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도동서원(道東書院, 사적)이다. 조선중기 유학자 김굉필을 모신 서원으로 선조 때 인근 비슬산 자락에 처음 세워졌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604년 이곳으로 옮겨 중건하였다. 선조가 직접 ‘도동서원’이란 글자를 쓴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다. 숙종때 그의 학풍을 계승한 한강 정구가 이곳에 같이 모셔졌다. 전국 5대 서원으로 손꼽히며 구한말 서원훼철령에도 제외된 전국 47개 서원 중 한곳이다.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있으면서도 낙동강 너머로 마을과 농토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으로의 입지가 아주 좋은 곳으로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과 입지조건 측면에서 같은 맥락을 하고 있다. 건물은 경사진 지형에 수월루, 환주문, 중정당, 사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흙과 기와로 쌓은 담장이 강당,사당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김굉필(1454~1504년)은 조선전기 성리학자로 사림세력의 태두라 할 수 있는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우고, 조광조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김종직->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로 이어지는 정통 성리학을 계승한 유학자로서 후대에 많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를 모시는 서원으로는 아산의 인산서원, 희천의 상현서원, 순천의 옥천서원, 달성의 도동 서원 등이 있다고 한다.
<달성 도동서원(사적)>
전국 5대 서원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낙동강과 주변 경치가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도동서원 출입문인 수월루>
앞면 3칸의 2층 문루로 서원을 찾은 손님들과 함께 낙동강 경치를 감상하면서 풍류를 즐기던 공간으로 보인다. 수월루 주위에 선비들이 좋아했던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강학공간 출입문인 환주문>
강당에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게 출입문을 작게 만들었다. 양쪽으로 기와와 흙을 쌓아서 만든 아름다운 담장이 있다.
<강학공간 중심건물인 중정당>
앞면5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서원건축물 중 하나이다. 건물은 잘 다듬은 화강석 석재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에는 4개의 용머리로 장식하고 있는데 서원 앞 낙동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도록 하는 바램을 담고 있다.
<건물 기단>
<강당 대청마루 내부>
‘도동서원’이라 적힌 현판은 명필로 손꼽히는 선조가 직접 써서 내렸다고 한다.
<강당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강학공간 앞 담장과 출입문이 경관을 가리지 않도로 하고 있다. 기와와 흙으로 쌓고 수막새로 장식한 담장이 주위 경관과 어울려 좋은 경관을 만들고 있다.
<유생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는 동재인 거인재>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온돌발 2칸과 마루로 되어 있다.
<맞은편 서재인 거의재>
<거의재 안쪽에 있는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
강학영역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정면에 보이는 중정당이 원장과 유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인데, 그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쪽 기숙사 ‘거인재’와 서쪽 기숙사 ‘거의재’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또한 강당의 정면 기단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와 다람쥐 모양의 동물이 장식되어 있다. 이 4개의 용머리는 서원 앞 낙동강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한 비보책으로 물의 신 ‘용’을 상징한다. 그리고 강당 주위 담장은 흙과 기와를 쌓은 맞담으로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답다. 장판각은 유물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안내문, 달성군청, 2011년)
<제향공간>
강당 뒷편에는 사당이 있는 제향공간은 축대를 쌓아 조성했다. 축대에는 다양한 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 놓았다.
<사당을 오르는 계단>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사당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사당에는 김굉필과 그의 학풍을 계승한 정구가 모셔져 있다. 안쪽에도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사당>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인 전사청>
원래 전사청은 제기 등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이고,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은 고직사라고 하는데, 도동서원에서는 한 건물에서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마당에 있는 곳간채>
흙담에 기와를 얹어놓은 건물이다.
<전사청을 출입하는 문간채>
<바깥에서 본 전사청 문간채>
<도동서원 앞에 심어진 은행나무>
임진왜란 직후 도동서원을 중건할 때 심은 것으로 ‘김굉필나무’로 불린다. 한그루의 나무이지만 가지가 울창해서 숲처럼 보인다.
김굉필 나무
김굉필은 조선 전기 성리학자로서 벼슬길보다는 학문과 교육에 치중하여 성리학과 사림 정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하여 광해군 2년(1610)에는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동방오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김굉필의 외증손 한강 정구가 도동서원 건립을 기념해 심어서 ‘김굉필 나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나무는 도동서원 앞을 돌아 흐르는 낙동강을 굽어보며 서 있는데, 높이가 25 m, 줄기 둘레가 8.7 m이다. 잎이 무성하고 가지가 많이 벌어져 있어서 이 나무를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숲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달성군청, 2011년)
<도동서원을 오가는 버스>
<도동서원 앞을 휘감으면서 흐르는 낙동강>
<다림재에서 내려다 보이는 도동서원 주변>
달성 도동서원(사적)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유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 중 하나이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보존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서원은 선조1년(1568)에 쌍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현풍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선조 37년(1604)에 보로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지금 이 자라에 옮겨 다시 세웠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도동’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 아래 외삼문과 환주문을 지나면 강당인 중정당과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중정당 오른쪽 건물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전사청이고, 왼쪽 뒤편의 건물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이다. 중정당 뒤편에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이 있으며, 내삼문 오른쪽에는 제기를 보관하는 증반소가 있다. 도동서원은 수월루에서 높은 곳을 따라 환주문.중정당.사당을 일직선상에 두어 앞에는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영역,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 구조이다. 또한 흙과 기와로 쌓아 만든 담장을 둘러서 검소하고 단아하면서도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안내문, 달성군청, 2011년)
<출처>
- 안내문, 달성군청, 2011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 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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