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이다.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세웠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국왕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현판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원은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중국 당나라 때 집현전서원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답게 건물이 크고 그 숫자다 많은 편이다. 경사진 언덕에 계단식으로 강학공간과 제향향공간이 배치되는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죽계천변에 옛 절터에 여러 건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강학공간을 동쪽에, 제향공간을 서쪽에 두고 있는 동학서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원의 중심에는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걸린 강학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유생들이 공부하는 직방재와 일신재, 학구재, 지락재와 서고, 전사청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안향 등 을 모신 사당인 문성공묘가 배치되어 있다.
<영주 소수서원(사적)>
숙수사란 사찰이 있던 곳에 강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다른 서원에 비해 유행들이 머물렀던 기숙사 건물이 크고 많은 편이다.
소수서원 들어가는 길
소수서원은 안향이 머물렀던 숙수사란 절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동쪽으로 죽계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나즈막한 언덕이 있으며, 학자수라 불리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솔밭길에는 절터임을 말해주는 당간지주를 볼 수 있으며, 죽계천 너머로 옛사람들이 쉬었던 취한대란 작은 정자가 있다.
<소수서원 입구>
<소나무숲>
소수서원 서쪽 낮은 둔덕에는 학자수라 불리는 울창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서원 동쪽으로 흐르는 죽계천>
고려말 유학자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이 되는 하천이다.
<죽계천 옆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취한대>
<소수서원 출입문>
후대 서원과는 달리 솟을삼문이나 문루를 사용하고 있지 않고 작은 협문을 두고 있다. 그 앞에은 제사에 올리던 제물을 잡던 성생단이 있다.
진입영역
서원 왼편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이라 한다. 영귀봉 주변으로 수백년 된 적송이 장관인데,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자수라 불리기도 한다. 보기에도 멋진 소나무 숲은 서원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영귀봉 위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던 소혼대가 있다. 서원 정문인 지도문 앞 잔듸 제단은 성생단이다. 매년 봄, 가을에 안향 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이다. 지도문 오른쪽 경령점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 하던 곳으로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 경렴정에는 스승인 퇴계 이황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초서의 대가 고산 황기로의 현판이 남아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강학공간
소수서원은 후학양성을 위해 세워진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강당 건물인 강학당(보물 1403호)를 중심으로 여러동의 건물들을 두고 있다. 유생들이 머물렀던 기숙사는 3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문의 단계에 따라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있으며, 평상시 많은 유생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강학공간 한쪽편에는 도서관 격인 장서각이 있다.
<강학당(보물)>
강학공간의 중심 건물인 강학당(보물)이다. 앞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궁궐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겹처마를 사용하고 있다. 내부에 명종이 친필로 ‘소수서원’이라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퇴계 이황의 건의로 국왕으로 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강학당 내부>
<지락당>
유생들이 머무는 기숙사 중 가장 낮은 단계인 지락당은 앞면 3칸 건물로 온돌방 1칸, 마루 2칸으로 되어 있다. 두번째 단계인 학구재는 앞면 3칸짜리 건물로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 1칸씩이 있다.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
3번째와 4번째 단계 유생들이 머무는 일신재와 직방재이다. 앞면 6칸으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
<서적과 목판을 보관하던 장서각>
<일영대>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자연속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 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강학영역
서원은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앞의 제일 큰 건물이 강학당(보물 1403호)이고, 오른쪽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지락재와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위치한다. 강학당 왼쪽으로 장서각이 있다. 건물배치는 하학상달,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한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인재가 4,000여명에 달한다. 1543년에 건립된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임금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있으며,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장서각은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제향공간
소수서원은 고려 때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제향공간에는 사당인 문성공묘(보물 1402호)과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는데 후대 서원과는 달리 그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반면에 사당을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르고 있다. 사당 뒷편에는 안향초상(국보 111호)와 주세붕초상(보물 717호)를 모시기 위한 건물인 영정각을 두고 있다.
<서원 동쪽편에 위치한 사당인 문성공묘(보물)>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도 소박하며 공간도 넓게 쓰고 있지 않다.
<사당 뒷편에 있는 전사청>
<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영정각>
영정각은 1970년대에 세워진 건물이다.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부분 석재 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들이다.
<정료대와 관세대>
제향영역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문성공묘(보물 1402호)와 전사청, 영정각 등의 건물이 있다. 문성공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회헌 안양의 위패를 모신 사묘로 1542년 주세붕이 세웠다. 문성공묘를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른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매년 봄, 가을로 두 번의 제사를 지낸다. 문성공묘 뒤편에 있는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전당후묘라 하여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데 서쪽방향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에 따라 강학공간 측면 서쪽에 제향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이다.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도 특이한 일로 안향초상(국보 111호)과 주세붕초상(보물 717호) 등 보물급 영정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특별히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서원 뒷편에 있는 사료관>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회헌 안양의 위패를 모신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후에 퇴계 이황이 명종임금께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받았다. 서원은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학당을 중심으로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 직방재 등의 건물이 있고 제향공간에는 문성공묘, 전사청, 영정각 등이 있다. 소수서원은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다. 서원 안팎으로 당간지주 등 숙수사 유적이 남아 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출처>
-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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