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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외조, 흥화문과 금천교

경희궁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여러 궁궐들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궁궐로 1623년(광해군15)에 완공하였다. 이곳은 원래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이 살았던 곳으로 왕의 기운이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이 이를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원래는 경덕궁이라 불렀는데 영조가 1760년 경희궁으로 고쳐 불렀다. 1829년(순조29) 화재로 인하여 대부분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복원하지 않고 창덕궁을 정궁으로 삼았던 조선후기에 이궁(離宮)으로 동궐의 부족한 공간을 해소하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경희궁에서는 숙종과 경종이 태어났으며, 숙종.영조.순조 등이 승하하였고, 경종.정조.헌종이 즉위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일본인 교육기관이었던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으며, 1980년대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희궁 흥화문>

서궐도 경희궁(경희궁도, 1975년)

혜촌 김학수(1919~2009년) 화백이 눈 덮힌 경희궁(옛 경덕궁)의 옛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조선후기 정궁이었던 동궐을 보완하는 이궁(離宮) 역할을 했으며,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왕실가족이 살았던 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은 일제에 의해 이토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한때는 신라호텔이 있는 장충동으로 옮겨져서 호텔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80년대 경희궁이 복원될 때 따라 현재의 장소에 옮겨졌다고 한다.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은 창덕궁을 비롯한 기존 궁궐의 정문이 2층 문루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반해서 단층으로 지어졌다. 규모는 앞면 5칸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광해군이 경덕궁을 세울때 공사중지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간략하게 단층으로 세웠다고 한다.

<앞에서 본 모습>

서울 역사박물관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 사당 정문으로 사용하려 장충동으로 옮긴 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다가 최근에 이 곳으로 옮겨다. 원래의 위치는 지금 역사박물관 마당이었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5칸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처마와 공포>

<흥화문 문짝>

<추녀마루 잡상>

궁궐 정문으로 7개의 잡상을 올려놓고 있다.

<신라호텔 정문>

일제가 이등박문 사당인 박문사 정문으로 사용하였으며,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에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경희궁으로 옮겨진 후 비슷한 건물을 호텔입구에 세워놓고 있다.

경희궁 흥화문,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이 문은 1620년(광해군 12)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경덕궁의 정문이다. 일본인이 다닐 학교를 지으면서 1915년 궁궐 남쪽으로 옮겨 지었다.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로 옮겨 정문으로 쓰다가 해방 뒤 박문사 터에 들어선 영빈관의 정문으로 쓰였다. 이후 신라호텔이 들어선 뒤에는 호텔 정문으로까지 쓰이기도 했다. 흥화문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다포로 공포를 짜고 우진각 지붕을 덮었다. 광해군은 왕기가 서렸다는 인왕산 자락에 경덕궁을 세웠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후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리한 공사였다. 광해군은 공사 중지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문을 단층으로 세웠다. 최근 서울시에서 경희궁복원하업을 시작하면서 1988년 이곳으로 옮겼지만 원래의 자리는 아니다. 수천칸에 달했던 경희궁의 전각 구성은 1820년대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서궐도안을 통해 그 윤곽을 살필 수 있다. 창건 당시 전각으로는 정전인 숭정전이 남아 있다. <출처:서울시청>

경희궁 앞 대로인 새문안로.

서대문이었던 돈의문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연결되는 서울도심의 동.서축이 되는 대로이다. 경희궁에서 정동길을 따라 숭례문까지는 일제강점기에 서양인들이 자리를 잡았던 지역이다.

<경희궁 금천교>

<옆에서 본 모습>

 경희궁 정문을 지나면 궁궐과 바깥세상을 분리해주는 금천에 놓여진 돌다리인 금천교이다. 이 돌다리는 일제가 이곳에 서울고등학교를 지으면서 파묻었던 것을 이곳에 서울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석재의 일부가 발견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서궐도에서는 금천교 바깥쪽에 흥화문이 위치하고 있다.

경희궁과 금천교
경희궁은 조선후기 왕들이 임시로 거처했던 이궁으로, 1617년(광해군9)에 창건하여 1620년(광해12)에 완공하였다. 처음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고쳐 불렀으며,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궐이라고도 하였다. 경희궁에는 숙종.영조 임금이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특히 영조는 경희궁에 대한 글과 글씨를 많이 남겼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금천교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안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 있던 다리로 1618년(광해군 10)에 경희궁을 조성하면서 설치하였다. 금천교는 홍예교로 두 개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다. 난간의 돌짐승이나 홍예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 기운이 궁궐 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금천교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경성중학교가 설립되면서 땅에 묻혔으나 서울역사박물관 건립과 함께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2001년에 복원되었다. <출처:서울시청>

<흥화문엣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길>

<안쪽에서 본 흥화문>

<경희궁 서쪽에 있는 서울시 교육청>

<서울고등학교 표지석>

<경희궁 부지내에 자리한 서울 시립미술관 분관>

 일제가 경희궁을 허물고 이 곳에 일본인을 위한 고등학교였던 서울고등학교를 세웠다. 1970년대 강남으로 이전한 서울고등학교가 있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표지석을 볼 수 있다.

<경희궁>

인왕산 봉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경희궁. 현재는 정전인 숭전전과 편전인 자정전만 복원되어 있다. 경희궁을 원래 100여동이 넘는 전각들이 들어서 있던 조선시대 3대궁궐 중 하나이다.

<숭정전 앞 외조(外朝)>

경희궁이 국왕이 일상적으로 거처하면서 업무를 보는 정궁이 아니었기때문에 원래부터 행각과 궐내각사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궐도에서도 경희궁 외조는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숭정문 앞에는 이중으로 기단을 높게 쌓고 아래위 기단에는 월대를 각각 조성하고 있다.

<숭정문>

광해군이 세운 경희궁은 임진왜란 이후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조정의 반대가 심해서 간소하게 지었다고 한다. 2층 문루 형식을 하고 있는 경복궁 근정문과는 달리 단층으로 되어 있다.

<숭전문 앞 계단의 답도의 돌계단과 소맷돌>

<숭정문 좌우 행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