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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송국리 유적(사적), 송국리형 토기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지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에 있는 송국리 유적(사적)이다. 부여 송국리는 부여와 논산의 경계가 되는 지점의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송국리형토기를 비롯하여 동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된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이다. 1975년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하여 60여 기의 움집과 돌널무덤.독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마을 둘레에는 나무울타리를 둘렀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다량의 불탄 쌀과 농공구, 요령식 동검, 청동도끼 거푸집 등을 통하여 본격적인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의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부여박물관에는 벼농사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물로 이 곳 송국리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 유적지는 발굴 후 다시 흙으로 덮어 버렸기때문에 재현해 놓은 움집 등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유물은 볼 수는 없지만 청동기시대 마을이 형성된 지역적 특징과 여러 모형들로 선사시대에 대한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다.

<부여 송국리 유적(사적) 입구>

넓은 평야지대인 논산과 부여.공주가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송국리유적지>

해발 20~60 m의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원형 또는 방형의 움집, 목책을 꽂았던 자리, 각종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유적지 동쪽>

<송국리 선사 주거유적지 주변의 넓은 평야>

논농사가 발달할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큰 강은 흐리지 않지만, 북쪽편 계룡산을 중심으로 산간지역에서 개천이 흘러와서 금강을 향해서 흘러가는 지역으로 수량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송국리 유적지 모형(부여박물관, 2012년)>

‘∩’자 모양으로 생긴 구릉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송국리 유적지 형태>

평야 지대에 위치한 낮은 구릉으로 양쪽으로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 모형(부여박물관)>

송국리 선사취락지
송국리 일대는 해발 25 ~ 60 m에 달하는 구릉지역으로, 청동기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여러가지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야외박물관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유적은 청동기시대 취락 유적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 결과 60 ha나 되는 넓은 지역에 평면이 원형이거나 방형인 집자라와 마을을 둘러싸는 구덩이와 나무울타리, 마뭇가지를 둑에 꽂아 외부로부터 오는 적이나 짐승을 맞았던 녹채 시설같은 방어시설이 확인되었다. 토기를 굽던 가마와 마을의 물을 다루었던 배수로, 저장구덩이도 나타났다. 또 매장시설로는 돌널무덤과 움무덤, 독무덤도 조사되었다. 가까운 산척리에는 고인돌이 있어 이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 밖에 백제시대의 움무덤과 독무덤, 토기가마, 고려시대의 움무덤과 돌곽무덤, 조선시대의 움무덤도 확인되었다.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중기, 혹은 후기의 문화에 속하며, 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었던 마을 유적이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송국리 유적지 입구>

<움집>

전시관 옆에 움집을 재현해 놓고 있다. 대표적인 원형과 네모모양의 움집을 재현해 놓았다.

<송국리 유적지에 전시된 송국리집터(원형집자리)>

<부여박물관에 재현해 놓은 움집모형(부여박물관, 2012년)>

<움집 내부 모형(부여박물관, 2012년)>

이제까지 조사된 43기의 집자리유적 중 원형집자리는 14기인데 중심지역은 54지구이다. 크기는 평면의 지름이 3.5~5.3 m, 깊이 0.3~1.5 m로, 크기가 다양한데, 대개 지름이 4.5 m내외이다. 원래 깊이는 1 m가 넘었으나 많이 깎여 나간 듯하다. 바닥 중앙에 길이 1 m정도의 구덩이를 길게 파고 그 양쪽 끝 부분에 기둥구멍을 대칭으로 배치한 것이 특징인데, 원형이나 방형 집자리에 이런 구조를 가진 것을 송국리형 집자리하고 부른다. 이 구덩이 바깥 양쪽에, 혹은 구덩이 주위에 4개 기둥을 배치한 형식이 있다. 출입구 시설은 보이지 않아 사다리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바닥에는 흙을 깔거나 다진 흔적이 있으나 화덕이 보이지 않는다. 층위로 보아 환호나 나무울타리, 방형 집자리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송국리집터(장방형집자리)>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모습이 후대의 주거시설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원형집터보다 연대가 빠르다고 한다. 동시대에 같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며 기능적인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집터 모형(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원형 집자리보다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집자리는 짧은 변이 3~5 m, 긴 변이 4~7 m, 깊이 0.3 m 정도이며 넓이는 24 ~ 28 m²정도이다. 한 사람이 차지하는 면적을 5 m²로 계산하면 하집에 5~6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형 집자리에서 보이는 타원형 구덩이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화덕시설이 명확하지 않고, 출입구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54-2호 집자리에서는 벽면에 판자를 세워 마무리하였다. 54지구와 57지구 조사결과 나무 울타리와 집자리를 짓기 위하여 경사면을 깎아 대지를 마련한 공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형 집자리보다 깊이가 얕아 반수혈 혹은 지상건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층위로 보면 원형 집자리보다 이르지만, 기능의 차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마울 경계와 방어를 위해 설치한 목책>

송국리에서는 약 430 m 정도의 목책이 확인되었다.

청동기마을의 밖에 나무울타리를 세워 영역을 구획한 시설이다. 송국리유적에서는 430 m 정도가 확인되었으며 지름 30 cm가 되는 기둥을 180 cm 간격으로 열을 지어 세우고 나무를 가로질러 고정하고 점토로 벽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목책은 방형주거지와 관련된 시설로 여겨진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목책 바깥에 방어를 위해 설치했던 시설인 녹채>

경사진 벽에 작은 나뭇가지를 꽂아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이나 동물들을 저지하는 시설이다. 이 시설은 목책열 밖의 경사면에 지름이 50~60 cm 정도의 비교적 큰 기둥구멍들이 130 cm 간격으로 배치되거나, 작은 기둥은 지름이 10~30 cm로 크기가 다양하며 배열이 불규칙하다. (송국리유적전시관, 2010년)

<마을 경계>

마을 능선에는 목채 외 참호처럼 U자형으로 구덩이를 파서 만든 환호시설도 확인되었다.

환호시설
54지구와 57지구의 능선에 남동-북서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앞선 시기의 나무 울타리 시설을 파괴하고 지나가고 있다. 구덩이의 단면은 낮은 U자형으로, 너비는 차이가 있으나 2.7~3.8 m, 깊이는 0.9~1.4 m 정도이다. 환호는 원래 적이나 짐승의 침입을 막는 마을의 방어시설이지만, 송국리 경우에는 지형이 많이 깎여 나갔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의 깊이가 낮아 방어보다는 다른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나 방향이나 지형으로 보아 55지구의 원형 집자리를 둘러싼 유구로 보이는데, 층위에서 보듯이 환호와 원형 집자리가 목책과 방형집자리보다 늦게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솟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대상물이다.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다. 이는 마을 밖의 부정을 막고 마을의 신성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형태는 긴 장대 꼭대기에 세 갈래로 된 나뭇가지 위에 세 마리의 새를 조각하여 올려놓은 것이 일반적이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송국리유적 발굴.조사 당시 모습>

1975년부터 모두 11차례의 발굴.조사가 이었다. 유적지에서는 집터, 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송국리형 토기를 비롯하여 당시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송국리 일대에서는 이전부터 농사를 짓다가 유물들이 발견되어 국립부여박물관을 비롯한 대학박물관에 신고되었는데, 특히 주목을 끝 것은 1974년도에 요령식동검이 들어 있는 돌널무덤이 발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75년부터이다. 농수산부가 송국리 일대 야산 약 80만 ㎡를 농지를 개간하기 위한 농지확대개발사업을 계획하였는데, 사업 이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현재까지 모두 11차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단편적인 조사에 지나지 않아, 마을 전체의 모습을 밝히는데는 어려움이 많다. 이제까지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원형 집자리 14기, 장방형 집자리 26기, 부정형 2기, 미상 1기를 비롯하여 독무덤, 돌널무덤, 나무울타리, 환호 등이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불탄쌀, 부여 송국리, 청동기, 부여박물관>

쌀농사의 확인
이삭따는 반달칼이나, 땅을 파는 도구인 홈자귀, 갈판 등이 발굴된 것은 송국리 주민들이 농사를 지었따는 방증자료이다. 특히 54-1호 집자리에서 나온 불탄 쌀은 토기 바닥에 찍혀 있는 볍씨자국과 더불어 벼농사가 이루어진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줄 뿐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에 쌀농사가 전해진 경로를 추정해 보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이 쌀은 화북지방과 한반도, 일본에서 즐겨 재배한 자포니카라는 짧고 통통한 종류로, 중국 화북지방에서 동북지방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 들어간 전파과정을 말해준다. 송국리 일대에서 논유적을 찾는데 실패했으나, 다른 벼농사 유적의 입지와 매우 비슷하고 구릉 양쪽으로 흐르는 작은 냇가와 저지대, 집자리가 자리한 낮은 구릉은 농사짓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 논농사의 흔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세모돌칼(부여 송국리), 반달돌칼(서산 휴암리), 청동기, 부여박물관>

<갈돌,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낫,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자귀와 홈자귀, 9,11.충남 부여 송국리(1982년 발굴), 대팻날, 10.충남 부여 송국리(1982년 발굴)>

송국리형 석기의 특징.
이삭따는 도구로 반달칼이 나왔고, 화살촉이나 석검.석창.환상석부같은 무구, 그리고 생산 및 생활도구로 돌도끼.돌끌.칼.대팻날.흠자귀.숫돌.방추차.갈돌과 갈판.망칫돌 등이 있다. 수화도구들이 많이 나오는 한편, 그물추는 한 점도 없어, 송국리인들이 고기잡이 보다는 농경에 기반을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여러 종류의 숫돌이 많이 나와 석기제작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소형의 숫돌이 많은 것은 휴대용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칼판과 갈돌은 신석기시대에 이어 널리 사용된 조리용구였고, 방추차가 많은 점으로 보아 베를 짠 직조기술도 상당히 발달했을 것이다. 불탄나무판자는 나무를 다루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을 말해준다. 특히 거풋집이 집자리에서 나온 것은 최초의 일로, 초보적이나마 청동기 주조도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붉은간토기(Red-burnished pottery),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붉은간토기(Red-burnished pottery),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붉은간 두귀단지, 부여 송국라, 부여박물관>

<민무늬토기 바리,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송국리형 토기, 부여 송국리>

좁은 바닥에 배부분이 팽창되다가 아가리부분에서 좁아지고 다시 입술부분에서 밖으로 벌어지는 특징적인 토기를 송국리형 토기라고 부른다. 이런 형태를 가진 완전한 토기가 송국리에서 처음 나와서 붙인 이름인데, 요즈음에는 충청남도를 비롯하여 호남지방, 경상도지방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서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20여개소에서 비슷한 토기가 발견되었다. 점토에 장석이나 운모, 고운 모래알을 섞어 만든 것이 대부분이고, 홍토의 바탕흙처럼 고운 것도 있다. 최대 지름이 배 부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불안하기도 하나, 전체 균형이 잘 어울리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타원형 구덩이가 있는 송국리형 집자리와 더불어 송국리 문화를 대표하는 표식중의 하나이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바퀴날도끼(부여 송국리), 청동기시대, 부여박물관>

<화살촉,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21.요령식 동검, 22.칼,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23.끌, 24.옥,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지배자의 등장 
농경사회에서는 개별 가족 단위의 활동을 넘어 마을 전체의 단결과 공동노동이 중요해진다. 이에 따라 새로운 농경지를 둘러싼 분쟁이나 잉여생산물의 배분 등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통합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청동검이나 간돌검이며, 달도끼나 별도끼 등도 당시의 사회적 계층이나 권위를 대변하기도 한다. 고인돌의 축조와 같은 마을 지배자의 장송의례는 마을 전체의 공동행사로 지배자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농경사회 내부의 크고 작은 갈등을 완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부여박물관, 2012년)

<돌널무덤,>

51, 52지구 남쪽 경사면에서 4기가 확인되었다. 이중 중심무덤은 요령식 동검이 나온 1호인데, 모두 남북방향으로 일직선상에 자리하고 있고, 구조가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일정한 기획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호 무덤은 풍화암반을 파고 바닥에 3장의 판석을 깔아 시상대(주검을 놓는 바닥)을 마련하였고, 넓은 판석을 세워 벽을 만들었다. 그 위에 커다란 한 장의 판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는데, 지상에서는 아무런 표지가 없었다. 주검의 왼팔쪽에서 요령식 동검과 화살총.대롱옥.귀걸이 오이, 허리 부분에 돌칼과 청동 끌이 나왔다. 이 무덤의 집자리와 같은 시기에 속하는데, 날이 비파처럼 생긴 요령식 동검은 송국리 문화와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가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신직리 고인돌>

송국리 유적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신직리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산직리 고인돌>

송국리유적의 구릉 남단에 위치한 고인돌로서 네 개의 돌기둥을 세워 그 위에 덮개돌을 수평에 맞춰 놓은 형상이다. 하부에 매장구조가 없어 제사를 지낸 제단기능을 가졌던 고인돌로 추정된다.

<출처>

  1. 부여군청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