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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현충사, 이충무공 유허(사적)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현충사라 불리는 이충무공 유허(사적)이다. 이충무공 유적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곳으로 젊은 시절 살았던 집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이충무공을 모신 사당인 현충사, 이충무공이 결혼한 이후 살았던 고택, 활을 쏘고 무예를 단련하던 활터, 셋째 아들 이면 공의 무덤 등이 있다. 이충무공의 무덤은 이곳에서 9 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위치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난중일기(국보)를 비롯하여 이충무공과 관련된 많은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현충사는 숙종 때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자 서원의 이름으로 숙종이 직접 이름을 지어 내렸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32년 사당이 중건되었으며, 1967년 국가적인 차원에서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영정이 모셔진 사당 앞에 서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운 편이다. 이충무공 유적지로서 성역화된 이후 꾸준히 가꾸어 왔기 때문에 수목이 우거지고 조경이 아주 잘 꾸며져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한곳이다.

<아산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67년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새로 지은 곳이다. 원래 있던 구본전은 아래쪽으로 옮겼다.

<현충사 정문>

현충사는 이충무공이 젊은 시절 살았던 곳으로 후손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 왔으며, 숙종 때 현충사라는 서원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현충사 충무문을 지나서 사당인 본전으로 들어가는 길>

1967년 이후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정원을 꽤 아름답게 꾸며놓고 있다. 아주 넓는 길이 충무공 영정을 모신 현충사까지 뚫려 있다. ㅎ

<큰길 옆 옛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던 정려(旌閭)>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앞에 그 훈공을 액자에 새겨놓고 길이 사표로 삼는 것이다. 이곳에는 이충무공 집안에서 받은 5개의 정려가 걸려 있다.

<이곳에 걸려 있는 정려 중 충숙공 이홍무의 정려>

  1. 충무공 이순신
  2. 강민공 이완: 완은 충무공의 조카로서 임진란 때에 충무공의 막하에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임진란이 끝난 다음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충청병사 의주부윤을 지낸 후 정묘호란 때 청군에게 패하게 되자 몸을 불속에 던져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리고 강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3. 충숙공 이홍무: 충무공의 사대손으로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조카인 충청병사 봉상과 함께 싸우다 옥중에 갇혀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장렬한 죽음을 택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이조판서의 벼슬과 함께 충숙공의 시호를 내렸다.
  4. 충민공 이봉상: 충무공의 5대손으로 27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한성부 우윤, 형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이인좌의 난 때 난군의 급습을 받아 돌아가셨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좌찬성을 추증하고 충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5.  이제빈: 충무공의 8대손으로 어머니 임종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어머니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묘소에서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한 분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정려 뒷편에 있는 느티나무>

수령 300여 년 된 것으로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나무이다.

느티나무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300여 년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정자목으로 사용되던 나무이다. 나무높이 20 m, 나무둘레 480 cm, 수관폭 20 m로 넓은 그늘으르 제공하고 연못 옆에 위치하여 현충사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아산시에서 시보호목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자생수종으로 수명이 길고 수형이 단정하며 수관폭이 넓어 마을의 정자목으로 많이 심어지고 목재는 결이 아름답고 견고하여 좋은 건축, 가구재로 사용된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충무공 영정을 모신 현충사 본전으로 오르는 길>

<이충무공 영정을 모신 현충사 출입문인 충의문>

<충의문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이충무공 영정을 모신 사당인 현충사>

1970년대 지어진 앞면 5칸의 사당건물로 목조건축물을 모방한 콘크리이트 건물이다.

<현충사 내부>

이충무공 영정이 모셔져 있다.

<현충사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본전
이 본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32년 민족성금으로 중건된 구본전을 유물관 옆으로 이전하고 1967년 성역화 사업으로 새로이 건립한 것입니다. 묘소는 이곳에서 9 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아산시청, 2017년)

<현충사 아래 서쪽편에 위치한 구본전>

일제강점기에 중건된 사당 건물로 현충사를 성역화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구본전은 1704년 이충무공의 공덕을 길이 받들고저 아산 지방 선비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숙종 32년(1707)에 서원 형식의 사당을 세웠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현충사가 없어지게 되었으나 1932년 6월 5일 이충무공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민족성금으로 이 건물을 다시 세우게 되었으며, 1966년 4월 현충사 성역화 계획에 의해 본전이 새로 세워짐에 따라 1968년 9월 9일 지금의 위치에 원형대로 이전된 것이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구본전의 주련>

위당 정인보가 현충사를 중건할 때 쓴 글이다.

  • 一誓海山綱常於百代(일서해산입강상어백대): 바다와 산에 맹세하므로 강상을 후세에 이르도록 세웠으며
  • 再造乾坤無伐矜於當時(재조건곤무벌긍어당시): 천지를 구해냈으니 내세워 자랑함이 없었네

<왼쪽편 주련>

  • 成人取義精忠光於檀聖(성인취의정충광어단성): 인을 이루고 취하니 지극한 충성은 단군이래 빛나고
  • 補天欲日功德蓋於槿邦(보천욕일공덕개어근방): 크고 밝은 공덕은 온 나라를 덮었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이충무공 고택>

이 집은 이순신이 결혼 후 살았던 집으로 종택에 해당하는 집이다. 건물은 ‘ㄷ’자형 안채와 사랑채를 겸한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뒷편 언덕에는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종손들이 살아왔던 안채만 원래 있던 것이고 문간채는 새로 지은 건물이다.

<고택 옆 활터에 있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이충무공이 활을 쏘고 무예를 단련하던 활터>

활터
이 활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활을 쏘시던 장소로 남쪽에 있는 과녁과의 거리는 145 m입니다. 그리고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의 능선은 말을 달리던 곳으로 일명 치마장이라 부릅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여 년에 이르며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활터 뒷편>

이충무공 가족들이 묻혀 있는 무덤들이 있는데 그 중 이충무공 셋째 아들인 이면 공의 무덤이 잘 알려져 있다.

<활터 뒷편에 있는 무덤들>

<이면 공 무덤으로 오르는 계단>

이면 공 묘소
이곳은 충무공의 셋째 아들인 이면 공을 모신 묘소이다. 면은 1577년 아산에서 출생하고 어려서부터 인물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지혜와 용맹을 갖추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므로 충무공이 그지없이 사랑하던 아들이었다. 면은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집에 있다가 마을 안에서 분탕질을 하고 있는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니 그때 나이 21세 였다. 충무공은 아들의 슬픈 소식을 듣던 그날의 일기에 이같이 적으셨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은 이친대,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남달리 영특하므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는 것이냐?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이면 공 무덤>

아산 이충무공 유허, 사적 155호,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이곳 백암리 방화산 기슭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사시던 곳이다. 충무공이 순국하신지 108년이 지난 숙종 32년(1706) 이곳에 충무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께서 친히 현충사라 사액하였다. 그 뒤 200여년간 공을 추모하는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한동안 일제의 탄압으로 사당은 퇴락하였었다. 이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온 겨레의 정성으로 1932년에 사당을 중건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매년 4월 28일에 온 국민의 뜻으로 다시 탄신제전을 올려 공을 추모하여 왔다. 1966년에는 일생을 충의에 살고 나라를 구하신 높은 덕과 충성을 기려 이곳을 성역화하고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종합적인 조경공사는 1974년까지 꾀해졌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출처>

  1. 아산시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