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중앙박물관 백제실] 백제문화의 중흥기 웅진기와 사비기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서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시기는 약 70년(475~538) 정도이다. 또한 성왕이 도읍을 부여로 옮겨 백제 중흥을 꿈꾸던 사비기(538~660년) 또한 약120년 정도로 백제 역사 700년 중 일부인 185년 정도이다. 하지만, 무령왕릉이나 사비성, 금동대향로 등 백제를 대표하는 유적이나 유물 대부분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서산마애석불, 미륵사지 등 백제를 대표하는 불교문화 또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관꾸미개(왕비), 국보, 삼국시대(백제) 6세기, 충남 공주 무령왕릉,

1971년 발굴, 왕비의 관꾸미개는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가 대칭형의 구도로 표현되어 있고, 달개는 달려 있지 않다.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꾸미개(왕), 국보, 삼국시대(백제) 6세기, 충남 공주 무령왕릉, 1971년 발굴, 복제,

왕의 관꾸미개는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가 좌우 비대칭으로 표현되었고, 둥근 달개 장식이 달려 있다. 왕비의 관꾸미개와 마찬가지로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아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송산리 고분군에서 무령왕릉이 1971년 송산리고분군에서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공산성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유물이 없었다. 송산리고분군 중 하나인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고분 중에서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진 왕릉으로 관꾸미개를 비롯하여 약 4,600여점에 이르는 많은 유물이 이 왕릉 한곳에서 출토되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중 보기 드물게 벽돌로 쌓아서 만든 무덤으로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잘 보여주는 무덤이다. 비슷한 형태의 무덤이 중국 남조의 귀족층 무덤으로 여러 곳이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대부분은 현재 공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유물 중 금제관꾸미개(왕비)와 금목걸이는 특별히 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석수, 왕과 왕비의 매지권, 환두대도, 금제관장식과 귀걸이 등 수많은 장신구들이 있으며,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제품, 자기류 등 당시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부장품들이 있다. 무령왕릉 출토 금제관꾸미개는 90년대 능산리사지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이었다.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 송산리고분군

웅진기 백제를  대표하는 고분군으로 공주를 도읍으로 정했던 시기의 백제 왕들의 무덤이다. 경주 왕릉에 비해서 크기도 크지 않고 내부는 중국 남조 귀족들의 무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공주의 도읍인 공산성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서방을 죽은자들의 땅이라는 사상이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는 무녕왕릉을 포함하여 7기의 왕릉이 금강변 구릉에 남쪽 방향을 보면서 줄지어 있다.

귀걸이(금, 복제품),

꽃모양꾸미개(금)

목걸이(금, 국보), 금박구슬(금.유리),

무령왕비 금목걸이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으로 9마디로 된 것과 7마디로 된 것 2종류가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된 금막대마다 고리를 만들고 마무리를 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몸에 걸기 위하 고리 외에는 다른 장식을 하지 않은 간단한 구조를 하고 있다.

목걸이(유리)

팔찌(금)

꽃모양꾸미개, 금.은, 삼국시대(백제) 6세기, 충남 공주 무령왕릉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웅진기를 대표하는 제25대 무령왕(재외501~523년)의 무덤으로 공주 송산리고분군에 위치한다. 이 무덤은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진 것이다. 무덤은 벽돌을 쌓아 만든 벽돌무덤으로 내부에서는 묘지석을 비롯하여 4,600여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중국 남조와 관련된 것이나 신라.왜와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도 있어 백제문화의 개방성과 국제성을 잘 보여준다. 관 꾸미개나 귀걸이 등은 백제 고유의 특징을 지진 것으로 백제 문화의 독창성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제문화의 중흥기, 웅진기
웅진기는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에서 성왕이 사비로 도읍한 538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웅진으로의 천도는 고구려의 침략에 의한 것이었으나 빠른 시일에 왕도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부터 다져진 정치적 기반때문이다. 도성은 금강과 맞닿아 있는 공산성을 중심에 배치하여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하였다. 국가를 재건하고 고구려의 남진에 대처하기 위하여 노력한 백제는 신라와 혼인을 통해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 왕조 및 왜와의 관계도 확고히 하였다. 왕권과 귀족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안정을 되찾은 무령왕대에는 중국 남조의 양에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강화하였다. 웅진기는 한성기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여 이를 다시 신라와 가야 그리고 왜에 전하였으며, 백제가 다시 국력을 회복하고 중흥의 초석을 다진 시기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제는 성왕때인 538년에 현 부여지역인 사비로 도읍을 옮겨 새로운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백마강이라 불리는 금강 남쪽해안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도성을 쌓았다. 또한 부소산성 입구에 해당되는 관북리 지역에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백제의 옛 도읍이었던 부여에는 중앙의 정림사지와 도성 바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궁남지와 부소산성을 제외하고는 유적지라고 느낄만 곳은 실제로 많지는 않다. 하지만 도성 동쪽편 왕릉이 있었던 능산리를 비롯하여 도심과 외곽에 여러 절터들이 있으며, 이들 절터에서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사비기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의 높은 문화와 기술 수준을 잘 보여주는 유물로 백제는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유물이다.

목단지.그릇받침, 삼국시대(백제) 5~6세기, 충남 논산 지역 무덤, 뼈 단지, 삼국시대(백제), 충남 부여 군수리 무덤

굽다리접시, 삼국시대(백제) 6세기, 충남 논산 모촌리 무덤, 뚜껑접시, 삼국시대(백제) 5~6세기, 충남 공주 도천리

세발접시,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충남 지역

합, 삼국시대(백제) 7세기, 충남 부여 관북리

전 달린 그릇, 삼국시대(백제) 7세기, 충남 부여 관북리, 접시, 삼국시대(백제) 7세기, 충남 부여 관북리.

옛 사비성 왕궁터로 추정되는 관북리에서 출토되었다. 궁궐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무덤 부장품이 아닌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비도성
사비도성은 왕궁을 중심으로 남쪽에 동서-남북방향의 도로가, 방어성인 부소산성이 배후에 위치하며, 도성의 바깥은 나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성의 내부는 중.상.하.전.후부의 5부로, 부는 다시 항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부의 전재는 ‘전부’ 등 행정구역 명칭이 새겨진 돌과 기와.목간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왕궁은 부소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관북리 추정 왕궁터에서는 대형건물터.도로.저장고 시설 등이 확인된다. 이곳에서 출토된 회백색의 토기는 크기가 일정하게 통일되어 있어 사비기의 규격화된 토기 생산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나무널 꾸미개, 금동,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무덤~익산 쌍릉,꽃모양 꾸미개, 금동.청동, 삼국시대(백제) 7세기, 충남 부여 부소산성

백제의 왕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출토한 것으로 목관을 장식했던 꾸미개이다. 삼신산이 표현된 이 판을 목관에 부착하여 장식하며, 주인공의 높은 신분을 보여준다.

널못, 금동, 삼국시대(백제) 6세기, 충남 공주 송산리 무덤,

햇빛가리개살 꼭지, 금동, 삼국시대(백제) 7세기, 충남 부여 부소산성

손잡이 달린 유리공,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충남 부여 하황리 무덤

단지, 삼국시대(백제) 7세기, 충남 논산 육곡리 무덤

도가니,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충남 부여 쌍북리, 유리조각,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백제에서 자체적으로 유리세공품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유리가공기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슬.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백제의 익산 경영
백제 무왕(재위600~641년)은 백제 문화의 전성기를 장식했던 왕으로 익산 지역에는 왕궁리 유적. 쌍릉. 미륵사지.제석사지 등 무왕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은 무왕의 천도설과 관련된 곳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이 유적은 처음에는 왕궁으로 조성되었다가 뒤에 사찰로 바뀌었다. 쌍릉은 7세기에 만들어진 돌방무덤으로 부장된 나무널은 무령왕릉 나무널과 같은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었으며 널 꾸미개도 화려하다. 미륵사는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세워진 사찰로 삼국 제일의 규모를 지닌 대가람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은 사비지만, 익산은 백제 왕실이 멸망하기까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던 지역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무기, 삼국시대(백제) 7세기, 충남 부여 부소산성,

성을 지키기 위한 무기로, 낫과 갈고리는 성벽을 올라오는 적을, 마름쇠는 땅 위에 뿌려놓아 적의 접근을 막는데 사용된다. 마름쇠(철), 낫모양무기(철),

창(철), 갈고리(철), 도끼(철)

화살촉, 철, 삼국시대(백제) 6세기, 충남 공주 송산리 무덤, 화살촉, 철, 삼국시대(백제) 7세기, 충남 부여 부소산성

서산 마애삼존불

태안 마애삼존불

백제의 불교문화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원년(384) 중국 동진에서 전래되었다. 사비기에는 정림사.왕흥사 등 많은 사찰이 지금의 부여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져 불교 문화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사찰은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1탑1금당식의 가람배치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사비기에 이르면 3탑3금당식의 가람배치를 갖춘 미륵사가 건립된다. 백제의 불상은 세련되고 온화한 모습이 특징이다. 서산마애삼존불.태안 마애삼존불 등은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원이 되며, 국수리 석조여래좌상 및 금동보살입상은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비롯하여 많은 금속공예품들은 백제 불교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백제의 불교문화는 왜에 전해져 일본 불교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꾸미개, 삼국시대(백제) 5~7세기, 충남지역,

관꾸미개, 은, 부여 하황리

관꾸미개, 은, 부여 하황리, 관꾸미개, 은, 부여 능산리, 복제

허리띠, 은, 삼국시대(백제) 6~7세기, 충남 부여 능산리 무덤

관료의 성장과 관꾸미개
꾸미개는 신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기능 외에도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백제의 지배층은 각종 꾸미개를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은제 관 꾸미개와 허리띠장식 등이다. 은제 관 꾸미개는 은판을 길게 오려 줄기를 만들고 꽃봉오리를 장식한 것으로 부여의 능산리고분을 비롯하여 논산.남원.나주 등지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왕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금꽃으로 장식하였고, 6품 나솔 이상의 관리들은 은꽃으로 장식하였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와 같이 백제는 관료의 등급에 따라 관과 허리띠장식을 달리하여 관직체계를 표시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웅진에서 사비로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왕(재위 523~554년)은 538년에 사비로 도읍을 옮겨 국가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사비 천도 이후에는 불교를 장려하고 중앙과 지방의 통치체제를 정비하여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서 영토를 회복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비기에는 한성기부터 축적되어 온 백제의 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는데, 예술과 종교에서는 불교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