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신광면사무소에 있는 비석(국보)이다. 삼국시대 신라지배층이 포항 냉수리 지역 호족의 재물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명령을 내린 비석이다. 1989년 마을 주민이 밭에서 발견되었다. 비석은 사다리꼴 형태의 자연석에 앞.뒷면과 윗면에 총 23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글자가 거의 닳지 않아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글자는 해서체로 보이며 비석의 형태나 글씨체 등은 중원고구려비(국보)와 울진 봉평신라비(국보)와 비슷하다. 비문에 내용에 따르면 당시 지배귀족이 논의를 통해 명령을 결정하였으며,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낸 뒤,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오늘날 판례에 해당하는 내용을 널리 공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는 ‘계미’라는 글자와 ‘갈문왕’이라는 글자가 있어 443년 또는 50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6세기 신라에서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금석문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돌에 글자를 새긴 비문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비문의 내용들은 오늘날 판례에 해당하는 나라의 법 시행, 국왕의 지방 순시, 댐과 성을 만든 과정과 책임 소재 등 공식적인 일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비석들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산성이나 댐의 주변, 성벽, 교통로 등에 세워졌다. 이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안을 돌에 새겨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이를 영구히 보존해야하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 앞면)>
포항 지역 호족의 재산권 관련 분쟁을 해결한 내용을 새긴 비석으로 가장 오래된 신라 비석 중 하나이다. 글자는 비석의 앞면, 윗면, 뒷면에 새겼다.
<글자>
글자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대부분의 글자가 육안으로 읽을 수 있다. 글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는데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특징도 많이 남아 있다.
<글자가 새겨진 윗면>
<뒷면>
돌을 다듬지 않은 상태에서 글자를 새겨놓고 있다.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옆면>
<반대쪽 옆면>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각>
비석은 1989년 밭에서 농민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원래의 위치는 아니라고 한다.
<비석이 있는 포항시 신광면사무소>
영일 냉수리 신라비, 국보,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이 비는 1989년 3월 신광면 냉수2리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존하는 신라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건립 연대는 계미년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눌지왕 27년(443) 혹은 지증왕 4년(503)으로 보는 두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진이마촌의 절거리라는 인물이 소유했던 재물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하자, 갈문왕을 비롯한 중앙의 귀족들이 합의하여 분쟁을 해소하였다는 것이 비문의 주된 내용이다.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10여자 정도는 정밀한 판독이 요청되고 있다. 전체적인 모양이 아래 부분은 넓고, 위로 가면서 너비가 줄어드는 사다리꼴 모양의 사각형으로 이 비는 앞면.뒷면.윗면 등 3면에 글자가 새겨진 특이한 형태로 앞면에 12행 152자, 뒷면에 7행 59자, 윗면에 5행 20자로 도합 231자가 판독되고 있다. 글씨는 예서체로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4부분으로 울진봉평신라비와 연관된 내용을 담고 있어, 5~6세기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 포항시청, 2017년)
<출처>
- 포항시청
- 문화재청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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