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인 온조왕이 건국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온조는 형인 비류와 함께 고구려에서 내려와 비류는 오늘날 인천지역에 해당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정착하였다. 이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부여계통의 세력이 한강유역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초기 백제의 수도는 하남 위례성이라고 기록에 남아 있는데, 그 위치가 풍납토성, 몽촌토성, 또는 하남의 또다른 지역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한강변에 위치한 풍납토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백제 유물이 전시된 공간>
백제가 한성에 수도를 정한 기간은 약 500년(기원전18 ~기원후 475)에 이르는데, 이는 백제가 700여년의 역사 중 대부분을 한성에서 보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성백제기 유적으로는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 지역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비롯하여,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 크고 작은 유적지가 있다. 또한 이 시기 지방세력의 유적으로는 공주 수촌리를 비롯하여 서산, 천안 등 금강유역과 서해안지역, 삼한시대부터 지방세력으로 존재했던 영산강 유역 등이 있다. 한성백제기에 지방을 통치했던 흔적으로는 중앙정부에서 지방세력의 수장들에게 보내준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칼, 중국도자기 등 다양한 형태의 위세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 풍납토성>
백제의 건국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인 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었다. 온조는 형인 비류와 함께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정착하였다(기원전 18). 나라 이름은 십제라 하였으며 그 후 백제로 고쳐 불렀다. 온조왕 13년(기원6) 한산 아래로 위례성의 주민을 옮겼는데 한성의 위치는 풍납토성.몽촌토성 등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풍납토성에서는 대형 집자리.제사관련 건물지.도로 등이 확인되어 초기 백제 도성의 모습을 확인시켜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망치, 철, 서울 풍납토성. 완주 상운리,
덩이쇠, 철, 금산 수당리
줄, 철, 완주 상운리, 집게, 철, 서울 풍납토성, 완주 상운리
쇠삽날, 삼국시대(백제) 4세기, 서울 풍납토성, 쇠삽날, 철, 삼국시대(백제) 4세기, 고양 멱절산, 살포, 철, 삼국시대(백제) 5세기, 충남 금산 수당리 무덤
열쇠, 철, 삼국시대(백제) 4~5세기, 서울 풍납토성
재갈, 철, 삼국시대(백제) 4~5세기, 충북 청주 신봉동 무덤, 말띠드리개, 삼국시대(백제) 4~5세기, 충남 천안 용원리 무덤, 발걸이, 철, 삼국시대(백제) 4~5세기, 충남 천안 용원리 무덤
백제의 성장과 영역 확장
백제는 한강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의 군현을 막아내고 마한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성장하였다. 고이왕은 관제를 마련하고 관리의 복색을 글과 법령을 제정하는 등 국가 조직을 정비하여 고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4세기 근초고왕 때엔는 북으로 활해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으로는 마한의 전 영토를 확보하는등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한성기는 마한의 소국인 백제국이 점차 마한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면서 백제라는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역동적인 시기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리자루칼, 삼국시대(백제) 4~5세기,전북 완주 상운리, 충남 서천 봉선리, 충남 서천 봉선리, 충남 천안 화성리.
둥근 손잡이 고리 안에 용이나 봉황 등을 조각하거나 고리에 직접 문양을 새겨 화려하게 장식된 고라자루칼은 주인공의 높은 사회적 신분을 상징한다.
잔, 삼국시대(백제) 4~5세기, 서울 몽촌토성, 굽다리접시, 삼국시대(백제) 4~5세기, 서울 몽촌토성.풍납토성
단지, 삼국시대(백제) 4~5세기, 서울 풍납토성
‘대부’가 새겨진 항아리, 삼국시대(백제) 4~5세기, 서울 풍납토성,
풍납토성에서는 ‘대부’가 새겨진 항아리와 ‘정’이 새겨진 항아리가 출토되어는데, 고구려 아차산 보루에서 출토된 ‘대부정’이 새겨진 토기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는 중국에서 관리를 일컫는 말이며 ‘정’은 벽사의 의미가 있는데 기우제와 같은 제의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세발접시, 삼국시대(백제) 4~5세기, 서울 몽촌토성.풍납토성
검은간토기, 삼국시대(백제) 4~5세기, 그릇의 표면이 검은색이 나도록 만들어진 토기로 뚜껑과 어깨부분에 특징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백제의 한성기 영역에서 지배계급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단지, 삼국시대(백제) 3~4세기, 충북 청주 신봉동 무덤, 그릇받침, 삼국시대(백제) 5세기, 경기도 포천 자작리 집터
생산기술의 혁신
백제는 종래의 전통적 기반 위에 우수한 기술을 도입하여 토기.철기 등 생산 활동에 있어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다. 토기는 세발접시.굽다리접시.검은간토기 등이 제작되어 이전까지와는 다른 모양과 기술이 선보인다. 기와는 지금까지의 토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동전무늬 수막새 등 막새기와는 주로 한성기의 도읍에서 출토된다. 철 생산은 백제의 지방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나 중앙에서 장악하고 통제하였다. 철기 제작에 있어서는 상감기법이 성행하였는데, 칠지도 및 은상감 고리자루칼 등을 통해서 확인된다. 또한 철제 농기구의 발달은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출처:중앙박물관>
관모, 금동, 삼국시대(백제) 5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 무덤, 복원품
금동관모
금동관모는 신분을 상징하는 꾸미개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사람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된다. 형태는 둥근 고깔모양으로 모자의 뒷부분에 대롱모양의 장식을 달거나, 앞 또는 뒷부분에 화려한 장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금동관모는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천안 용원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고흥 길두리 등 백제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야와 일본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 금동관모는 금동신발.중국 도자기 등의 고급물품과 함께 부장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을은 백제가 마한의 세력을 통합해가는 시기의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구슬, 유리, 삼국시대(백제), 5세기
귀걸이, 금, 삼국시대(백제), 4~5세기, 1.법천리, 3.부장리, 4.부장리, 5.주성리, 6.주성리, 7.방송리
금동신발, 삼국시대(백제) 5세기, 전북 고창 봉덕리 1호 무덤,
백제 중앙정부는 흡수.통합한 지역의 수장들에게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칼, 중국 도자기 등을 내려주며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충성을 요구하였다. 고창 봉덕리1호 무덤 4호 돌방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용무늬와 봉황무늬 등이 투조된 것으로서 이 무덤이 고창지역 최고 수장층의 무덤임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제는 이러한 대외교류를 통해서 부단히 발전해 왔으며, 특히 중국 남조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한성기에 근초고왕이 보내준 칠지도를 비롯하여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한반도와 일본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과의 관계는 북조보다는 남조와 교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불교의 전래 등에서 그런 교류관계를 많이 확인해 볼 수 있다.
양직공도, 중국 양나라 원제(재위 552~554년)
소역이 왕자시절인 539년경에 그린 사신도이며, 이 원본을 북송에서 1077년에 모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림에는 양나라에 온 외국 사신의 모습과 함께 그 나라 역사와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속의 백제 사신은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와 폭이 넓은 바지를 입고, 관모를 쓰고 검은 신을 신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백제의 유래와 도성, 제도, 풍속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자 등잔, 삼국시대(백제) 6세기, 충남 공주 무녕왕릉, 흑갈유병, 삼국시대(백제) 6세기, 충남 공주 무녕왕릉.
이런 도자기류는 당시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중국 남조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청자 항아리, 삼국시대(백제) 5세기, 전북 고창 봉덕리 1호 무덤, 병, 삼국시대(백제) 5세기, 충남 공주 수촌리 무덤
양모양 청자, 삼국시대(백제) 3~4세기, 강원 원주 법천리 무덤
도장, 청동, 삼국시대(백제) 6세기, 전북 고창 오호리 무덤,
글자가 새겨진 도장이다. 전서체를 사용하여 세로로 2자씩 거꾸로 새겨 넣었다. 중국 남조 양나라 관인과 유사하다.
액체를 데우는 그릇, 청동, 삼국시대(백제) 3~4세기, 서울 풍납토성.
중국의 제사의식에 사용되는 제기인 발이 3개달린 솥(鼎)을 연상시키는 제기로 이런 형태의 유물들은 고조선이래로 꾸준히 한.중.일 해상교통로에 위치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고대의 항로.
제사유물,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충남 부여 논치, 덩이쇠, 철, 본뜬 철기,
부여 논치는 사비를 도읍으로 하던 시절 백제 시조에 제사를 지내던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제사유물, 삼국시대(백제) 5~6세기, 전북 부안 죽막동,본뜬 석기, 돌
본뜬 석기, 돌, 삼국시대(백제) 5~6세기, 전북 부안 죽막동,
제사를 지낼 때 끈으로 묶어 나무에 매달았던 거울.칼.곱은옥 등을 본 떠 만든 것이다. 일본 고훈 시대의 제사유적에서 발견된다.
잔, 목단지.그릇받침.
제사의식에 사용된 제기로 보이는 유물이다. 부안 죽막동은 변산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명승지인 채석강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파도가 심한 지역으로 중국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상선들 잠시 정박하면서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던 제사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산반도 해안 끝자락 절벽위가 부안 죽막동 유적지.
서해안 해상교통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곳으로 고대이래로 오랜 기간동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서해안을 오가던 한.중.일 사람들이 제사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대외교류와 제사
백제는 대외교류를 통하여 동아시아속에서 국제적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독창적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일본에 전해주었다. 중국 도자기와 양직공도는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교류관계를 보여준다. 백제 왕실에서 왜왕에게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 칠지도는 왜와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백제의 대외 교류에 있어서는 바닷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안 죽막동 유적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중국-서해안-남해안-일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다. 제사는 절벽 위의 좁은 평지에서 행해졌는데, 백제 및 가야의 각종 토기와 금속품.중국도자기.일본 고훈시대의 돌로 만든 모형품 등이 출토되어 이곳이 국제적 제사 장소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백제는 시조에 대한 제사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형식의 제사를 행하였는데, 대표적인 제사유적으로는 부여 논치 등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백제
백제는 부여계의 이주민들이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세운 나라로 점차 마한지역을 통합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그 후 도읍을 웅진(지금의 공주),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기면서 독창적인 백제문화를 꽃피웠다. 한성기(기원전18~기원후475)는 백제가 고대 국가의 체계를 확립하고 마한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백제의 기틀을 다진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교류를 통하여 국제적인 지위도 확고히 하였다. 금강유역에 도읍한 웅진기(475~538년)는 고구려의 남진으로 약해진 국력을 회복하고 중흥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였다. 무령왕릉은 당시 백제와 동아시아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지니고 있어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사비기(538~660년)는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한 시기로 특히 불교 문화가 화려하게 꽃핀 백제문화의 절정기였다. 부여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세워졌으며, 백제금동대향로를 비롯하여 예술적인 고예품들이 이 시기에주로 제작되었다. 국제적이면서도 세련된 백제 문화는 신라와 가야 그리고 일본에도 전해졌는데, 특히 일본의 아스카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