적은 힘으로 방어력을 최대로 증대시켰다. 산성과 대비되는 평지성은 주로 도성지역에 축조되었다. 군사적, 방어적 성격이 강한 산성에 비해 평지성은 거주 기능이 뛰어나 다양한 정치적,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유리하였다.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루도록 설계되어 평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전쟁이나 위급 시에는 산성으로 옮겨가 대항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귀걸이, 금,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능동, 깃털모양 관꾸미개, 금동,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불꽃 맞새김무늬관, 금동,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평양시 대성구역, 복제
산모양 관꾸미개, 금동,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고구려의 금동관
고구려 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다른 모양의 관을 착용하였다. 고구려의 관인은 절풍이나 소골이라 불리는 고깔 모양의 관에 새깃 2개를 꽂고 금테나 은테를 섞어 둘렀다. 지안 일대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금동관 꾸미개는 두껍게 도금된 상태로 대개 세움 장식 가장 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씩 꼬아 새의 깃털처럼 표현하고 세잎무늬 등을 맞새김해 장식하였다. 개마총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쓰고 있는 관 꾸미개의 형태가 이와 비슷하다. 이런 고구려의 관과 꾸미개는 금.은제 귀걸이와 허리띠 장식, 금동신발 등과 함께 고대 국가 지배 계층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못신, 금동,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고구려의 금동신발은 바닥에 박힌 못의 개수가 많고, 바닥판만 금속으로 만든 점이 특징이다. 지안 삼실총과 통구 12호분의 벽화에 이러한 신발을 신고 있는 고구려 무사가 묘사되어 있다. 이 신발은 바닥판만이 남아 있는데, 사각추 형태의 금동못 40여개가 촘촘히 박혀 있다. 바닥판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짝을 이루어 뚫려 있는 점으로 보아, 신발의 위쪽은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어 연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신발은 실제 사용된 것이라기보다는 의례용이나 껴묻거리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고구려의 무기
고구려 군사력의 주요한 바탕은 우수한 제철 기술로 만든 강력한 무기에 있었다. 무기는 공격형 무기와 방어용 무기로 크게 나누어진다. 공격용 무기는 활, 창, 쇠뇌, 칼, 도끼 등이 있고, 방어용 무기는 갑옷과 투구, 방패가 대표적이다. 고구려의 활은 길이가 짧은 단궁으로 성능이 우수해서 당시 이미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고구려에서 활쏘기는 기본 무술 종목 중의 하나였다. 고구려의 갑옷은 작은 철판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연결한 비늘갑옷이 주로 사용되었다. 투구는 다양한 형태로 벽화에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 출토된 것들은 소수이디. 철제 무기들을 분석한 결과 오늘날의 강철과 같이 단단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늘갑옷,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비늘갑옷은 가야에서 볼 수 있었던 철기시대 판금갑옷에 비해서 활동이 자유로워서 기마병들에게 적당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갑옷의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고구려의 철갑기병
고구려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동시에 중국의 혼란기를 이용한 대외 정복활동으로 넓은 영토를 개척하고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군대는 육군과 수군으로 구성되며, 육군은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졌다. 기병은 중장기병과 경기병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을 적절히 배치해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기병 중 사람과 말 모두가 철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고구려 군사력의 가장 핵심적 존재였다. 동천왕대에 이미 ‘철기 5천’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기마전술에 의한 전투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개마무사로도 불리는 이들은 안악3호분과 덕홍리 무덤의 벽화 등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도끼,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1,2보루, 마름쇠,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2보루.
마름쇠는 기마병에 대응하기 위해서 성곽주변에 뿌려 놓는 것으로 북방민족의 기병에 적절히 대응해온 고구려의 전술적 능력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투겁창과 물미,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보병들이 사용했던 무기로 보인다
화살촉, 쇠뇌촉, 철, 삼국시대(고굴) 5~7세기, 서울 구의동 보루, 경기도 연천 무등리 2보루.
쇠뇌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에서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사용한 강력한 무기이다.
재갈과 발걸이,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4보루, 복제.
등자라고 불리는 발걸이는 전쟁과 무기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무기로 훈족으로 대표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 기병을 상징하는 말갖춤이라고 볼 수 있으며, 고구려 기병은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등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등자를 사용하면서 말을 타고 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전쟁의 방식을 크게 바꾸었다.
방울,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말갖춤,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수락산 보루
고구려의 말갖춤
말갖춤에는 말을 부리기 위한 재갈과 고삐, 말 위에서 몸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안장과 발걸이, 말을 장식하기 위한 말방울,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이 있다. 말을 길들여 타는 데에 가장 먼저 고안된 도구는 고삐일 것이나,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재갈은 말의 입안에 단단한 물질을 넣고 이를 당겨 말의 혀를 자극하는 통제수단이다. 이 가운데 금속제 재갈과 견고한 재질의 안장, 발걸이를 사용하면서 기병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말갖춤은 무덤과 산성, 보루 등에서 출토된 유물과 무덤 벽화를 통해 그 모습이 전해지며, 고대 동아시아의 말갖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호우壺杅’ 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 삼국시대(고구려) 415년, 경북 경주 호우총,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고구려 청동 그릇이다. 바닥에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글자체의 글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의 장례를 치른 다음해(415)이다. 따라서, 대왕을 장사지낸 1년 뒤에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이 그릇을 신라 사신이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자庚子’ 글자가 새겨진 접시,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연꽃무늬 수막새,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1보루
보습,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구의동 보루, 2.도끼,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충북 청원 남성골
3. 삽날,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4. 호미,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서울 아차산성과 그 부근에서 출토된 철제 농기구를 비롯한 유물들은 당시 고구려군의 주둔 방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아차산성에 주둔한 고구려군의 주위에 둔전을 개발하여 자급자족 형태로 군사들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운영했던 군사주둔 방식이다.
고구려의 남진
고구려는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임진강 유역과 양주 분지 일원, 한강 하류역, 금강 유역에서는 고구려의 남진을 보여 주는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축조한 소규모 성곽으로 군사적 성격이 강하다. 특히, 아차산과 용마산 일대 보루들에서는 온돌 시설이 있는 건물지와 저수시설, 간이 대장간, 방앗간 시설 등이 다양한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다. 이들을 통해 고구려의 군사조직과 생활상, 한강유역 지배 방식 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979년에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 역시 5세기 고구려의 남진을 이해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고구려의 불교
고구려의 불교는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 전진왕이 사신과 순도스님을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면서 전해졌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왕실과 국가의 후원을 받으며 사찰이 건립되고 불상이 조성되었다. 절터로는 청암리사지, 상오리사지, 원오리사지, 정릉사지 등이 조사되었다. 청암리 사지는 문자왕7년(498) 조성된 금강사지로 비정되며, 상오리사지, 정릉사지와 함께 일탑삼금당 가람배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정릉사지는 ‘사寺’, ‘정릉定陵’ 등의 명문이 있어 전 동명왕릉과 관련된 능사로 보고 있다. 불상은 고운 점토로 빚거나 금동을 주조해 만든 것들이 전해지는데, ‘연가7년(539)이 새겨진 불상’은 명문이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고구려 불상은 중국 남북조시대 불상의 영향을 받아 얼굴이 길고 옷자락이 몸 양 옆으로 힘차게 퍼진 특징을 보여준다. 그 밖에, 고구려인들의 불교적 세계관은 무덤 벽화 안에서도 자주 표현되고 있다.
‘영강7년’이 새겨진 광배, 복제,
불상의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불상의 뒤에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다. 연꽃과 넝쿨무늬로 장식하였고, 전면에 꽃무늬를 새겼다. 광배 뒷면에 ‘영강 7년’ 시작되는 7행 58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영강’은 고구려 양원양 때의 연호로 551년에 해당한다. 명문 내용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미륵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미륵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이 광배의 본존이 미륵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연가7년’이 새겨진 부처,
1963년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고구려 불상이다. 광배 뒷면에는 연가7년(539)에 현재의 평양 지역인 낙강 동사라는 절에서 천불신앙을 유포하고자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4줄47자에 걸쳐 새겨져 있다. ‘연가’는 고구려 독자의 연호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흙으로 만든 부처와 보살,
1937년 평안남도 원오리 옛 절터에서 흙으로 만든 많은 소조불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들은 가부좌로 앉아 배 부분에 손을 깍지 낀 선정인 자세의 부처와 시무외 여원인의 손모양을 한 보살입상들이다. 6세기 중엽 이후에 만들어진 출토지가 분명한 고구려 불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소조불상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은 서역에서 많이 만들어졌던 불상형태이다.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고구려에서는 서역의 영향을 받은 불상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머리만 남아 있는 소조불상
고구려인의 일상
고구려의 성 내부에는 여러 건물과 정비된 도로 등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 귀족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지며, 마구간, 차고, 부엌, 다락창고, 방앗간, 고깃간 등의 부속시설과 잘 꾸며진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건물은 기와로 지붕을 덮었고 난방 시설로는 부분 온돌을 설치하였으며, 일상생활에서 평상이나 좌상을 사용하였는데 방안에서 신발을 벗는 습관이 있었다.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었고, 가루로 내어 시루어 쪄 먹었으며 아래층에 기둥만 있고 본체가 위에 있는 고상식 구조의 다락창고에 곡식을 보관하였다. 부엌에서 조리한 음식을 소반에 받쳐 들고 안채나 사랑채로 가서 상차림하였는데, 주인과 손님의 상을 따로 차렸다.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를 탔다. 일반적으로 마차는 남자용, 우차는 부인용이나, 귀족 남자들도 외출할 때 우차를 많이 이용하였다. 바퀴살이 있는 개량된 수레바퀴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질 좋은 철기를 생산하였다.
세발 뚜껑단지,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항아리,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구의동 보루
집게,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수레 굴대 부속,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집모양 토기,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평양구역
부뚜막,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평북 운산 용호동 무덤.
실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무덤주인의 사후 세계를 위해서 만들어 부장품으로 묻은 것이다.
시루와 솥,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구의동 보루.
서울 아차산성 부근에 주둔했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생활용구로 볼 수 있다.
네 귀 달린 항아리, 청동, 삼국시대(고구려) 5세기, 경북 경주 금관총.
당시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나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313년 평양 지역의 낙랑군을 몰아내고, 북으로는 중국 랴오허 강에서 지린성 쑹화 강에 이르고,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넓혀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고구려는 고유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서역, 북방의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다. 고구려 문화의 국제성과 선진성은 천문, 지리, 문화, 음악, 무용, 공에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만주의 한런(桓仁), 지안(集安) 일대와 평양 등 고구려 옛 도읍지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성, 무덤, 궁궐터, 절터 그리고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꾸미개 등의 유물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와 바다 건너 왜(일본)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