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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세계유산 백제] 백제의 능묘

1. 도성과 행정2. 건축3. 무기와 전쟁4. 일상생활5. 사찰과 불교문화6. 능묘7.국제교류, 8. 지방통치

백제의 왕릉과 지배층의 무덤으로는 한성백제기의 돌무지무덤인 석촌동 고분(사적), 웅진기의 송산리고분군(사적), 사비기의 능산리 고분군(사적)와 익산 쌍릉(사적)가 있다. 그 중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곳으로는 공주 무령왕릉이 있다. 백제의 무덤 형식은 초기에는 고구려 돌무지무덤이었지만 이후 중국 북조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돌방무덤이 주로 사용되었다. 중국 남조와 교류가 활발했던 웅진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이 사용되기도 했다. 백제의 왕릉이나 지배층의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되어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공주 무령왕릉이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의 능묘제도나 당시 사람들의 사상, 대외교류 관계 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공주 무령왕릉 내부 모습(모형). >

당시 중국 남조 귀족집단에서 성행했던 벽돌무덤이다.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어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능묘
능묘는 왕의 사후 세계를 위한 공간이자 선왕을 통해 현왕의 권위를 유지하는 곳입니다. 백제의 능묘와 장례 풍습은 백제사의 전개 과정에 따라 변하였습니다. 한성도읍기(기원전 18 ~ 기원후 475년)의 능묘는 처음에는 고구려의 묘제인 돌무지무덤이었지만 뒤에 돌방무덤으로 바뀌었습니다. 웅진도읍기에도 굴식돌방무덤을 사용하였으며, 더불어 왕릉으로 쓰고자 중국 남조에서 유행한 터널형 천장의 벽돌무덤을 새로 들여왔습니다. 사비도읍기에는 궁륭형과 터널형 천장의 장점만을 채택해서 능산리형 돌방무덤을 만들어 왕실의 새로운 능묘로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지방 통치 체제가 완성되면서 백제 전역의 묘제가 굴식돌방무덤으로 일원화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그릇받침, 6세기 전반, 공주 정지산>

그릇받침은 실생활에서 보다는 의례 행위에 사용되었습니다. 공양물을 담은 둥근 바닥의 항아리를 그릇 받침에 올려 두었습니다. 무덤을 만들거나 특별한 행사를 위한 야외 제사의 필수품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령왕 부부의 빈장지로 추정되는 정지산 유적이나 장례와 관련된 제사가 반복되었을 송산리 고분군에서 그릇받침이 출토된 이유입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공주 정지산유적 출토품, 1. 뚜껑접시, 6세기 전반,>

<2. 뚜껑이 있는 세발토기, 6세기전반>

<3. 벽돌, 6세기 전반>

정지산 유적에서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기와건물과 대벽건물지, 저장시설과 배수로를 갖춘 특수시설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의례 용기인 세발토기와 그릇받침, 건물의 위계를 상징하는 연꽃무늬 수막새와 격자무늬 벽돌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일본 스에키 토기와 유사한 형태의 뚜껑접시는 빈장기간 동안 장례에 참석한 조문 사절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금상감 큰칼 파편, 6세기 후반, 공주 송산리>

송산리 29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칼몸에 용무늬, 별자리무늬, 초화무늬 등을 금선으로 상감하였습니다. 금선은 순도 97.2 %의 금을 사용했으며, 그 폭은 최대 0.4 mm입니다. 왕이나 왕족의 무덤이 위치하는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점이나 뛰어난 상감 기술로 화려하게 장식한 칼이 출토된 점에서 피장자의 신분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동전무늬 벽돌, 6세기 전반, 공주 송산리>

<은제 허리띠 꾸미개, 6세기 전반, 공주 송산리>

송산리 4호분은 도굴로 인해 부장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피장자를 알 수 없습니다. 4호분에서 출토된 은제 허리띠 꾸미개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과 재질의 차이만 있을 뿐 크기나 형식이 거의 유사합니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동성왕(재위 479~501년)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의 혼인기사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글자를 새긴 벽돌, 6세기 전반, 공주 송산리>

송산리 6호분의 폐쇄 벽돌 가운데 글자가 새겨진 연꽃무늬 벽돌이 확인되었습니다. 글자의 판독과 해석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양선이위사의’라고 읽는다면, ‘양나라 사람인 선이 총사로서 분묘의 축조를 감독하였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는 백제와 남조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그릇받침, 6세기 전반, 공주 송산리>

그릇받침은 실생활에서 보다는 의례 행위에 사용되었습니다. 공양물을 담은 둥근 바닥의 항아리를 그릇 받침에 올려 두었습니다. 무덤을 만들거나 특별한 행사를 위한 야외 제사의 필수품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령왕 부부의 빈장지로 추정되는 정지산 유적이나 장례와 관련된 제사가 반복되었을 송산리 고분군에서 그릇받침이 출토된 이유입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공주 송산리고분군(사적).>

웅진기 백제를 대표하는 무령왕을 비롯하여 백제 왕과 왕족들이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 고분군이다. 특히 무령왕릉과 6호분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한 벽돌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당시 무덤의 축조에 있어 중국의 고분양식과 기술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것으로, 당시의 백제와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송산리 고분군(사적)은 웅진시대 백제 왕실의 무덤으로 송산 남사면에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백제의 옛 왕릉이 있는 곳이라고 전해졌으며, 일제강점기에는 20여 기가 넘는 고분이 있었지만, 현재는 7기의 봉분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무덤은 굴식돌방무덤인 5호분, 벽돌무덤인 6호분, 무령왕릉입니다. 5호분은 전형적인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인데, 벽돌 형태의 할석으로 무덤방과 널길, 궁륭식 천장을 축조했습니다. 6호분은 중국 남조의 지배 계층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을 수용해 만들었으며, 무덤방의 네 벽에 사신도를 그렸습니다. 송산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진 정지산에는 무령왕과 왕비의 빈전 또는 왕실 제사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금제 관꾸미개(왕), 6세기 전반, 공주 무령왕릉, 국보 >

왕의 관꾸미개는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들었습니다. 중앙 위에는 활짝 핀 연꽃이 있고, 주변으로 뻗어있는 넝쿨 줄기가 마치 불꽃처럼 보입니다. 꽃과 줄기에는 127개의 원형 달개가 달려 있습니다. 아래 줄기에 구멍이 있어 비단에 고정시켰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소매 넓은 자주색 도포와 푸른색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검정 비단 모자를 착용했다”라고 전합니다. 기록에 등장하는 금꽃이 바로 이 관꾸미개입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금제 관꾸미개(왕비), 6세기 전반, 공주 무령왕릉, 국보>

왕비의 관꾸미개도 왕과 같이 금판을 오려 만들었습니다. 좌우 대칭의 문양을 만들고, 달개는 붙이지 않았습니다. 아래로 길게 뻗은 굵은 줄기는 청동으로 만들어 붙여 천이나 가죽으로 된 관모에 끼워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 가운데에는 꽃병에 연꽃을 꽂은 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연꽃의 주위로 넝쿨무늬가 화려하게 피어납니다. 이 연꽃무늬는 백제의 관꾸미개가 불교적 세계관을 지녔음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묘지석(왕), 525년, 공주 무령왕릉, 국보>

무령왕릉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2장의 장방형 석판은 왕의 묘지, 간지도, 매지권, 그리고 왕비의 묘지로 구성되었습니다. 죽은이의 신분, 사망과 매장의 시점에 대한 기록은 동아시아 능묘 연구에 기준을 제시하였으며, 백제 왕족의 내세관, 장럐 풍습 등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 묘지석과 매지권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죽음을 황제에게만 사용하는 ‘붕(崩)’이란 쓴 점은 백제 고유의 자존의식을 나타냅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다리작’ 글자를 새긴 은제 팔찌, 520년, 공주 무령왕릉, 국보>

이 팔찌는 왕비의 왼쪽 손목 부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팔찌의 안쪽에는 언제, 누가, 누구를 위해 만들었는지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팔찌는 왕비가 살아계실 때 착용했으며, 왕비를 당시에 대부인이라 불렀음을 알려줍니다. 바깥에는 세 개의 발톱을 가진 두 마리의 용을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유리 동자상, 6세기 전반, 공주 무령왕릉>

머리를 깎고 손을 합장한 모습의 동자상 2점이 왕비의 허리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동자상은 허리에 구멍이 있어 줄을 끼울 수 있습니다. 왕비가 부적과 같이 몸에 지녔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청동거울, 6세기 전반, 공주 무령왕릉, 국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3점의 청동거울 가운데 왕의 발치에 놓여 있던 것입니다. 꼭지를 중심으로 사각의 구획이 있고 그 주위에 네마리의 신수(神獸)와 이를 사냥하는 신선이 있습니다. 신선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손에는 창을 들었습니다. 꼭지 주위에는 12간지, 바깥 테두리에는 장생불사의 신선사상이 담긴 문구가 확인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1. 흑갈유 바른 네 귀 달린 병, 중국 남조, 6세기 전반, 무령왕릉>

<2. 청자 잔, 중국 남조, 6세기 전반, 무령왕릉>

무령왕릉에서는 6점의 청자 잔이 출토되었습니다. 그중 5점은 무덤방의 벽감에서 등잔으로 사용되었고, 1점은 흑갈유 사이병 주변 바닥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술잔으로 추정됩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3. 철제 오수전, 중국 남조, 6세기 전반, 무령왕릉>

오수전은 매지권 위에 약 90여개가 꾸러미로 놓여 있었습니다. 매지권에는 토지신에게 무덤터를 산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터를 사기 위해 실제 유통되는 돈을 무덤 안에 넣은 것입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오수전은 중국 남조 양 무제 보통 4년(523)에 만든 것입니다. 무령왕이 사망한 해에 제작된 동전이 왕릉에 부장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문물교류의 빠른 속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 출토 장신구, 6세기 전반, 무령왕릉, 1.금제 모자 장식 곱은옥, 2. 금제 모자 모양 장식,>

 <3.유리 곱은옥, 4. 금제 허리띠 꾸미개,>

<5. 동물모양 장식, 6.대추 모양 구슬, 7. 흑옥 구슬,>

 <8. 유리 구슬.>

<금제 일곱마디 목걸이, 6세기 전반, 무령왕릉, 국보>


<금제 목걸이, 6세기 전반, 무령왕릉>


<목걸이>

<벽돌, 6세기 전반, 무령왕릉, 1. ‘중방.대방’ 글자가 찍힌 벽돌.>

<2. 연꽃무늬 벽돌, 3. 인동 연꽃무늬 벽돌>

<4. 연꽃 격자무늬 벽돌>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벽돌의 형태는 직사각형과 사다리꼴, 삼각형 등 다양합니다. 무덤에 사용된 벽돌의 측면에는 연꽃무늬나 동전무늬, 넝쿨무늬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일부 벽돌에 찍힌 대방이나 중방, 급사 등의 글자는 사용위치를 지정한 일종의 설계 부호로 생각됩니다. 부여 정동리 가마터에서 제작된 벽돌은 금강의 물길을 이용해서 공주 송산리 일대로 운반되어 무덤을 쌓는데 이용되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공주 송산리에 있는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송산리 6호분과 같은 벽돌무덤입니다.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었고, 그 안에서 묘지석이 출토되어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금제 관식과 같은 왕의 신분을 나타내는 물건을 포함해서 4,600여 점에 이르는 당시 최고 수준의 부장품이 발견되었습니다. 중국의 불교 및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중국제 도자기, 벽돌 문양과 석수, 묘지와 매지권을 비롯해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은 일본에서 출토되는 동제 잔과 받침, 청동제 다리미, 청동거울 등과 함께 6세기 전반 중국 남조와 백제, 왜를 연결하는 문화 교류망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널꾸미개와 널못, 6~7세기, 부여 능산리 고분군, 1. 금동 산모양 꾸미개,>

<2. 금동 널꾸미개,>

<3. 금동널못,>

<4. 금동 널못,>

<5. 금동 꽃모양 널못,>

 <6. 금실>

<널꾸미개와 널못, 7세기 전반, 익산 쌍릉, 1. 금동 밑동쇠, 2. 금동 널꾸미개,>

<3. 금동 널못>

목관
널꾸미개와 금동 밑동쇠는 목관의 뚜껑과 몸체를 장식하는 부속품입니다. 꾸미개의 윗부분에는 도금된 장식에 월계형 꽃무늬가 뚫려 있습니다. 아랫부분에 부착된 장방형판에는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관 뚜껑에서 몸체로 꾸미개를 내리꽂고, 측면에서 금동 널못을 장방형판의 원형 구멍에 횡으로 꽂아서 목관의 몸체와 뚜껑을 결합하였습니다. 부여 능산리 7호분과 익산 쌍릉서 출토되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1. 나무 베개 편, 7세기 전반, 익산 쌍릉>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한 면이 곡선을 이루고 있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베개로 추정됩니다. 일부 금박이 남아 있으며, 적외선 촬영 결과 넝쿨무늬 형태의 문양도 확인되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2. 옥 꾸미개, 7세기 전반, 익산 쌍릉>

대왕묘 목관 안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꾸미개입니다. 당나라 요패에 관한 규정에 의하면, 옥제 요패는 문무관 3품 이상의 최고위 관료나 왕족들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대왕묘 출토 꾸미개는 백제의 최고 지배층이 사용한 물품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3. 목관뚜껑과 금동 밑동쇠, 7세기 전반, 익산 쌍릉>

<4. 사발, 7세기 전반, 익산 쌍릉>

대왕묘 관대의 남쪽 아래에서 엎어진 상태로 놓여 있었습니다. 바닥이 둥글고 몸통이 곡선상으로 조금씩 벌어져 오르다가 구연부에서 가볍게 꺾입니다. 이러한 기형과 제작 기술은 부여를 중심으로 한 사비기 고분이나 건물 터 보다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 지역에서 더 자주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익산 왕궁리 유적이나 미륵사지에서 비슷한 형태의 토기들이 다수 출토되어 7세기 익산 지역의 특징이 반영된 토기로 보는 견해와 신라계 토기로 보는 견해가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사적)>

성왕을 비롯하여 사비기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익산 쌍릉(사적>

2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쌍릉은 능산리고분군과 같은 굴식돌방무덤으로 남쪽에 있는 것을 소왕묘,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부른다. 무덤의 구조나 출토 유물, 주위에 있는 미륵사지나 왕궁리유적 등을 고려해 볼 떄 백제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다.

능산리 고분군과 쌍릉 
사비도읍기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사적 14호)은 사비도성을 에워싸는 나성의 외곽 동쪽에 자리했으며, 고분군의 서쪽에는 선왕의 명복을 빌고 왕릉을 관리하는 능사(陵寺)로 추정되는 사찰이 있습니다. 무덤의 내부 구조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이며, 뚜껑돌 이하를 모두 지하에 조영한 지하식입니다. 일찍부터 도굴을 당해 부장품은 거의 없어지고, 목관편과 금동관못, 금동관꾸미개, 금동제 장신구 등만 수습되었습니다. 무왕과 관련된 기록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익산에 위치한 쌍릉은 능산리 고분군과 같은 석실이며, 복원된 목관의 형태나 관못, 꾸미개 등도 능산리와 비슷합니다. 무왕과 왕비의 능일 가능성이 있지만, 신라계 토기 완이 출토되면서 피장자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세계유산 백제”, 중앙박물관, 201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