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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산 성주사지(사적), 통일신라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 중심사찰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산 기슭에 이는 성주사지(사적)이다. 삼국시대 백제 법왕때 창건한 오합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통일신라 때 낭혜화상이 크게 중건하면서 선종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의 중심사찰인 성주사로 바뀌었다. 절터에는 낭혜화상탑비(국보)를 비롯하여 4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절터의 규모나 석탑 등 유물들로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낭혜화상탑비에 새겨진 비문은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유학자이 최치원이 지었다고 하며, 당시 성주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주사지는 서해안 주요 항구인 보령항에서 부여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한반도.일본간 해상교역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이 지역을 봉지로 받았으며, 조선시대에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영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다. 삼국시대 이후 해상교역상의 이점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지역으로 보이며, 그런 연유로 상당히 규모가 큰 사찰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인근 무량사가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잡으면서 절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보령 성주사지(사적)>

통일신라말 지역호족의 후원을 받아 크게 번창했던 선종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을 대표하는 중심사찰이었다.

<절터 뒷편에 있는 낭혜화상비(국보)>

무열왕의 후손으로 당나라에서 유학한 후 이곳에서 성주산문을 열었던 낭혜화상의 업적을 기리는 탑비이다. 당대 문장가 최치원이 글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성주사는 가람배치에 있어서 통일신라 선종 사찰의 특징이 잘 드러나 보인다. 현존하는 건물터와 석탑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금당을 중심으로 앞에는 오층석탑이 있고, 뒷편에 2기의 삼층석탑이 배치되어 있다.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 성격의 사찰들은 부처를 모시는 불전이나 석탑을 그리 크게 짓지는 않고, 승려들의 수행공간을 넓게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곳 성주사 또한 금당 외에는 불전으로 보이는 건물터는 없어 보인다. 반면에 금당 주외로 요사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아주 넓은 건물터들이 남아 있다.

<보령 성주사지 절터>

금당을 중심으로 4기의 석탑이 옛 절터에 남아 있고, 뒷편에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 백광보월탑비가 있다. 금당을 중심으로 한 사찰의 영역을 그리 넓어 보이는 편은 아니지만, 주위에 승려들이 묵었던 요사채 건물들이 있었던 터가 상당히 넓어 보인다.

<오층석탑(보물)>

성주사지 중문을 들어면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오층석탑(보물)을 볼 수 있다.

<성주사지 오층석탑과 석등>

탑은 2층 기단 위에 오층 탑신을 올려 놓았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 지붕돌의 구성과 비율이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성주사지 금당터>

불상을 모시는 불전이 있던 건물터로 그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다.

<금당터 가운데 놓여 있는 석조대좌>

상당히 큰 규모의 불상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을 오르는 석계단>

원래 양쪽에 사자상을 조각한 측면석이 있었다고 한다.

성주사지 석계단, 화강석, 통일신라
금당인 대웅전에 오르는 돌로 된 계단이다. 원래 돌계단 양 옆에 사자상을 조각한 측면석이 있어서 이 사자상 측면서의 예술성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1986년 사자상이 도난당해 현재는 계단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안내문, 보령사, 2010년)

<금당터 뒷편>

금당터 뒷편에는 3기의 3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사찰 가람배치에 있어서 3개의 석탑을 나란히 두는 경우는 전례가 없는데, 그 중 하나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보령 성주사지 서삼층석탑(보물)>

탑은 2층의 기단부, 3층의 탑신, 상륜부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정형화된 형태이지만 잘 만들어진 석탑으로 보인다.

<중앙삼층석탑(보물)>

불국사 삼층석탑과 비슷한 정형화된 통일신라 삼층석탑으로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동삼층석탑>

금당터 뒷편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3기의 석탑 중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외형상 다른 삼층석탑과 큰 차이가 없다.

<성주사 중문과 주변 회랑 건물이 있었던 건물터>

성주사의 옛 모습은 현재 복원되어 있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불국사에서 옛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금당 서쪽편 회랑 건물터>

<금당 동쪽편 회랑 건물터>

<금당 뒷편 강당터>

금당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의 강당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사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터에 놓여진 건물 주춧돌>

<절터 서쪽편에 발굴.조사가 진행중 인 건물터>

성주사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이 머무는 요사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석받침, 보령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터, 통일신라>

성주사 절터에 있던 거북모양의 비석받침돌이다. 사실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나 세부적인 조각수법 등 통일신라 전성기 비석받침돌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있다.

<비머리, 보령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터, 통일신라>

<주춧돌>

<절터에서 발굴된 기와를 비롯한 건축부재들>

<절터 한쪽편에 있는 조선시대 석조불상>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말에 유행했던 선종 사찰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지이다. 백제시대에는 전쟁에 죽은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오합사라는 절이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 김인문이 이 지역을 봉지로 받은 이후 신라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 후 당에서 귀국한 낭혜화상이 왕자 흔의 요청으로 이곳에 중창한 것이 성주사이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에 2차에 걸쳐 크게 고쳐 지었고, 조선시대에도 중항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절의 규모가 크게 줄어 들었다. 현재의 중심 사역 이외에도 주변에는 많은 건물자리가 있는데 주위의 아름다운 산세와 어울려 웅장했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경내에는 최치원이 지은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국보 8호)를 비릇하여 오층석탑(보물 19호), 금당 뒷편에 있는 3기의 삼층석탑(보물 20, 47호 외), 석등이 있고, 발굴결과 백제시대 와당을 비롯하여 소조불, 비석파편, 석제 조각품이 발견되었다. 국립부여박물관에 비석 머리와 받침이 있다. (안내문, 보령시청, 2010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보령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