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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선림원지, 통일신라말 크게 번창했던 선종계열 사찰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미천골에 있는 선림원지(禪林院址) 절터이다. 선림원은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가 창건한 화엄종계열 사찰이었으나 통일신라말 선종을 이끌었던 홍각선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종계열로 바뀐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대홍수 등으로 주요 건물들이 무너진 후 폐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터가 있는 골짜기를 ‘쌀을 씻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라는 의미로 미천골이라 부르는 것으로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선종을 일으킨 진전사와 함께 설악산의 맑은 산수와 동해바다가 가까이 있어 수행을 하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 선종계열 사찰로 번창한 것으로 보인다. 구룡령이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여행객들이 이 곳에 묵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림원은 큰 사찰이었지만, 자연재해로 폐사되어 옛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한 주불전 영역과 수행하던 승려들이 묵었던 건물터들이 확인되고 있는데 넓어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는 삼층석탑(보물)과 승탑(보물), 석등(보물), 홍각선사비(보물)들이 남아 있다. 1948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동종이 발견되었는데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린 후 일부 파편만 남아 춘천박물관 등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양양 미천골 선림원지>

통일신라말 선종계열 사찰로 번창했는데 절터의 규모는 크지 않다. 계곡 안쪽에 삼층석탑과 주불전이 있고, 바깥쪽에 승려들이 수행했던 요사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림원지 들어가는 길>

계곡 옆에 축대를 쌓고 절터를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산사태로 매몰되면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계단을 오르면 보이는 삼층석탑>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통일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다른 석탑과는 달리 윗층 기단에 팔부중상을 새겼으며, 사천왕상이나 십이지신상은 없다. 전체적인 비례는 양호하나 세부 조각수법은 떨어지는 편이다.

<삼층석탑 뒷편 건물터>

주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건물규모는 크지 않다.

<옆쪽에도 있는 큰 건물터>

강당인지 불전인지 그 용도는 알 수 없다.

<아래쪽 건물터>

아래쪽으로 승방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들이 있고, 뒷편에 홍각선사탑비와 석등이 남아 있다.

<절터 한쪽편에 남아 있는 홍각선사탑비(보물)와 석등(보물)>

<옆쪽에 있는 작은 건물터>

승방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각선사탑비(보물)>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비몸을 복원하였다. 홍각선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때 활동한 선종(禪宗) 계통의 승려이다. 그를 기리는 비석의 비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홍각선사 비편, 통일신라, 양양 선림원지>

통일신라 헌강왕 때의 고승인 홍각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신의 일부이다. 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현재 양양 선림원지에 남아 있다. 비면이 심하게 마멸되고 여러 곳이 깨져 있어 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홍각선사는 17세에 출가하여, 880년(헌강왕5)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출가전에 이미 경사에 능통했으며, 출가 후에는 불경을 깊이 연구하고 영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하였다. 수양이 깊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도를 구하였고 왕도 그의 덕을 흠모하여 궁궐로 청해 설법을 듣기도 하였다. 이 비는 886년(헌강왕12)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김원이 짓고 승려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고 한다. 글자는 2cm 정도 크기의 행서체로 통일신라 말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신라 전역에 보급되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12년)

<석등(보물)>

높이 2.95 m의 비교적 큰 석등이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체적인 비례나 세부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석등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선림원지 절터>

안쪽에 불전이, 바깥쪽에 크고 작은 승방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 뒷편에 있는 승탑>

<선림원지 승탑(보물)>

탑신은 없고 기단부만 남아 있지만 섬세하면서 입체감이 넘치는 조각수법과 독창적인 양식 등이 돋보인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승탑으로 전남지역에 남아 있는 여러 승탑의 제작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동종편, 통일신라, 양양 선림원지>

1948년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월정사에서 보관 중 한국전쟁 때 화재로 파손되었다.


<복원된 선림원지 종>

선림원지 종.
이 종은 1948년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에서 발견되어 월정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1950년 6.25전쟁으로 불에 타 잔편만이 남아 있다. 원래 크기는 전체 높이 122 cm, 입 지름 68 cm이다. 8세기 종에 비해 크기가 줄어들면서 종의 외형은 가늘고 길어졌다. 연곽 안에 장식된 9개씩의 연꽃봉오리는 나즈막하고, 화려한 당좌 좌우로는 2구1조로 된 주악상이 조각되었다. 몸 뒤로 피어오른 구름과 연화대좌에 앉아 횡적과 요고를 연주하는 모습으로서 정면관인 상원사종 주악상과 달리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결가부좌한 자세로 변화되었다. 머리 뒤로 흩날리는 천의자락도 훨씬 간략화되었으며 횡적을 부는 천인상은 같은 9세기의 실상사종과 거의 동일한 모습이다. 이 선림원지 종은 몸체 내부에 명문이 양각되어 있어 독특한데, 정원 20년인 통일신라 804년에 만들었고 종 주조에 관계된 시주자 명단 등을 통해 당시 관직명과 이두 등을 살펴 볼 수 있다. 비록 완형은 아니지만 통일신라 9세기 초의 귀중한 편년자료로서 새롭게 그 원형을 복원하게 된 의미깊은 작품이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12년)


<도깨비기와, 양양 선림원지, 통일신라>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로 통일신라 기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꽃무늬 수막새, 마루 수막새, 당초무늬 암막새, 양양 선림원지, 통일신라>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춘천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