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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홍산현 관아(사적),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곳

충남 부여군 홍한면 남촌리 홍산면 소재지에 있는 홍산현 관아(사적)이다. 이 곳은 백마강 서쪽에 있는 고을인 옛 홍산현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동헌, 객사와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던 형방청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객사는 한양의 위치를 고려하여 남향을 있으며, 동헌과 형방청 등은 지형조건을 고려하여 동향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관아 건물들은 구한말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행정개편으로 객사는 주로 초등학교로, 동헌과 내아 등 부속건물들 또한 면사무소 등 관청 건물로 사용하면서 없어진 경우가 많은데 홍산현 관아 건물들은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다. 관아 건물들은 홍산지서, 양조장, 개인주택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 부여군은 조선시대 임천군, 부여현, 홍산현, 석성현의 1군, 3현이 합쳐진 행정구역으로 그 중 흥산현은 부여의 서남쪽 백마강 건너편 성흥산성 북쪽편에 위치한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현감(종6품)이 고을수령이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대산현이었다가 통일신라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고려 건국 이후 홍산현으로 불리웠다. 동쪽으로는 부여, 서쪽으로는 보령, 남쪽으로 한산, 북쪽으로는 청양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백제는 부근에 가림성(사적)를 쌓아 수도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

<부여 홍산현 관아(사적)>

조선시대 관아 건물 중 객사와 동헌, 부속 건물 등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곳으로 당시 관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생활공간인 내아는 남아 있지 않다.

홍산객사, 국왕의 궐패를 모시는 건물

국왕의 궐패를 모시는 건물인 객사인 비홍관(飛鴻館)은 관아 북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남향을 하고 있는 이 건물은 앞면3칸의 정청, 앞면 3칸의 서익헌과 앞면 5칸의 동익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1838년에 새로 지어졌는데 현단위 고을의 객사건물 중에는 비교적 큰 건물이다. 다른 지방 객사와는 달리 구한말에 초등학교로 바뀌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새로 지어진 건물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홍산초등학교는 관청 건물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홍산객사>

가운데 국왕의 궐패를 모시는 정청을 두고 양쪽에 이 고을을 방문한 관리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인 익헌을 두고 있다. 동익헌을 앞면 5칸으로 크게 지은 점이 특이하다.

<객사 출입문>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객사문이다.

<국왕의 궐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공간인 정청>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개방적인 구조이다.

<서익헌>

앞면 2칸은 방으로, 1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방에는 온돌시설이 없이 마루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면 5칸 규모의 동익헌>

앞면 2칸은 방, 3칸은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에서 연회같은 것을 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쪽에서 본 홍산객사>

<객사 마당에 남아 있는 고목>

<객사 앞 골목길>

원래 관청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다.

<객사 옆 건물터>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모습이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청의 손님이나 사신이 유숙하던 건물인데 궐패를 안치하고 대궐을 향해 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였다. 불탄지 9년만인 1838년 당시 군수 김용근이 재건한 것이다. 가운데에 정당을 두고 좌우에 익실을 붙여 두었다. 대개 객사의 양 익실은 크기를 같게 하는데 비해 흥산 객사는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동쪽 익실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익실은 온돌방이다. 가운데 정당 지붕을 양 익실보다 조금 높여 맞배지붕으로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객사는 목수 20여명이 5개월 동안 연인원 4000명의 인부와 함께 건립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부여군청, 2009년)

홍산  아문과  동헌

홍산 동헌은 고을 수령이 근무 건물로 구한말 대원군이 전국 관아 건물들을 정비할 때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하였다. 건물 당호로는 제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건물은 앞면 7칸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왼쪽에 1칸, 오른쪽 3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해방이후 홍산지서 건물로 사용하다가 1984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홍산현 관아 아문>

  집홍루라 불렸던 원래의 관아 아문은 1964년에 부소산성으로 옮겨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출입문 위에 문루를 세운 전형적인 아문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화려한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어 원래 관아 아문의 모습과는 약간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홍산 동헌>

앞면 7칸의 큰 건물로 ‘제금당(製錦堂)’이란 건물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동헌>

동헌건물 중에는 규모도 크고, 누각처럼 앞뒤가 개방되어 있어 쉬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대청마루>

홍산 현감이 민원인을 직접 접견하거나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넓은 대청마루이다. 안쪽에 작은 방이 있는데, 개인적인 휴식 공간으로 보인다.

<온돌방>

건물 오른쪽 3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일상적인 업무를 보거나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이다.

<옆에서 본 모습>

<동헌 앞 마당>

아문 옆쪽에는 부속건물인 형방청이 있다. 마당에도 부속건물이 있고, 마당 가운데 중문이 있었다.

<마당 한쪽편에 있는 옛 건물 초석>

동헌은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건물로 고을의 수령이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 공적일 일을 하던 곳이다.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잡은 후 관청의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 걸쳐 관청건물을 정비하였다. 그 일환으로 고종 8년(1871) 정기화 군수가 세웠다. 해방 후 홍산지서로 사용하다가 1984년에 부여군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하였다. 앞면 7칸·옆면 2칸의 크기로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각 크기가 다른 온돌방을 설치했다.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관청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동헌 앞에 있는 이정우 가옥은 관아문과 형방청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안내문, 부여군청, 2009년)

형방청, 하급관리들이 근무했던 공간

동헌 북쪽편에 있는 형방청은 관아 하급관리들이 근무했던 건물이다.  ‘ㄷ’자형 형태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앞면 5칸 규모로 좌.우에 날개채를 달아놓고 있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하고 양쪽 날개채에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관아 건물 중 하급관리인 형방에서 사용한 건물로  조선시대 관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살림집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홍산현 관아 형방청>

앞면 5칸 건물을 중심으로 4칸짜리 날개채를 양쪽으로 달아놓은 구조를 하고 있다.

<형방청 출입문>

관아 아문 옆에 별도의 출입문을 두고 있다.

<날개채>

날개채는 3칸은 관리들이 근무하는 작은 온돌방과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마루>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가운데 3칸이다. 여러사람이 모여서 논의할 수 있는 강당과 비슷한 형태로 보인다.

<날개채>

작은 방으로 되어 있으며, 문서등을 보관했던 다락이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다.

<날개채 뒷편>

조선시대 홍산현의 관아 건물로 고종8년(1871)에 중수하여 비홍추청이라 하였다. 평면배치는 ‘ㄷ’자 형태로 몸채와 좌우 날개채로 이루어져 있다. 몸채는 정면5칸, 측면2칸의 규모이며, 좌우 날개채는 정면2칸, 측면1칸 규모이다. 몸채의 지붕 용마루 높이를 날개채보다 높게하여 조성하였다. 몸채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마루를 구성하고, 측면에는 부엌을 두었다. 좌.우측 날개채에는 각각2개씩 온돌방을 두었다. 건물구조는 자연석으로 기단을 조성하고, 초석위에 방형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상부는 공포가 설치되지 않은 민도리집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건립연대와 중수기록, 형태 등이 온전히 남아 있는 형방청의 희소한 예로서 조선시대 관아건축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안내문, 부여군청, 2009년)

<출처>

  1. 부여군청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