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무덤(사적)이다. 현충사에서 북쪽으로 6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성역화되었던 무덤답게 울창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왕릉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무덤 앞에는 혼유석과 향로석을 비롯하여 다양한 석물들이 놓여 있어 이충무공 무덤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 아래에는 정조가 직접 글을 지은 어제신도비가 있으며 묘역 입구에도 숙종 때 세워진 신도비가 있다.
1598년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고금도에 모셔졌다가 이듬해 아산신 음봉면 금성산에 모셔졌다. 16년 뒤인 1614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하지만 이충무공 후손이 크게 번창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흔히 말하는 명당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무덤(사적)>
<묘역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이순신 장군 무덤>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봉분에는 둘레석을 사용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혼유석을 비롯하여 다양한 석물이 놓여져 있다.
<무덤 둘레석에 새겨진 글자>
<무덤 앞에 놓여진 석물>
<무덤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소나무숲>
무덤 주위에 심어진 소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왕릉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무덤 아래에 세워져 있는 어제신도비 (御製神道碑)>
정조가 친히 비명을 지어 세워진 것이다.
<신도비에 새겨진 글자>
어제신도비는 충무공의 공로를 치하하여 정조대왕이 친히 비명을 지어 정조 18년(1794년) 10월 4일에 세워진 비로써 이충무공묘소 아래에 있다. 어제신도비의 글씨는 중국 안진경의 묘에서 집자(集字)하여 새기고 호남의 도백 이형원에게 명하여 돌을 캐내 비로 사용토록한 기록이 정조실록에 보인다. (안내문, 현충사관리소, 2009년)
<홍살문 옆에 있는 연못>
이충무공묘, 사적,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에서 출생하셨으며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 통제사로서 거북선을 창제하여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앞바다와 부산, 명량, 고금도 등 해전에서 왜선 수백척과 왜병 수만명을 무찔러 나라와 겨레를 구하셨다. 이 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적군을 추격 중 적의 유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1598년 12월 16일 남해 해상 관음포에서 전사하셨다. 장군의 묘소는 처음 아산군 금성산에 모셨다가 16년후인 광해6년 (1614)에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안내문, 현충사관리소, 2009)
<묘역 입구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는 이충무공신도비>
<신도비에 새겨진 글>
이 신도비는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대동법을 추진했던 김육이 비문을 지었다.
거북 등위에 세워져 있는 충무공신도비는 공의 외손자 홍우기(洪宇紀)의 청으로 효종 때 영의정 김육이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다. 비가 완성된 것은 현종1년(1660년)이나 김육이 죽은지 35년만인 숙종19년(1693년)에 세워졌다. (안내문, 현충사관리소, 2009년)
<이충무공 신도비 옆에 서 있는 충무공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
이인좌의 난으로 순절한 충무공의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는 충무공신도비 바로 옆에 있으며 이 자리 위에 있던 충민공의 묘는 1910년 영인면 아산리로 이장하고 신도비만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재(李縡)가 비문을 지었다. (안내문, 현충사관리소, 2009년)
<출처>
- 현충사관리소
- 문화재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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