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한제국은 외국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 도입하였다. 사진은 새로운 시각매체로 각광을 받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문과 잡지는 그림과 사진을 넣어 새로운 정보와 지식 전달 수단이 되었다. 당시 미술가들은 새로운 사진술을 배우고, 신문이나 잡지의 삽화가로 변신하기도 했다. 전시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사신기술을 도입한 화가출신 지운영의 사진을 비롯하여 당시를 대표하는 사진들을 전시했다.
<민영환 초상입체사진(1904년)과 입체경>
러시아에 다녀온 지 8년 후, 민영환은 대한제국의 군부대신으로 임명된 뒤, 서구식 예복을 입고 굳건한 자세로 앉은 초상사진을 남겼다. 가슴에 단 훈장들은 그의 지위를 분명히 드러낸다. 사진 아래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입체사진 제작 회사인 “Underwood & Underwood. Publishers”, “Sum Sculpture Works and Studios”의 로고와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입체경으로 보기 위해 동일한 사진 2장을 나란히 붙여 제작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새로운 미술환경
개항 이후, 조선은 근대화를 위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외국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 도입하였습니다. 사진은 기록과 재현, 복제가 가능한 첨단의 시각매체로 각광받았고, 회화시장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양식 인쇄술로 등장한 신문과 잡지는 그림과 사진을 넣어 정보와 지식을 쏟아냈습니다. 이제 최신 문물에 민감했던 미술가들은 사진술을 배워 사진관을 차리고 신문이나 잡지의 삽화가로 변신하게 됩니다. 제작소에서 기계에 의해 대량생산된 공예품들은 전통의 미술공예시장을 점령해갔습니다. 이처럼 서울의 도시 공간은 ‘근대’와 ‘식민지’라는 큰 변수를 거치며 익숙한 옛 것과 낯선 것이 뒤섞여 급속하게 변해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민영환 초상사진, 조선 1896년, 고려대박물관>
조선말기 문신 민영환이 1896년 특명전권공사의 자격으로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사모와 관복을 착용했지만 러시아 황실로부터 받은 훈장을 왼쪽 가슴에 달고 어깨띠를 둘러 조선을 대표하는 관료임을 당당히 드러냈다. 사진 우측에 시를 적었는데, 이는 초상화에 찬문을 적는 전통적인 화면구성을 따른 것이다. 내용은 위풍당당한 사진의 모습과는 달리 열강들 사이에서 약소국의 지위를 절감했던 심정이 드러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초상사진, 천연당사진관, 1910년대 초, 한미사진미술관>
김규진(1868~1933년)이 1907년에 설립한 천연당사진관에서 촬영한 젊은 청년의 초상 사진이다. 천연당사진관의 등장으로 왕족을 비롯한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초상사진은 다양한 계층이 향유하는 문화가 되었다. 그는 대대적으로 신문 광고를 내면서 고객을 확보했고,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는 한 달 동안 천연당사진관에서 천여 명이 넘는 사람이 사진을 찍었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이홍경 초상사진, 경성사진관, 1926년, 한미사진미술관>
카메라를 향해 자연스럽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초상사진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1921년 부인사진관을 개설한 조선 최초의 여류 사진가 이홍경이다. 그녀는 1926년 근화여학교에서 처음 개설된 사진과의 초대 교사를 맡아 교육자로도 활동하여 대표적인 직업여성으로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인사동 경성사진관”이라는 문구와 “채상묵 심사제”라는 압인이 찍힌 것으로 보아 구한말 대표적 초상화가 채용신의 아들 채상묵의 경성사진관에서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기생사진, 도비사진관(부산), 대한제국 1903년, 한미사진미술관>
기생이 서화를 그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교양인이자 예술인으로서의 기생의 면모가 드러난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미인 사진이 유행하여 게이샤 사진이 상품으로 널리 유통되었는데, 이에 익숙했던 일본인들은 조선의 기생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유명 기생들의 사진은 우편엽서로 제작되어 상품과 수집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지운영 초상사진, 헤이무라 도큐베이 사진관(추정), 1833년 경, 한미사진미술관>
<지운영 초상사진, 헤이무라 도큐베이 사진관(추정), 1833년 경, 한미사진미술관>
조선말기 서화가이자 사진술 도입에 앞장섰던 지운영의 초상사진이다. 그는 1882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을 때, 고배의 헤이무라 도쿠베이(1850~1894)에게 사진술을 배웠다고 한다. 이 사진 모두 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장 중 한 장은 흑립을 쓰고 도포를 입은 모습인데, 남바위를 쓴 것으로 보아 겨울임을 알 수 있다. 공수 자세로 비스듬히 취한 모습은 우리의 전통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자세이다. 반면 또 다른 사진에서 지운영은 서양식 복식으로 한껏 멋을 냈다. 둥근 테가 달린 모자에 털 코트, 구두 등은 1880년대 영국 신사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패션이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 의자와 스탠드, 배경 등 스튜디오 공간 전체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기고, 지운영은 이전과 달리 자연스러운 자세로 당당히 서 있는 포즈를 취하였다. 익숙한 포즈에서 1884년 ‘촬영국’ 설힙 후 일본을 오가던 시기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가정잡지, 대한제국, 1908년, 종이에 인쇄>
신문과 만화
사진과 함께 도입된 새로운 문물 중 하나가 서양식 인쇄술이다. 기계식 출판물의 생산은 사진.삽화를 대량 유포할 수 있는 근대적 시각 환경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점차 신문매체에서도 삽화와 같은 시각 이미지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시사만화 형태의 삽화를 제작하여 계옹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신문과 더불어 각종 단행본과 잡지류가 발간되었는데, 새로운 감각의 표지 그림이나 서체, 장정 도안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대중 매체의 유형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서양화가 안석주(1901~1950년)는 조선일보, 시대일보, 신동아 등의 신문, 잡지에 글과 그림을 결합한 ‘만문만화’를 선보이면서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조선일보 1928년 2월5일자부터 시작한 『가상소견』연작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모던걸과 모던보이로 대표되는 이 시기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과 자본주의 도시로 변모하는 서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신문 만화들은 도시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모습들을 드러내 보인 시대의 기록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도화임본, 이도영(1884~1923년), 1916년, 종이에 인쇄, 국립중앙도서관>
도화임본은 1907년 학부에서 편찬한 최초의 국정 미술 교과서 중의 하나로 총 4권으로 발행되었다. 전시된 본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장정 도화임본』이다. 여기에 수록된 그림은 모두 108개인데, 대부분 서화가 이도명(1884~1933년)이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서화교육의 확산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모-던껄의 장신운동, 안석주, 조선일보, 1928.2.5.>
『가상소견』연작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모던걸과 모던보이로 대표되는 이 시기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과 자본주의 도시로 변모하는 서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모-던뽀이의 산보, 안석주, 조선일보, 1928.2.7>
<꼬리피는 공작, 조선일보,1928.2.9>
<위대한 사탄, 조선일보, 1928.2.10>
이왕직미술품 제작소 공예품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조선의 고유한 전통적 고예미술의 진작’을 위해 1908년 창립한 황실 직영의 한성미술품제작소로 시작되었다.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에 의해 ‘이왕직소관미술품제작소'(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변경되었고, 1922년 민간에게 매각된 후, 1936년 해체할 때까지는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여기서 제작한 공예품에는 황실의 표상인 이화무늬가 장식되었고, 기물바닥에 ‘美’라는 명문을 찍어 미술품제작소의 제작품임을 밝혔다. 일상 생활용기나 제기를 작게 만든 장식용 소품은 상품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또한 일본식 기형에 우리나라의 전통 문양을 장식하는 등 시장의 취향을 반영한 공예품이 주요 제작상품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이왕직소관미술품제작소 제작품목록, 1919년, 종이에 인쇄, 고궁박물관>
<은제 장식용 소품, 이왕직미술품제작소, 20세기 초>
<이화무늬 꽃병, 20세기 전반, 국립고궁박물관, 등록문화재>
<작(爵), 20세기 초>
<은제 주전자, 20세기 초, 고궁박물관>
<나전 칠 물가풍경무늬 반, 1915~1922년>
<백자 양각 장생무늬 합모양 문방구, 조선 19~20세기 초>
<‘광무육년’을 새긴 백자 문방구, 대한제국, 1902년>
분원에서 만들어진 백자 문방구로, 바닥의 명문을 통해 ‘광무6년(1902) 음력 5월 양근분원’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자 몸체에는 수파 위의 반룡, 삼태극무늬, 만자무늬, 매화와 대나무무늬, 모란과 월계화 등과 같이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국가의 위용과 재도약의 의지를 담은 여러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비원소’를 새긴 분청사기 찻그릇, 1918~1922년, 서대식 소장>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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