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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홍주읍성 (사적), 구한말 크게 보수한 읍성

충남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홍주읍성(사적)이다. 옛 홍주목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으로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왜구의 침입이 대비하여 전국적으로 읍성을 쌓기 시작했던 세종때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읍성은 구한말인 고종때 홍주목사 한응필이 크게 보수하였으며, 일본에 대항한 큰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의 전투결과 및 일본인들로 인해 훼손되기는 했지만 홍주목 관아, 성문 등과 함께 옛 읍성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홍주읍성은 둘레 약 1.5 km에 달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읍성이다. 사대문을 두고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인 조양문과 남문인 홍화문이 복원되어 있다. 읍성내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관아 건물이 35동이나 있었으나, 지금은 홍성군청에 홍주아문과 동헌인 안회당이 남아 있다. 구한말에 증축한 이 읍성은 조선의 축성기술이 동원된 마지막 성곽으로 상당히 정성을 들여서 쌓았다. 이는 당시에 출몰했던 외국선박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크게 보수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집권자인 대원군이 직접 휘호를 써서 홍주아문 현판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홍성 홍주읍성(사적)>

구한말 외국선박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크게 수리한 것으로 구한말 성곽 축성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큰 전쟁이 없어서 그런지 축성기술이 이전에 비해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홍주읍성 동문에 해당하는 조양문>

읍성 성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문이다.

<홍주읍성(위성사진)>

충남 서해안 곡창지대인 내포평야의 중심지역으로 홍주목 관아가 있던 읍치였다. 서해안 천수만에서 20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포평야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충영병영이 설치되었던 해미읍성과 함께 서행안을 통해 들어오는 왜구의 침임에 대응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읍성 배치도>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방어시설로 치성을 여러곳 두고 있다. 일제감점기 서문과 북문, 그 주위 성벽들은 없어지고 동문인 조양문과 홍주목 관아가 있던 남쪽편 성벽만 남아있다.

<성벽 석축>

성벽은 높이 약 3.3 m 정도이며, 안쪽에 토축을 쌓고 바깥쪽에는 돌로 쌓은 석축성이다. 석축을 쌓은 돌은 가공해서 일정한 규격을 갖추고 있는 부분도 있고,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부분도 섞여 있다. 곳곳에 근래에 들어서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동문과 남문 중간쯤에 위치한 치성>

<치성과 남문 사이의 성벽>

남쪽은 평지에 비해 지대가 약간 높은 언덕에 성벽을 쌓았다.

<홍주성 남문>

2010년 발굴과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문루가 있는 개거식 성문을 복원해 놓았다.

<남문 안쪽에 있는 홍주성 수성비(오른쪽에서 2번째)와 공덕비들>

1824년(순조 24년) 홍주성 보수가 완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원 비석이다.

홍주성 수성비,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이 비는 1824년(순조24) 황폐된 홍주성 보수를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본래 홍성읍 고암리에 있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성의 축조과정을 알 수가 있다. 홍주는 지역이 바닷가에 있어서 서울의 서남쪽 방비를 위한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나 이 성이 부수어져 1823년(순조23) 봄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이 성을 수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 그리하여 완공된 성의 규모는 7리이고 일을 한 날이 100여일 이었다. 비의 뒷면에는 성쌓기 작업을 주도하고 감독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안내문, 홍성군청, 2010년)

<남문 서쪽편 성벽>

<안쪽에서 본 모습>

조선후기 성곽에는 대부분 조총과 화포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여장을 쌓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에는 여장을 설치되어 있지 않다.

<읍성 남쪽 성벽>

<읍성 남서쪽 성벽>

<안쪽에서 본 남서쪽 성벽>

읍성 남서쪽에는 홍주목 관아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출입문을 두고 있지 않았다. 일제강점이 이후 성벽을 끊어 길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홍주읍성 남문 안쪽 공원>

<읍성 남서쪽 성벽>

<안쪽에서 본 모습>

안쪽에는 홍주목 관아 건물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홍성군청을 비롯하여 관청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담장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 안쪽으로 보이는 옛 홍주목 관아>

동헌 건물과 후원이었던 여하정이 남아 있다.

홍성 홍주읍성, 사적,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최초 축성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했던 해풍현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며 규모는 1,300척의 토성으로 400개의 성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 확장을 하였고 조선시대 고종7년(1870) 홍주목사 한응필이 연봉금 3천냥과 원납금, 지세부과금으로 석성을 개척하여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하여 석축하면서 650개의 첩과 130개의 치, 2개의 곡성, 4곳의 우물과 연못을 신설한 다음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동편 수문을 거쳐 남문천과 금마천으로 흐르게 하고 동서북에 문을 세우고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으로 하였다. 같은 해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였다. 그 후 홍성지방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훼절하고 성곽곳곳을 철거하려던 것을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하였다. 홍주성은 최장 1,772 m에 달아였으나 810 m만 현존하며 성내에는 관아건물이 35동에 이르렀으나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만이 남아 있다. 1978년 10월 7일 강도 5도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주변 가옥 64동 철거와 토지를 매입하여 주변정비 및 성곽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홍성군청, 2010년)

<출처>

  1. 홍성군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4.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