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맹씨 행단(사적)에 있는 맹씨 고택이다. 이 집은 고려시대(1330년)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처음 지었으며, 실제 최영 장군이 거처했던 집이다. 위화도 회군 이후 맹사성 일가가 이곳에 옮겨 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工’자형 평면구조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주심포 방식에 가까운 공포, 고택 가구부에 남아 있는 고부재와 창호 등에서 당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이런 구조를 가진 살림집 용도의 한옥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도산서원 농운정사가 ‘工’자 평면배치를 하고 있다. 조선중기까지는 이런 형태의 주택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82년, 1642년, 1814년, 그리고 1929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러차례 수리가 있었지만 고려말 건축양식이 많이 남아 있어 한옥의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아산 맹씨행단(사적)은 조선초 세종때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 선생이 살던 고택과 고택 앞 수령 600년 이상된 은행나무를 지칭하는 말이다. 아산 맹씨행단이라는 이름때문에 아산 맹씨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안내표지판에 자신들은 신창맹씨임을 강조하고 하고 있다.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는 맹사성이 직접 심은 것으로 수령이 600년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은행나무 아래서 맹사성이 뜻이 맞는 사람들과 강학을 논의하던 곳이라 해서 맹씨 행단이라고 불린다.
<아산 맹씨 고택>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이 많이 남아 있는 한옥으로 난방을 위해 창문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앞쪽에서 본 모습>
후대 한옥과는 달리 ‘工’자형 평면배치를 하고 있으며 맞배지붕을 사용하고 있다.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대청마루>
대청마루 가운에에 분합문을 두어 통로로 사용하는 툇마루와 생활공간인 대청마루를 분리하였다. 출입문 1칸을 제외하고는 문턱을 높게 만들어 창문 기능하고 있다. 창문은 위로 걸어두는 방식 외 열고 닫는 기능이 없다.
<작은 창문>
툇마루 양쪽에는 작은 2개의 창문을 두고 있다. 출입문이라기 보다는 창문에 가까운 구조이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
조선초까지 주로 사용했던 주심포 방식과 비슷하다.
<대청마루 판문>
대청마루 뒷쪽에는 판문을 달았으며, 후대 한옥과는 달리 문틀을 두껍게 만들었다.
<온돌방>
양쪽 온돌방을 출입하는 작은 여닫이 출입문이 있다.
<대들보와 연등천장>
<뒤에서 본 모습>
<창문>
바깥쪽에도 창문을 두고 있는데 크기를 작게 만들었다.
<옆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양쪽에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이 세워져 있다. 후대 한옥과는 달리 부엌을 두고 있지 않다. 맹씨 행단의 성격에 맞게 집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는 사랑채 성격의 건물로 보인다.
<마당 한쪽 은행나무>
600여년 전에 맹사성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고목이다. 학문은 논하는 행단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아산 맹씨 행단
맹씨 고택은 1330년(고려 충숙왕 17) 2월 무민공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이 건축하였다고 전하며, 실제로 최영이 살았던 집이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따른 정란으로 최영이 죽은 뒤, 비어 있던 집에 맹사성(최영의 손녀사위)의 아버지 맹희도가 정란을 피하여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하였다. 1482년(성종 13), 1642년(인조 20), 1814년(순조 14), 그리고 1929년에 각각 건물을 손질하여 고친 기록이 있으며, 고택 가구부에 남아 있는 고부재와 창호 등이 견실한 고법을 간직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귀중한 건축물로 평가된다. 이 집은 “工”자형 맞배지붕으로 건평은 90.72 ㎡ (27.5평)이다. (안내문, 아산시청, 2017년)
<출처>
- 아산시청
- 문화재청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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