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있는 제석사지(사적) 절터이다. 제석사는 백제 왕실의 번창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왕실 사찰로 왕궁리유적에서 동쪽으로 1.5 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무왕이 이곳 왕궁리로 궁성에 세우면서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모시기 위해 세웠다. 제석사에 대한 기록은 백제 무왕 때 천도한 기록과 낙뢰로 인한 화재 기록이 있다. ‘제석사’라고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에 옛 절터임이 확인되었다.
익산은 백제 왕실이 멸망하기까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던 지역으로 왕궁리유적.쌍릉.미륵사지.제석사지 등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은 무왕의 천도설과 관련된 곳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쌍릉은 7세기에 만들어진 돌방무덤으로 부장된 나무널은 무령왕릉 나무널과 같은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어졌다. 미륵사는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세워진 당대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익산 제석사지(사적)>
백제 무왕이 왕궁리 궁성을 수호하는 의미로 제석천을 모시기 위해 세웠던 사찰이다.
제석사지 발굴.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제석사지는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위치한 백제의 전통적인 1탑 1금당식 사찰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 기단석과 초석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지만 기단 구조와 함께 목탑지 아래 판축 구조가 확인되었다. 또한 동쪽편에는 회랑지와 비슷한 성격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금당터 서쪽에서는 목탑터와 비슷한 규모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수막새, 암막새, ‘제삭사’ 글자가 새겨진 기와 등 건축부재와 소조상 조각 등이 있다. 또한 백제 말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인동덩굴무늬 암막새는 백제 암막새의 최초 형식을 보여준다. 절터 북쪽으로 500여 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잔해를 폐기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뒷편에서 본 제석사지 절터>
1탑1금식의 가람배치로 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중심축 선상에 있다. 그리고 중문, 동서회랑, 승방이 확인되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동서회랑의 거리가 약 100 m이고, 중문에서 강당까지가 140 m로 미륵사지 다음으로 크다.
< ‘제석사’ 절터였음을 밝혀준 기와조각>
<중문과 회랑 건물터>
경복궁 같은 궁궐이나 불국사에서 볼 수 있는 회랑구조가 적용되어 있다. 중문에서 강당까지 약 140 m 정도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목탑터>
높이 3 m 정도로 흙으로 단단하게 쌓아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목탑을 세웠다.
<옆쪽에서 본 목탑터>
계단이 설치되어 목탑터에 올라가 볼 수 있다.
<목탑터>
사리를 모셨던 심초석과 초석이 남아 있다.
<심초석>
가운데 사리공이 뚫려 있다.
<건물 초석>
<목탑터 발굴 당시 모습>
흙을 판축형식으로 정교하게 쌓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목탑터는 중문터에서 약 18.5 m 떨어져 있고, 중문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37 m이다. 목탑터의 중심에는 길이 182 cm, 너비 175 cm, 두께 76 cm인 심초석이 2조각으로 깨진 채로 놓여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 길이 60 cm, 너비 26 cm, 깊이 16 cm인 사리공이 뚫려 있다. 목탑은 하층 기단의 길이가 21.2 m인 이중 기단 구조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단 안쪽에는 한 변의 길이가 11.2 m 인 불단으로 추정되는 단이 설치되어 있다. 목탑의 기초는 약 3 m 높이로 정교하게 구분하여 판축해 만들어져 있다. 사방 각 면의 중앙부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지하의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작업 통로가 네모서리에서 확인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금당터>
길이 약 30 m 의 비교적 건물터이다. 흙을 판축형식으로 정교하게 쌓아 기단을 조성했다.
<금당터 발굴 현장과 출토 유물>
인동당초문 암막새가 전형적인 백제 시대 연꽃무늬 수막새와 함께 온전한 형태로 출토되었다.
<인동덩굴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금당터는 목탑터에서 약 17 m 떨어져 있고, 목탑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41 m이다. 기단은 길이 약 30 m, 너비 약 21 m의 상층 기단과 길이 약 32 m, 너비 약 23 m의 하층 기단을 이루어진 이중기단 구조를 하고 있다. 기초는 적갈색의 사질 점토와 황색 마사토로 정교하게 판축하여 만들어져 있다. 길이가 약 5 m, 너비가 약 3 m인 계단 시설의 흔적이 앞.뒷면의 중앙 2군데에 있다. 제석사지 금당터는 백제 시대 금당 중에서 규모가 큰 편이고, 가로와 세로의 평면 비율은 1 : 0.74로 부여 금강사지의 중창금당과 비슷하다. 금당터에서는 인동당초문 암막새가 전형적인 백제 시대 인당자엽의 수막새와 함께 온전한 형태로 여러 점 출토되어 관심을 받고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강당터>
길이 약 52 m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익산 미륵사지 강당터와 비슷한 형태이다.
<강당터 발굴당시 모습과 출토 유물>
<익산 제석사지 도장찍은 기와>
강당터는 금당터에서 약 26 m 떨어져 있고, 금당터 중심과의 거리는 약 47 m이다. 기단은 길이 약 52 m, 너비 약 18 m의 단층기단으로 추정된다. 또한 계단은 앞.뒷면과 왼쪽 중앙 3군데에 확인되며, 오른쪽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뒷면 중앙 계단의 규모는 길이 약 150 cm, 너비 88 cm이다. 강당터는 규모나 구조에서 익산 미륵사지의 강당터와 비슷하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절터 북쪽으로 500여 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잔해를 폐기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7세기 전반의 연꽃무늬 수막새, 불에 탄 소조불상 및 악귀상, 벽체편 등이 다수 출토되어 이곳이 제석사지의 화재와 관련된 건물 폐기장임이 확인되었다.
<몸체, 익산 제석사 폐기장 출토>
<악귀의 몸, 익산 제석사 폐기장 출토>
<「명지이?」를 새긴 기와, 익산 제석사 폐기장 출토>
<연꽃무늬 수막새, 익산 제석사 폐기장 출토>
<연꽃무늬 수막새, 익산 제석사 폐기장 출토>
제석사 폐기 유적
제석사 폐기유적은 제석사지에서 북쪽으로 500여 m 거리에 위치한다. 발굴조사 전에는 백제 기와 가마터로 추정되었으나 2003년과 2004년 원광대학교 박물관의 시굴조사 과정에서 「관세음웅험기」에 기록된 정관 13년(639) 화재 이후 잔해를 폐기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제석사 폐기 유적에서는 제석사지와는 다른 연화문 수막새가 출토되었으며, 암막새나 인장와는 수습되지 않아 유물에 있어서 제석사지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완형의 벽돌과 표면에 백회까지 칠한 벽체편, 벽화편 등이 수습되었고 포벽의 빈 공간을 메웠던 고막이 형태의 포 벽체와 소로, 첨차 등의 사이를 메운 벽체 편 등이 출토되어 지금까지 백제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백제 건물의 포벽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소조불상, 보살상, 천부상, 신장상, 악귀상, 동물상 등이 출토됨에 따라 연구 성과에 따라서는 백제 유적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찰 내부를 장엄했던 불상의 모습과 함께 소조불상의 제작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익산 왕궁리 유물전시관, 2017년)익산 제석사지, 사적
이 터는 백제 시대의 사찰인 제석사가 있던 곳이다. 제석사지는 무왕대의 익산 천도설을 밝혀 줄 수 있는 왕궁리 유적과 관련이 있는 절터이다. 관세음응험기에 따르면, 제석사는 백제 무왕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무왕 40년(639)에 벼락으로 불타 버렸으나, 탑 아래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금강반야경을 넣었던 칠함이 보존되어 다시 사찰을 짓고 안치하였다고 한다. 발굴조사 결과 목탑터. 금당터. 강당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으며, 「제석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됐다. 비록 터만 남았지만, 이 곳은 몇개 남지 않은 백제 절터의 하나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출처>
- 문화재청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