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 있는 충주 고구려비(국보)이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비석이다. 원래부터 마을입구에 있었고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기때문에 민속신앙 의미를 갖는 선돌로 여겨졌는데, ‘예성문화연구회’라는 모임에서 답사차 이곳을 방문했다가 글자가 새겨진 것을 확인하고 학계에 알려 고구려비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비석에는 고구려 국호를 의미하는 ‘고려대왕(高麗大王)’를 비롯하여 고구려 관직이름과 광개토대왕비에 적힌 글자 등이 확인되면서 고구려비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비석에 적힌 글자의 내용으로 볼 때 장수왕이 남한강을 공략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 비석은 고구려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석으로 장수왕대에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유역을 장악했던 고구려의 영토를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충주 고구려비(국보)>
비석이 언제 세워졌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높이 203 cm, 폭 55 cm로 4면에 400여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가 백제를 몰아내고 한강유역을 장악했던 장수왕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정면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비석에 새겨진 글>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일반이 거의 알아보기 힘들다. 발견당시 마모가 심하여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으며, 현재까지도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없지만, 고구려의 국가명인 고려(高麗)라는 글자와 고구려 관직명 등이 적혀 있어, 고구려비임이 확인되고 있다. 비문에 내용에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을 있어 중원고구려비를 만들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했으며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부분>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비석이지만 일부는 일반인도 글씨를 알아 볼 수 있다.
<복제품>
비각 바깥에는 밝혀진 글자가 새겨진 비석(복제품)이 세워져 있어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비석에 적힌 글자와 번역한 내용>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마을 어귀에 서 있던 돌기둥이 고구려가 세운 비석임이 밝혀진것은 지금부터 30여년전인 1979년이다. 최근에 세워진 전시관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대로변 비각속에서 보관되고 있었다.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마을 어귀에 서 있던 돌기둥이 고구려가 세운 비석임이 밝혀진것은 지금부터 30여년전인 1979년이다. 최근에 세워진 전시관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대로변 비각속에서 보관되고 있었다.
<비각>
비석은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전시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고구려비가 발견된 충주 가금면 일대는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면, 서울로 연결되는 3번국도가 지나가는 육상교통로와 남한강 수운이 만나는 지역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고구려가 남한강을 장악하면서 백두대간을 넘기 위한 거점이 되었던 지역이자, 신라가 한강유역을 진출하는 교두보였던 곳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고구려가 쌓은 장미산성이 있고, 신라 진흥왕대에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귀족들을 이주시켰던 흔적인 누암리고분군과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중앙탑이라 불리는 탑평리칠층석탑,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는 탄금대 등이 있다.
<충주 고구려비가 있는 남한강변>
부근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신라의 영토임을 알려주는 듯한 충주 중앙탑(국보)이 자리하고 있고 뒷편 산으로는 삼국시대 고구려 산성이 장미산성이 있다. 이 지역이 삼국시대 한강유역 쟁탈에 있어서 중요했다는 것을 남아 있는 유적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장미산성>
충주고구려비가 있는 마을에서 멀지 않는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고구려가 쌓은 산성인 장미산성이 남아 있다.
충주고구려비, 국보,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선돌(마을 어귀에 서 있던 돌기둥)이 고구려비로 밝혀진 것은 1979년 예성문화연구회에 의해서이며,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현지조사하여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국내.외에 현존하는 고구려비는 현 길림성 집안시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 뿐인데, 이 비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이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 비는 마모된 부분이 많아서 전체 내용을 완벽하게 알아낼 수는 없지만, 삼국시대의 역사를 살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로 예서풍의 글씨를 4면에 모두 새긴 대략 400여자의 비로 추정된다. 주변은 남한강을 이용한 수로교통과 육로교통상 전략적 중요지점으로 장미산성과 봉황리 마애불장군의 존재, 노은면에서 고구려시대의 금동광배가 출토된 것 등으로 미루어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충주지역을 차지한 후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지역을 국원이라 이름한 뒤 장차 남방진출의 거점이 될 이곳에 기념비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출처>
-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