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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고려실2] 고려의 정신문화

고려는 불교가 크게 흥성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와는 달리 불상, 석탑 등은 화려한 문화재를 남겨 놓고 있지는 않다. 통일신라말부터 불교의 중심이 된 선종의 영향을 받아서 신앙의 중심이 탑이나 불상 같은 상징물에서 불경 등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상보다는 불경의 내용을 표현한 탱화에 예술적으로 빼어난 유물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호족들이나 향리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철불상을 제작하거나 사찰을 건립하는 등 많은 불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경주 중심의 통일신라와는 달리 지방적인 색채가 강한 투박하면서도 지역색이 강한 토속적인 불상들이 많이 제작되면서 고려적인 특징을 갖는 많은 불교 유물들을 남겨 놓고 있다.

 보살상

온화한 표정의 금동보살좌상(왼쪽), 14~15세기, 생각하는 듯한 온화한 미소를 띤 보살상이다. 머리 위로 중간을 묶은 높은 보계寶髻가 있고, 양쪽 어깨로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다. 얼굴 모습, 옷의 양식, 보계의 표현 등에 고려 후기적인 특징이 잘 반영되었다. 각각 양손의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중생을 구제하려는 염원을 나타냈다. 영락장식이 번잡하게 늘어지고 가슴을 도드라지게 처리한 것은 14세기 말부터 나타나는 특징으로 보인다. 14~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상에 잠긴 듯한 보살상(가운데), 고려후기,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표정의 보살상이다. 머리카락을 높이 틀어 올려 중간을 묶은 상투 모양의 보계는 당시 보살상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배 부근에 노출된 속옷과 띠매듭, 무릎 옆으로 흘러내린 소맷자락의 형태, 왼쪽 무릎을 덮은 나뭇잎꼴 옷자락 등은 같은 시기 여래상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번잡하지 않은 간결한 영락 장식 역시 고려 후기 보살상의 특징 중 하나이다. 연꽃봉우리를 쥐고 있는 보살상(오른쪽), 고려후기, 두 어깨를 감싸는 통견의 법의를 입고 몸 전체에 화려한 장신구를 한 보살상이다. 둥근 얼굴에 아래로 내려 감은 듯한 눈은 조용히 명상에 잠긴 듯하다. 머리에는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상투모양의 보계가 일부 남아 있다. 왼손에 연꽃 봉오리를 들고 있어서 관세음보살로 보기도 한다.

보살상
보살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부처가 되기 이전의 단계를 가리키는 말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이 세상에 머물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 보살의 기본적인 형태는 머리를 묶고 보관寶冠을 쓰며 화려한 장신구와 천의를 걸친 귀인의 모습을 띤다. 문수, 보현, 관세음, 지장 등 다양한 형태의 보살이 있으며, 손에는 각각의 보살을 상징하는 지물持物을 지니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나한상

웃는 표정으로 서 있는 나한상(왼쪽), 고려 13세기, 남대구 달성군 비슬산에 있는 대견사 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얼굴 부위가 마모되어 표정을 살피기는 어렵지만 서서 고개를 들어 웃고 있는 모습과 옷 주름 등은 자연스럽고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에 지물을 쥔 흔적이 보인다. 나한상(가운데), 고려 13세기, 얼굴을 위로 향하고 있는 민머리의 승려 모습을 한 나한상이다. 얼굴이 마모되어 표정이 분명하지 않지만 웃는 모습인 듯하다. 어깨를 드러내지 않는 가사를 입고 목과 가슴에는 염주 모양의 목걸이를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에 비해 나한상의 조성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자비로운 표정의 나한상(오른쪽), 고려 13세기, 민머리의 승려형으로 정수리 부분과 눈썹, 눈매, 수염 등은 철화로 표현하였다. 신체 아랫부분과 손은 잘려나간 상태이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자비롭고 인간적인 나한의 모습이다. 눈꼬리가 아래로 쳐진 초승달 모양의 가느다란 눈과 자연스러운 입매가 인상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나한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말로 소승불교의 수행의 네 단계 중 최고인 아라한과의 경지에 도달한 자를 가리킨다. 초기에는 부처도 아라한으로 불리웠으나 차츰 부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제자라는 개념으로 정리되었다. 부처, 보살, 각종 신장과 더불어 불교에서 중요한 신격을 지녔으며, 뛰어난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널리 믿게 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비를 구하고 외적의 격퇴를 염원하는 나한재를 자주 개최하는 등 나한신앙이 성행하였다.<출처:중앙박물관>

고려의 불상
국가와 왕실의 후원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의 불교는 민간에서도 현세적인 기복 신앙으로서 신봉되어 크게 융성하였다. 불상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불교 예술품으로서 불화와 함께 고려만의 독특한 전통이 만들어졌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통일신라 말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지방에서는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통일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대규모 사찰이 건립되었고 대형 철불과 거대한 불상들이 제작되었다. 고려의 체제를 갖추게 되는 11세기 이후부터는 신라적인 색채에서 벗어나 고려적인 특징이 완연해지면서도 지역색이 강한 불상이 등장하였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나 한송사 석조보살좌상이 대표적이다. 고려후기인 13~14세기는 통일신라 후기적 요소나 고려 중기에 보였던 지역색이 강한 토착화된 불상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완숙한 경지의 우아하고 세련된 불상들이 만들어졌다. 아울러 원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라마 불교가 전해져 티베트 계통의 이국적인 요소가 반영된 장식성이 강한 불상 양식을 형성하였다.<출처:중앙박물관>

옛 판본을 따라 다시 새긴 화엄경, 보물, 고려 13~14세기, 송성문 기증,

중국 당나라의 승려 반야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이다. 보현보살의 권유로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구도 과정을 다루었다. 감색의 표지에는 표제와 권차券次, 정원 연간(785~805)의 번역본임을 뜻하는 “정貞”자 등을 금니로 썼다. 판식과 판각 기법 등으로 볼 때, 고려 전기의 판본을 따라 후에 다시 새겨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기존 사경을 약간 보충한 사경, 보물,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제7, 고려 공민왕 15년(1366), 송성문 기증,

전농 직장 권도남 등이 죽은 아버지와 선조들의 명복을 빌며 공민왕 15년(1366)에 봉정사에 봉안한 사경이다. 『묘법연화경』을 감색 종이에 금니로 베껴 썼는데, 끝부분과 사성기寫成記에 비해 본문 앞부분은 상대적으로 금니 빛깔이 바래고 글씨 획의 일부가 희미하다. 기존 사경의 본문 뒷부분을 보충하고 자신들의 사성기를 써서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전농 직장: 국가 대제에 쓸 곡식을 관장하던 전농시의 하급관원(정7품 또는 종7품) <출처:중앙박물관>

장군 부부가 시주한 동종, 고려 명종 15년(1185) 또는 고종 32년(1245), 제천시 인근 출토 추정.

상장군 조 아무개가 부인과 함께 발원하여 시주한 종이다. 우리나라 범봉의 형식을 비교적 잘 갖춘 이 종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국태민안, 중생의 편안함 등을 기원하는 내용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상장군 조”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종의 모양이나 발원문에 나타나는 관직명칭 등으로 볼 때, 종을 시납한 “을사”년은 명종 15년(1185)이거나 고종 35년(1245)에 해당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동으로 만든 반자飯子,고려,

반자(쇠북)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로서, 주로 공양시간을 알리거나 대중을 불러 모을 때 사용된다. 보통 청동으로 만들고 북처럼 가운데 부분을 쳐서 소리를 내는데 금고金鼓라고도 한다. 이 반자는 아래 부분이 비어 있으며, 위쪽에는 달아 맬 수 있도록 3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반자와 같은 불구를 만들어 시주하는 것도 훌륭한 발원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빌며 향리들이 시주한 반자, 고려 고종11년(1224),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출토, 손씨 성의 향리들이 이의사라는 절에 시주한 반자(쇠북)이다. 가장자리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전쟁 종식 등을 기원하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반자가 충북 영동군 가곡리에서 출토된 점을 감안할 때, 반자를 시주한 이들은 토성으로 손씨가 있던 당시 영동현 소속의 풍곡부곡 또는 앙암부곡의 향리와 그곳 출신의 품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출처:중앙박물관>

은실로 무늬를 넣은 청동 향로, 고려 13~14세기,

불단에 안치해 놓고 향을 피우는 데 사용한 향완香椀이다. 향완은 나팔 모양의 기대와 밥그릇 모양의 몸체(노신)을 지닌 고배 형식의 향로로서, 우리나라 특유의 불구 형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향완은 12세기 중반 이후에 은입사 기법으로 화려하게 문양을 장식하기 시작하였다. 이 향완은 범자와 함께 용.여의두.구름.번개 등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을 은입사로 표현하였다. 제작 시기는 13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부처를 기쁘게 하는 방울,

고려, 불교 의식에서 부처를 기쁘게 하고 중생의 잠자는 불성을 깨우치기 위해 흔든다는 금강령이다. 위 고리의 수에 따라 독고령.삼고령.오고령 등으로 나뉜다. 몸통 면에 갑주와 창, 활 도끼, 검 등을 찬 무사상 6구가 양각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불사와 발원
고려인들은 산신이나 하늘신을 모시며 복을 빌듯이 불보살에 대해서도 여러 불사를 통해 정성과 믿음을 표현하며 각자의 소망을 발원하였다. 예컨대 인연있는 사찰을 위해 불탑을 세우거나 범종과 반자(쇠북), 향로, 촛대, 경자磬子와 같은 불구류를 시주하는 일, 불화의 제작이나 불경의 인쇄, 사경의 제작에 참여하는 일 등이 모두 발원을 위한 대표적인 불사들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불사가 개경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행해졌으며, 왕족이나 고위 관료 뿐만 아니라 하급관료나 군인, 향리까지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계층에 의해 주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우리나라에서 고려를 대표하는 유물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없이 대몽항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불교가 흥성했던 고려에서 불경과 인쇄문화는 밀접합 관계가 있었으며, 최초의 대장경 인쇄본을 비롯하여 많은 불경을 유물로 남겨 놓고 있다. 그 중 팔만대장경은  거란을 물리쳤던 경험을 바탕을 대몽항쟁기간 16년동안 다양한 계층의 참여로 만들어진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임금과 신하가 함께 기도하며 대장경의 조판을 부처와 하늘에 아뢰는 글
… 이에 (현종은) 여러 신하들과 함꼐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판각해 이룬 뒤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대장경도 한가지고, 전후 판각한 것도 한가지고, 군신이 함께 서원한 것도 또한 한가지인데, 어찌 그때에만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몽골)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제불성현 삼십삼천은 간곡하게 비는 것을 헤아리셔서 신통한 힘을 빌려 주어 완악한 오랑캐(몽골)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중외가 편안하며, 모후와 저군(태자)이 무강한 수를 누리고 나라의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주신다면, … 『동국이상국집』 권25 잡저 대장각판군시기고문

대장경 조판을 아뢰는 글이 실린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 조선후기,

고려 무인정권기의 저명한 문인이자 관료인 이규보(1168~1241)의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자체가 뛰어난 문학 작품일 뿐만 아니라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대장각판군신기고문」(고종24년, 1237)도 그러한 글 중의 하나로서, 대장경을 새겨 그 공덕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겠다는 고종과 신하들의 의지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이규보의 문집은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재간행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팔만대장경판으로 후대에 인쇄한 학습용 불교 사전, 보물, 경률이상, 고려후기~조선전기, 송성문 기증,

중국 양나라의 승려 승민.보창 등이 편찬한 일종의 불교 사전으로 고종30년(1243)에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새긴 경판을 후대에 인출한 목판본이다. 각 판 맨 끝의 작은 글씨는 본문 내용의 출전을 밝힌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팔만대장경으로 찍은 경률이상(보물)에 적힌 내용.

팔만대장경판으로 인쇄한 열반경(대반열반경), 고려 고종 18년(1241), 송성문 기증,

고종 28년(1241)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반열반경의 유일본이다. 대반열반경은 석가모니의 열반에 대해 말한 경전으로 중국 북량의 인도 승려 담무찬 Dharmakema이 번역한 것이다. 각 경판 맨 앞의 판수제에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권차券次, 장차 張次, 함차 函次를 표시하였다. 장차의 단위는 “장 丈”자를 쓴 초조대장경판과 달리 “장 張”자를 썼다. 간혹 함차 아래에 쓴 것은 경판을 직접 새긴 각수의 이름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을 새긴 곳으로 알려진 강화 선원사지.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중인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과 대몽항쟁
13세기에 들어 중국 대륙의 새로운 강자가 된 몽골이 무리하게 고려를 압박해오자 최씨 무신정권은 전쟁을 불사하며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고종19년, 1232). 백성들은 강화도 정권을 떠받쳐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치열하게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전쟁과정에서 약2세기 전 거란군을 물리치려고 새겼던 초조대장경판이 소실되자, 최씨 정권은 부처의 가호로 몽골군을 격퇴하기 위해 새로 대장경을 새겼다. 무려 16년에 걸쳐 승려와 진사, 부녀자 등 다양한 계층의 참여 속에 새겨진 대장경은 그 경판이 8만 여장에 이른다하여 보통 팔만대장경(일명 고려대장경, 재조대장경)이라 불린다. 몽골과의 오랜 전쟁은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진 이듬해에 사실상 종식되었고(고종4년, 1259), 뒤이은 무신정권들의 붕괴 속에서 마침내 개경 환도가 이루어졌다(원종11년, 1270). 이에 최씨 무신 정권의 무력 기반이던 삼별초는 환도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켜 진도와 제주도로 그 거점을 옮기면서 강력히 저항하였다. 이들은 한때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역을 장악하기도 하였으나 원종14년(1273)에 결국 고려와 원(몽골) 연합군에 진압되고 말았다. <출처:중앙박물관>

용장산성의 궁성,

원(몽골)과 고려 정부에 항거하며 진도로 옮긴 삼별초는 이곳 용장산 기슭에 산성을 쌓고 궁궐 등 각종 건물을 지었다. 계단식의 건물배치는 고려 왕궁이 있던 개성 만월대의 그것과 닮아 있다. 이곳 건물지에서는 화형접시 등 고급 청자들과 다양한 종류의 기와들이 확인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 국화무늬 잔, 고려, 진도 용장산성 출토

말 모양의 토제품, 말 모양의 철제품, 고려, 진도 용장산성 출토

“四道”를 새긴 기와, “大匠惠”를 새긴 기와, 고려, 진도 용장산성 출토

수막새, “四道”를 새긴 기와, “大匠惠”를 새긴 기와, 고려, 진도 용장산성 출토

삼별초三別抄와 대몽항쟁
고려 원종이 원(몽골)과 강화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무신정권을 옹위하던 삼별초는 배중손 등의 지휘 하에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 삼별초는 곳곳의 농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으며 항전하였고, 고려.원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된 후에도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후퇴하며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273년 제주도까지 함락되면서 삼별초의 반란은 약3년만에 진압되었고, 이로써 대몽항쟁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크게 융성하였고, 국가의 행정체계는 유교를 중심으로 운영된 국가였다. 도교는 중국에서 크게 번성하여 지금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식인들의 수신 측면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국가적인 의례 측면을 제외하고는 개인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도교와 함께 풍수지리설도 비슷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도교관련 유적,유물은 중국에 비해서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왕이 별자리 운행의 정상화를 기원하는 글
일관이 변고를 관찰한 보고를 받아보니, 별들의 운행이 정상적이지 못하다고 여러 번 말하나이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여 그로 하여금 닦고 반성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 진실로 깊이 자신을 책망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재앙을 없애버리겠습니까? 이에 정성을 다하여 특별히 법도를 엄숙히 하고 도사들을 모아 경전의 신령스런 글월을 외나이다. 바라건대 굽어 흠향하시고 도움을 더해 주셔서 삼신(해,달,별)의 궤도가 다시는 잘못되는 재앙이 없이 사방이 태평하며 영화로운 경사를 이루게 하소서. 『동국이상국집』 권39, 초소 십일요소재도량문.

도교 관청에서 쓰던 잔, 고려, 개성 출토,

고려 때 도교 제사를 담당하던 소전색燒錢色이라는 관청에서 쓰던 잔이다. 소전색은 복원궁.구요당.대청관과 같은 도교 사원들과 함께 조선 건국 직후 폐지되었다.

도교 제사에 사용한 청자 접시,

고려, 도교 제사에 사용하더너 제기이다. 그릇 바깥 면에 “십일요를 위해 진열되었다”는 뜻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십일요란 일.월.화.수.목.금.토를 포함한 11개의 별자리이다.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나라의 복을 빌고 재난을 물리치기 위하여 십일요를 비롯한 여러 신들에게 도교 제사를 많이 올렸다. 이런 도교 제사를 재초齋醮라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신선 세계를 찾아가는 배를 새긴 거울, 송~금 또는 고려,

“황비창천煌丕昌天”이라는 명문과 함께 범선과 일상, 월상, 용 등의 문양을 새겨 놓았다. 이들 문양은 바다의 신산을 찾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황비창천”이란 “밝게 빛나는 창성한 하늘”이란 의미로서, 신선이 사는 별천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거울은 송~금대에 걸쳐 중국에서 다량 수입되었고, 고려에서 이들을 본 떠 만들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 도교 인물 모양 주전자(청자 도석인물형 주자), 국보, 12세기,

대구 달성군 공산면 내동 출토, 두 손에 선도를 받쳐 든 인물 모양의 주전자이다. 의복과 봉황이 장식된 관, 선도를 받쳐 든 모습 등에서 이 인물은 도사이거나 서왕모일 것으로 추정된다. 서왕모는 도교의 대표적 여자 신선으로서, 중국 한 무제에게 불로장생의 복숭아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등 뒤에 손잡이가 있어서 전체적으로 주전자의 기능을 지니고 있으나, 실제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출처:중앙박물관>


도교에 심취한 시인을 노래한 시가 새겨진 청자병, 

조롱박 모양의 몸체 전면에 연꽃 넝쿨무늬를 양각하고 글 위쪽에도 양각으로 두 겹의 연꽃무늬를 둘렀다. 몸체 양면에 각각 마름꽃 모양의 창을 내고 그 안에 사구를 흑상감하였다. 이 시는 도교에 심취했던 당나라 시인 하지장의 주흥을 이 병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시 내용이나 병의 생김새로 보아 술병으로 썼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중앙박물관>

도교
고려시대에는 정부 주도 하에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비는 의례 중심의 도교가 크게 성행하였다. 수도 개경의 복원궁.대청관과 같은 도교 사원에서는 십일요나 삼청을 비롯한 여러 도교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며 국왕의 수명장수와 나라의 태평함을 빌고, 재난이 없어지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도교는 불교처럼 조직적인 대중 종교로 발전하지는 않았으며, 민간에서 수명연장이나 복을 비는 도교적 습속을 지켜나가는 정도였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도가 사상과 도교적 양생수련법으로 심신을 다스리며 신선과 같은 탈속의 경지를 지향하는 풍조가 많았다. <출처:중앙박물관>


풍수지리설을 집대성한 도선의 초상화(복제품), 보물, 순조5년(1805), 선암사 소장,

 통일신라 말기의 선승인 선각국사 도선(817~898)의 초상화이다. 본래 화엄종 승려이던 도선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의 문하에서 선종으로 개종하였고, 이후 전국 산천을 돌아다니며 당시 선종과 함께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서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등이 도선의 저작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초상화는 1805년 도일비구가 대각국사의 초상화와 함께 그린 것으로 서안과 발받침대, 돗자리 등의 형상이 다소 사실적이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안정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풍수지리설
고려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크게 유행하였다. 풍수지리설이란 땅속에 흐르는 기운이 사람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으로서, 산천의 형세를 잘 살펴 도읍이나 사찰, 주거, 분묘 등의 위치를 정할 때 많이 활용되었다. 백제 온조왕이 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피고 도읍을 정했다고 한 것처럼, 이미 삼국시대부터 고유한 풍수지리적 관념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보다 체계화된 이론으로서의 풍수지리설은 통일신라 말기에 당나라에 다녀온 선승들이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선성 도선은 이러한 풍수지설을 바탕으로 전국을 답사하면서 우리의 풍토에 맞는 한국적 풍수지리설의 근간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시대를 통하여 사찰이나 이궁의 건설, 천도 논의 등에서 도선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방의 수호신을 새긴 석관, 사신문 석관, 고려,

죽은 이의 유골을 담은 석관이다. 뚜껑의 바깥 면에는 비천상과 꽃을, 안쪽 면에는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을 새겼고, 바닥에는 안쪽으로 격자무늬를 새겼다. 4개의 측면 판석 바깥 면에는 돌아가며 사신四神(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암각하였고, 안쪽 면에 꽃과 꽃병을 선각하였다. 사신이 둘러 지키고 꽃이 흐드러진 석관 내부에서 죽은 이는 안식을 누렸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불교식 화장이 유행하면서 뼈항아리를 안치하는 데 석함이나 석관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화장한 유골을 모시는 석관이 상류층에 많이 보급되었다. 고려시대의 석관은 그 바깥면에 주로 사신이나 십이지신, 비천상 등의 모습을 새기고, 안쪽에는 꽃이나 새 등의 각종 동식물, 사신,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 등 다양한 도상을 선각하였다. 또 석관 면에는 간혹 석관 주인공의 묘지명을 새기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룡을 새겨 놓은 동쪽면.

주작과 현무를 새겨 놓은 남.북면

비천상을 새겨놓은 뚜껑.

내세관
고려인들은 죽은 이를 축복할 때 특정한 종교나 신앙에 얽매이지 않았다. 불교 승려를 장례지내면서 도교의 신선들과 하늘 신, 땅의 신 등의 권위를 빈다든가, 원래 도교적 존재였던 천녀를 토속화한 모습으로 무덤 벽화에 그린다든가, 십이지신상이나 성수도, 사신도, 비천상 등을 무덤 벽면이나 석관에 새기는 것들에서 도교나 불교, 민간신앙 등의 구분을 넘어 다양한 종류의 신들이 죽은 이를 보살피고 수호해주기를 바라는 고려인의 소박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내세관의 바탕에는 유교.불교.도교.민간신앙의 공존 속에 조화를 도모하던 고려인들의 여유롭고 다채로운 정신세계가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천 추동리지역은 금강하구의 충적평야지대로 농업생산력이 풍부했던 고장이다. 최근 이지역을 지나는 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고려시대 무덤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약 345기에 이르는 돌덧널무덤과 움무덤이 발굴되었다. 이 무덤들에서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내세관을 보여주는 생활용품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젓가락, 숟가락, 동전, 자기그릇 등 생활용품이 주를 이루는데 삼국시대 고분의 껴묻거리와는 달리 실제 무덤의 주인들이 평소에 사용하던 것을 함께 묻은 것으로 보인다

서천 추동리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종이 문서,

서천 추동리 무덤에 출토된 중국 동전과 청동거울을 싸고 있던 종이문서이다. 종이는 닥나무로 만들었으며, 먹으로 쓴 글의 일부분이 남아 있다. 무덤 주인공의 묘지이거나 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추동리에 연고가 있던 고위 관료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시대 종이문서

고려시대 종이문서.

고려시대 종이문서
추동리 널무덤의 중국동전과 청동거울을 감싸고 있던 종이 다섯조각에 먹으로 쓴 글이 남아 있었다. 종이는 닥나무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며, 글은 내용의 일부만 남아 있어 그 성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무덤의 주인공에 관한 묘지墓誌이거나, 주인공이 받은 편지글, 혹은 문서일 가능성이 있다. 글에 이두가 자주 보이는 점, “경卿”이라는 글자가 자주나오는 점으로 보아, 이 글을 쓴 이는 관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무덤의 주인공은 고려시대 고위관료로 추동리에 연고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가 되면 왕경의 고위 관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고 그 곳에 묻히는 사례들이 많아진다. 이러한 예들을 통하여 본다면 무덤의 주인공은 이 지역 출신의 관료였을 수도 있다. 한편 문서 가운데 “기해己亥”라는 기년이 보이는데 함께 나온 유물이나 무덤의 구조로 미루어 보아 1119년 1179년 일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동병, 입큰청자병

청동접시, 구리거울(쌍어문동경),

청동젓가락, 청동숟가락,

동전(숭녕중보崇寧重寶), 동전(개원통보開元通寶)

녹청자 기름병, 청자잔

청자대접, 청자접시

구슬, 청동실, 청동가락지

 청동인장,  가랑비녀


당초무늬 청자병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과 같이, 서천 추동리 고려시대 무덤
서천 추동리 지역은 금강錦江이 서해로 유입되는 요지로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어 선사시대부터 생활터전으로 손색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분묘와 주거지가 확인된다. 서천舒川과 천안天安 사이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고려시대 돌덧널무덤과 움무덤 등 342기가 발굴되었다. 이들 무덤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그릇, 젓가락과 숟가락, 동경, 동전, 자기그릇 등 생활용구 등과 함께 먹으로 글을 쓴 문서가 발견되었다. 무덤에 묻힌 유물들은 대체로 생활유물로서 무덤의 주인공이 평소 사용하였던 물품들이다.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과 같은 삶을 누린다고 믿었던 고려 사람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