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보사찰로 불리는 송광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행도량으로 사찰 가람배치와 유물 등에서도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전각으로 전각으로 16국사를 모신 국사전(국보)와 작은 요사채인 하사당(보물)이 있으며, 유물로는 제2세 진각국사에게 내려진 공문서인 혜심고신재서(국보), 국사전에 모셔졌던 16국사 진영(보물 ) 등이 있다. 16국사는 고려중기 불교개혁운동인 정혜결사를 이끌었던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하여 고려말까지 국사를 지낸 16명의 승려를 말한다.
송광사 국사전과 16국사 진영
송광사 국사전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공민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처음에는 정면이 3칸인 건몰로서 15분의 초상화를 봉안하였으나 고봉화상(1428년 입적)을 추가로 모시면서 1칸을 증축하였다. 1971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에는 1501년 개창하고 1558년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722년과 1807년, 1918년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926년에는 석축을 고쳐 쌓았다. 이후 1962년, 1972년에 수리가 있었다. 내부에 모신 초상화들은 1780년에 다시 그린 것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1세 보조국사 지눌(1158 ~ 1210)>
국사는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성은 정씨고, 자호는 목우자이다. 8세 때 종휘선사에게 출가하였다. 길상사에서 정혜결사 운동을 하며 불교계의 중흥을 이끌었고, 산 이름을 조계산, 절 이름을 수선사로 고쳤다. 진영 상단에 ‘원력수행해동불일보조국사’라고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원력수생, 즉 대승보살행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하단의 화기를 통해 1780년 16국사의 진영을 완성하여 영당에 모셨음을 알 수 있다. 국사의 탑은 송광사 관음전 뒤에 모셔져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2세 진각국사 혜심(1178~ 1234)>
국사는 전남 화순 출신으로 성은 최씨이며, 자호는 무의자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나, 모친상으로 보조국사께 출가하여 제자가 되었다. 보조국사 이후 간화선을 강조하면서 수선사의 교세를 확장하였다. 국사의 탑은 송광사 광원암 뒤편에 모셔져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혜심고신재서, 국보, 고려 1215년>
고려 고종이 송광사의 제2세 국사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주로 국사의 학문과 덕망을 높이 찬양하는 내용으로 끝 부분에 관리의 수결이 있어 당시의 공문서나 명령서 양식을 알 수 있고, 고려시대의 선사.대선사제도를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3세 청진국사 몽여(? ~ 1252)>
국사의 자료가 전하지 않아 자세한 행장을 알기 어렵다. 1252년에 입적하였다. 왕이 시호로 청진국사를 추증하고, 송광사 청진암 남쪽 기슭에 탑을 세우고 적조지탑이라는 액호를 하사하였다. 국사의 탑은 송광사 율원 뒤편 산등성이에 모셔져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4세 진명국사 혼원(1191 ~ 1271)>
국사는 황해도 수안출신으로 성은 이씨이다. 쌍봉사의 청우스님을 모시고 수행하다가 뒤에 제2세 진각국사의 문하에 들어갔고, 제3세 청진국사의 지도를 받았다. 왕사로 책봉되어 호로 충경을 받았고, 탑호는 보광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5세 원오국사 천영(1215 ~ 1286)>
국사는 전북 남원군 출생으로 성은 양씨이다. 부는 양택준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렸으며, 15살에 제2세 진각국사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내전 및 외전에 두로 정통하였고, 보성 대원사와 고흥 불대사를 중창하였다. 국사의 탑은 보성 대원사에 모셔져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6세 원감국사 충지(1226 ~ 1293)>
국사는 전남 장흥 출신으로 성은 위씨이다. 어려서부터 출가를 원하였지만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장원급제 후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29세에 원오국사의 문하로 출가하였다. 국사의 탑은 송광사 동북쪽 산등성이에 모셔져 있다. 진여의 상단을 보면 자정국사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1678년 세워진 송광사사적비에 제7세 자정국사와 순서가 잘 못 기재 된 영향이다. 1920년대 「송광사사고」를 편찬하면서 잘못을 바로 잡았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순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영인본), 보물, 고려 1275년>
송광사 16국사 중 제6대인 원감국사가 고려 충렬왕의 명을 받고 원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로부터 받아온 것이라 전해진다. 이 문서는 원나라 통치기에 불교계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재사가 고려에 발급하였던 문서로, 사권보호를 위한 일종의 특허증으로 보고 있다. 문서의 내용은 문서 소지자에 대한 신분과 신분보장, 신분을 보장해줄 사람에 대한 명시와 협조요청, 문서 발급자의 증명부분 등으로 나눠진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7세 자정국사>
<자정국사 사리합, 고려후기>
자정국사의 사리를 담았던 그릇으로 청자상감국화문 자기이다. 고려후기 가장 성행했던 청자의 장식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고려시대 국사로서의 지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8세 자각국사>
<제9세 담당국사 (? ~ 1312)>
국사와 관련된 자료가 전하지 않아 자세한 행장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국사에 대한 전설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본시 중국 금나라 태자로서 고려에 와서 조계산의 제9세 법주가 되었다 한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10세 혜감국사>
<제11세 자원국사>
국사에 대한 자료가 전하지 않아 행장을 알 수 없다. 다만 법호는 묘엄존자, 시호는 자원국사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12세 혜각국사>
<제13세 각진국사 복구(1270 ~ 1355)>
국사는 경남 고성출신으로 성은 이씨이다. 어려서부터 불법을 존중하여 출가를 하고, 40여년 동안 송광사와 월남사에 머무르며 중생을 제도하다 1355년 7월 27일 하직하는 편지와 계승을 남겨두고 입적했다. 왕사로 책봉되었고, 책호는 각엄존자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14세 정혜국사 복암>
국사는 시호가 정혜이고 법호가 복암이다. 현재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 상세한 행장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 비문에 “정혜국사는 총림에 나아가 가지산문의 제2인자가 되어 선법함에 있어서 장성함이 있었고, 이름이 우리들 속에서 뛰어났다”라고 적고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15세 홍진국사>
국사의 행장은 자료가 전하지 않아 자새히 알 수가 없다. 대구 동화사에 비록 홍진스님의 비가 있다하나 이는 유가종이지 조계종의 홍진국사가 아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16세 고봉국사>
<고봉국사 사리합, 조선 1423년>
고붕국사의 사리를 담았던 그릇으로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사리합 뚜껑 표면에는 당초문이 은입사되어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고붕국사주자원불, 고려>
송광사 16번째 국사인 고봉화상께서 소지했던 원불이라 전하고 있다. 이 불감은 문을 열면 바로 양편 문 내벽에 문짝이 있고, 배부벽에 불, 보살 등을 양각으로 조각했다. 중앙 상단에 있는 주존불은 대일여래불이고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 하단에는 부처님의 두 제자와 보살상을 배치했다. 양쪽 문에는 두건을 쓴 지장보살과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송광사 국사전 16국사 진영이란
보물 1043호 송광사 16국사 진영은 보조국사 지눌스님을 비롯하여 2세 진각국사, 3세 청진국사, 4세 진명국사, 5세 원오국사, 6세 원감국사, 7세 자정국사, 8세 자각국사, 9세 담당국사, 10세 혜감국사, 11세 자원국사, 12세 혜각국사, 13세 각진국사, 14세 정혜국사, 15세 홍진국사, 16세 고붕국사 등 송광사를 중심으로 고려시대에 활약하던 16인의 고승진영으로서 송광사 국사전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림의 형식은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상을 그렸으며, 의자 위에 가부좌를 한 경우는 3세 청진, 4세 진명, 8세 자각, 9세 담당, 10세 혜감, 12세 혜각, 13세 각진, 14세 정혜, 15세 홍진 진영 등 9점에 이른다. 지물로는 불자를 들었거나 보조국사처럼 주장자를 짚었으며, 지물이 없는 경우는 선정인 또는 설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16점의 작품은 규격이나 제작수법이 거의 같아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화사에 의하여 일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화기는 보조국사 진영의 하단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 진영에는 시주자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화기에 의하면 건륭 45년(1780) 4월 다시 그려 영당에 안치되었으며, 진영을 그린 이는 쾌윤, 복찬 스님 등으로 되어 있다. 국사전에 진영이 처음 모셔진 시기는 14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인해 몇 차례 중수가 있었던 것을 1780년에 다시 그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5년 16국사 진영 중 13점을 도난당해 현재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송광사 국사전(국보)>
승보종찰의 상징, 국사전
송광사 국사전은 나라의 스승이었던 큰스님 16분의 진영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1369년(공민왕 18)에 처음 지었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했는데 주두높이가 얕고 두굽이 직사작 처리된 점과 살미첨차, 행공첨차 등의 쇠서 및 교두형 의장성과 보머리의 봉각형 처리와 동자주대공 등이 건축의장으로 볼 때 주심포계의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다. 건물 안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에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천장의 연꽃무늬와 대들보의 용무늬는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묵암대사 진영, 묵암 최눌(1717 ~ 1790년)>
<묵암집>
묵암당 최눌스님의 시문집으로 제자 교평이 정리하여 1801년에 간행하였다. 책은 상.중.하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권마다 수록하고 있는 내용을 제명으로 표시하고 있다. 상권에는 총 154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중권에는 당대의 고승들과 주고받은 서간문 19편이 수록되어 있고, 하권에는 소.서 등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내용들을 통해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불교의식 및 사찰의 역사를 알 수 있다. 특히 묵암스님이 죽음을 무릅쓰고 당시 승려에게 부과되었던 지역의 부당함을 밝히는 소를 조정에 올리는 내용도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묵암대사 사리호>
<화엄품목>
묵암 스님이 「화엄경」의 요지를 도표화하여 저술한 책으로, 스님의 제자 교평이 곡성 태안사에서 간행하였다. ‘통안법명일심’이라 하여 「화엄경」의 요지가 우주의 만법을 통괄하여 일심을 밝히는 것이라 규정하였다. 원문은 7판에 불과하지만 「화엄경」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하였고, 해당되는 권자 천자문순의 자호까지 붙여 찾아보기 쉽도록 하였다. 특히 화엄종의 대가였던 지엄.현수.청량.원효 스님 등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요약하고 있어 화엄학 연구가들로부터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는 책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제경회요>
묵암스님이 대표적 저술로 현재 『화엄품목』과 합철본으로 알려졌으나, 확인 결과 완전히 별개의 저술로 밝혀졌다. 묵암스님 입적 4년전인 1786년 저술된 것으로 서문 말미에 ‘~묵암이 적다’라 적혀 있어 스님의 친필 진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효봉학불(1888 ~ 1966년)>
효봉스님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10년 동안 법관으로 종사하면서 끊임없이 자기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인간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고뇌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는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 유랑생활을 하다가 석두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원명스님으로 살게 된다. 남보다 늦게 한 출가로 쉬지 않고 깨달음을 위한 좌선에 전념했다. 광복 이후 불교계의 인재양성을 절감하여 해인사에 출가수행승 종합 수행도량인 가야총림을 개원하고 방장으로 추대되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효봉스님 유품>
<효봉스님 유품>
<구산수련(1909 ~ 1983년)>
구산스님은 1927년 불법에 눈을 뜨신 이후 45년에 걸친 수행생활에서 정진하며 가는 곳마다 절을 짓고 고치는 가람수호에 힘쓰셨다. ‘일수좌’의 별명을 들을만큼 항상 대중과 함께 하시며 쉴 줄을 모르셨다. 이러한 구산스님의 활동은 희미해져가던 호남지방의 불교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었다. 또한 승보도량으로서 송광사의 면모를 확립시켰으며 국제선원을 개원하여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데 일조했다. 항상 문호를 개방하여 누구하고나 만났고 한결같이 ‘이 뭣고’ 화두로써 법문을 삼았으며 많은 붓글씨를 통해 대중에게 불연을 깊게 하셨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구산스님 유품>
<출처>
-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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