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에 있는 김성규가옥이다. 이 집은 독립운동가 김성규가 살았던 집으로 시인 조지훈의 처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분가하면서 지어진 집으로 홍수 피해을 입어 폐가가 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 평면배치를 하고 있는 전통적인 경북북부지방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다. 마을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지금은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영주 무섬마을은 17세기 중엽이후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마을은 삼면이 내성천에 접해 있어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의미로 무섬마을이라 불린다. 마을에는 해우당고택을 비롯하여 규모가 큰 저택을 비롯하여 까치구멍집, 겹집 등 다양한 형태의 한옥들이 남아 있다.
<영주 무섬마을 입구에 있는 김성규가옥>
시인 조지훈의 처가였던 곳으로 지금은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채>
사랑채는 앞면 3칸 규모로 사랑마루 1칸, 온돌방 2칸으로 되어 있다.
<안마당을 출입하는 중문>
<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안마당>
공간이 넓지는 않다.
<안마당에서 보이는 중문과 사랑방 출입문>
김성규 가옥(조지훈 처가)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인 양선 김성규(1904~1946년)의 가옥이 있던 자리에 복원 해 놓은 것이다. 김성규는 무섬마을의 만운고택에서 김휘걸의 차남으로 태어나 장남인 김호규와 각별한 우애를 나누며 같은 울타리 안에 집 두채를 지어 함께 살았는데, 큰 수해와 풍화를 겪으면서 폐옥이 되어 빈터로 남아 있던 중, 1999년 무섬마을이 경북북부 유교문화권사업 대상지역으로 지정되어 김성규 옛 가옥이 다시 복원되었다. 김성규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한 후 서울 중동중학교 본과에서 신학문을 배운 선비로서 일제 강점기에 김화진 등 마을 유지와 함께 무섬마을에 아도서숙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에 힘쓰는 한편 신간회 영주지회 집행위원.총무간사와 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을 맡아 지역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8월 일경에 체포되어 금고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청록파 시인이자 국학자인 조지훈은 김성규의 장녀인 김위남과 결혼하여 신혼초에 자주 이 집에 머물렀으며 그 무렵에 이 마을을 배경으로 남긴 시가 바로 「별리」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8년)
<출처>
-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