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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신라실] 신라의 불교, 각지로 퍼져가는 신라문물

6세기 신라는 대내적으로는 율령을 정비하고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군사적으로도 강성해지면서 가야연맹체를 복속시키고, 한강유역을 장악하게된다. 신라가 점령한 지역에는 교통로를 따라 산성과 돌방무덤이 만들어졌다. 돌방무덤에서 나온 신라토기는 이전에 비해 모양이 단순해지고 굽다리가 짧아지는 등 신라토기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또한 신라 지방관의 관복을 장식하던 허리띠가 각 지역에서 출토되어 신라가 지방통치 방식을 간접적으로 설펴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신라는 율령의 정비와 함께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사상인 불교를 받아들여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불교가 받아들여진 이후 신라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대표적인 현상이 크고 화려한 고분을 조성하는 대신에 전국적으로 불교 사찰을 건축하게 되었다.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는 경주의 신성한 천경림을 베어낸 자리에 세웠는데, 귀족들의 반대로 이차돈의 순교 이후 진흥왕 때에 완성되었으며,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는 선덕여왕 때 궁궐이 들어설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본(本), 강원동해 추암동, 부(夫), 경북 상주 청리

생(生), 경남 양산 하북정, 대간(大干), 경남 창녕 계성

굽다리접시, 삼국시대(신라)

굽다리접시, 삼국시대(신라)

허리띠장식, 청동, 삼국시대(신라) 7세기, 상주 청리,

신라는 지방통치와 관련하여 허리띠 장식의 모양도 동일하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법흥왕 7년(520) 관리이 관복을 정한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지방으로 퍼져가는 신라의 문물
신라는 6세기대에 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정복지에 비석을 세워 신라의 영역을 표시하였다. 신라가 점령한 지역엔느 주민들이 삼년에 걸쳐 쌓았다는 삼년산성같은 산성과 더불어 신라식 돌방무덤이 만들어졌다. 무덤 입구에서 보아 무덤길이 왼쪽이나 가운데에 있는 신라식 돌방무덤에는 굽다리가 짧고 새긴무늬와 찍은 무늬가 베풀어진 간단한 형태의 토기가 묻혔다. 또한 다양한 모양의 5세기대 허리띠는 버섯모양 띠고리와 하트모양 띠꾸미개로 구성된 간단한 모양으로 변하여 신라의 지방에서는 동일한 모양의 허리띠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허리띠는 ‘누암리형 허리띠’라고 불리며, 법흥왕 7년(520) 관리의 관복을 정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원통형 토제품, 삼국시대(신라), 경주 손곡동.물천리, 두들개, 삼국시대(신라), 경주 화산리,

토기를 만들 때 안쪽에 두들개를 대고 토기 표면을 다듬을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거푸집, 삼국시대(신라), 경주 황성동,

쇠도끼와 같은 쇠제품을 만들 때 사용한 거푸집이다. 도가니에 담겨진 쇳물을 부어 넣는 입구도 확인된다.

청동그릇 거푸집, 도가니, 

청동그릇 거푸집, 삼국시대(신라), 경주 동천동, 여러가지 금속제품을 만들 때 사용한 거푸집이다. 형태로 보아 청동완과 같은 그릇을 만들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도가니, 삼국시대(신라), 경주 동천동, 금속제품을 만들 때 쇳물을 담는 그릇으로, 도가니에 담은 쇳물을 조심스럽게 거푸집 속으로 부어 넣는데 사용한다. <출처:중앙박물관>

굽다리편, 삼국시대(신라), 경주 손곡동.물천리, 토기가마에서 나온 불량품이다. 굽다리접시를 서로 겹쳐서 구웠는데, 잘못 되어 서로 붙어버린 채 토기 가마에서 확인된 것이다. 토기받침, 삼국시대(신라)

토기받침, 삼국시대(신라), 경주 손곡동.물천리,

토기가마에서 토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것이다. 토기를 겹겹이 쌓기 전에 토기 사이에 끼워넣어 토기들이 서로 붙지 않도록 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각지로 퍼져가는 신라 문물
6세기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면서 신라문화는 낙동강.한강 등을 따라 퍼져 나갔다. 신라가 점령한 지역에는 교통로를 따라 산성과 돌방무덤이 만들어졌다. 돌방무덤에서 나온 신라토기도 이전과 달리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는데, 모양이 단순해지고 굽다리가 짧아지며 새긴무늬와 찍은 무늬가 베풀어진다. 또한 새로이 신라로 들어온 지방에서는 버섯모양 띠고리와 하트모양 띠꾸미개로 구성된 간단한 모양의 허리띠가 등장한다. 이는 신라 지방관의 관복을 장식하던 허리띠로서, 신라가 정복한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렸음을 알게 한다. 이제 신라는 이전과 같이 정복한 지역에서 물자를 빼앗아 오던 단계에서 벗어나 정복지를 신라의 지방으로 인식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절터에서 출토된 수막새

연꽃보상화무늬수막새, 새무늬 암막새, 남북국시대(통일신라), 경주 분황사

연꽃무늬 수막새, 삼국시대(신라),

신라의 연꽃무늬수막새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 연꽃무늬의 중앙에 1조의 능선이 있으며, 볼륨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홑잎(단판문:1장의 연꽃잎)이 특징이다.

1.경주 황룡사터,

2.경주 흥륜사터,

3.경주 영묘사터,

4.경주 월성

불교와 사찰건축
불교가 공인된 이후 신라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는데, 주로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전통 신앙이 이루어진 장소에 세워졌다.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는 신성한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낸 곳에 세웠으며,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는 원래 궁궐이 만들어진 장소에 건립되었다. 사찰은 전통 신앙을 대신하여 신라인이 부처님을 숭배하고 의식을 행하는 장소였으므로 국가에서 주도하고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주 지역 돌방무덤은 무덤길이 중앙 또는 좌측에 있고 높이가 30cm 이상인 주검받침이 있다. 나무널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머리고임, 발받침 등을 사용하였다. 이전 시기의 무덤과 달리 여러 번 걸쳐 시신을 묻는 가족장이다.

1.항아리, 2.수키와, 삼국시대(신라) 경주 동천동 와총

뚜껑합, 삼국시대(신라),

1.경주 용강동 돌방무덤,

2.경주 서악동 돌방무덤

경주의 돌방무덤
돌방무덤(石室墓)은 무덤방에 문이 달려 있는 구조로서, 여러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시신을 묻을 수 있어 가족의 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전 시기에 하나의 무덤에 한 사람만 묻는 돌덧널무덤(石槨墓)이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과 다른 형태로 가문이나 가족에 대한 관념의 발달과 관계가 있다. 신라의 돌방무덤은 5세기 후반에 지방에서 먼저 등장하고 왕경인 경주에 전해져 중앙 귀족들의 새로운 무덤으로 정착하였다. 새로이 신라의 주된 무덤으로 발전한 돌방무덤은 신라의 영역 확장에 따라 전 신라 영토로 확산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뼈단지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하는 풍습이 유행하고 뼈를 화장한 후 그 가루를 담는 뼈단지도 함께 유행한다. 이중으로 만든 뼈단지로 뚜껑꼭지에서 짧은 굽에 이르기까지 빼곡하게 여러가지 도장무늬가 찍혀있다.

뼈단지, 삼국시대(신라), 경주 동천동 화장무덤

뼈단지
불교를 수용한 이후 불교식 장례풍습인 화장이 새롭게 시행되었다. 화장은 장례절차를 간소화시켰으며, 전통적으로 시신을 묻는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시신을 널에 모시고 덧널에 묻는 복잡한방식에서 벗어나, 화장한 인골을 담아 묻기 위하여 일상용의 토기와 다른 화장무덤용 뼈단지를 제작하였다. 뼈단지는 뚜껑이 있는 모양이 많이 이용되었고, 다양한 형태에 화려한 무늬로 꾸며진 전용뼈단지도 유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천년고도, 경주,

경주는 신라 천년왕국의 심장이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 작은 도시 경주에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경주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사라졌다. ‘고분의 나라’, ‘황금의 나라’, ‘불교의 나라’ 등 신라를 수식하는 많은 말들에서 ‘신라’는 바로 ‘경주’를 가리키고 있다. 현재도 신라 천년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그곳, 바로 경주에서 우리는 비로소 신라에 대한 자그마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왕경의 도로,

왕경에 있는 궁궐과 집들은 남북으로 촘촘히 짜여진 도로망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경주 왕경의 도로는 대부분 6세기 중엽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5~10cm 정도의 자갈을 깐 후 점토와 사질토 등을 섞어서 도로면을 평탄하게 만들고 양쪽에 배수로를 두는 구조이다. 도로의 너비는 5~16m로 다양한 데 가장 규모가 큰 경우는 23.7m에 이르기도 한다. 도로면에서 확인되는 수레바퀴자국은 너비에 따라 크게 70~119cm과 160~200cm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이로 보아 신라 왕경의 도로는 여러 대의 수레가 동시에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큰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주 동천동 696-2번지 유적 남북도로유구 단면층위, 동천동 도로유구,

발굴조사에서 기반층과 다짐층 위에 있는 3개의 도로면이 확인되었다. 여러 층의 도로면이 확인되는 것은 도로가 한번 만들어진 다음 사람이나 소와 말, 수레가 다니면서 훼손된 도로면을 여러 차례 보수하였기 때문이다. 도로면은 굵은 자갈.점토.굵은 모래 등을 깔아 지반을 튼튼하게 한 다음 자갈을 포함한 흙으로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왕경의 정비
삼국통일 후에 신라는 수도 금성을 금경, 대경이라 부르고 지방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수도인 왕경을 지방과 구별하여 불렀으며, 도지 구조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갔다. 새로이 정비된 왕경을 둘러싸고 산성을 수축하여 왕경을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하였다. 신라 왕경의 정비는 5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이루어져 왔으며, 신라 도성의 형성과정은 경주분지 내 평지의 개발과 짝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경주분지 내외 왕경은 격자형 가로망을 질서정연하게 구획하여 방리를 설정하였고 각 방리는 도로를 통해 구획되었다. 왕경은 궁궐이 있던 월성을 중심으로 관아, 귀족의 저택인 금입택, 원기, 사찰 등을 배치하여 고대 도시를 완성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라 왕경
신라의 왕경王京인 경주는 원래 신라6부가 자리하던 곳으로, 지방도시인 소경小京과 비교하여 대경大京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6~7세기에 왕경에 살던 신라인들은 자신들을 신라6부의 주민으로 인식하여 지방에 살던 주민들과 구분하기도 하였다. 신라 왕경은 발굴조사를 통해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6세기 초반 바둑판 형태의 도로망 구축을 통한 도시계획을 시작하여, 8세기 경에는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최근 황룡사지 동쪽의 왕경유적에 대한 조사에서 왕내부의 가옥.담장.우물.배수구.도로 등이 확인되어 왕경의 구조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왕경의 구체적인 범위는 기록이 내용과 발굴 내용에 차이가 있어 정확한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도로유구의 조사 결과로 남북 6km, 동서 5.5km 내의 현 경주 시가지를 중심한 주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상
신라는 고구려.백제와 겨루거나 힘을 합치면서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 정세를 잘 이용하여 삼국통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신라는 독자적인 문화를 기반으로 선진 문화인 고구려.백제의 문화를 수용하고,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사상인 불교를 국가 통치의 이념으로 삼아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새로운 사상인 불교는 다방면에 걸쳐 신라사회에 영향을 끼쳤으며, 국가 불교로서 중앙과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불교는 단순한 종교 이상의 보편적, 국제적 문화로 신라가 새로운 나라로 도약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불교는 매장관념에도 영향을 미쳐 화장무덤인 뼈단지가 새로이 나타나고 돌방무덤도 널리 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