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조선의 법궁(法宮)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처음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은 궁궐배치의 기준이 되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원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3문3조(三門三朝)’의 원칙에 따라 국왕의 생활공간인 연조(燕朝), 국왕 집무공간인 치조(治朝), 신하들이 집무공간인 외조(外朝)가 담장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경복궁 궁궐 경계에는 높은 담장을 쌓고 동서남북 네곳에 대문을 만들었다. 네곳의 대문은 음양오행설에 따라 봄-여름-가을-겨울과, 나무-불-쇠-물 등을 상징하는 건춘문(建春門-동), 광화문(光化門-남), 영추문(迎秋門-서), 신무문(神武門-북)이라 이름 지었다. 담장의 남쪽편 모통이에는 궁궐방어시설로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고 있는데 지금은 동십자각만이 남아 있다. 중국 자금성과 달리 경복궁 담장 바깥에는 해자를 파지 않았다.
<광화문과 담장>
<왼쪽에서 본 모습>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건물을 지으면서 정문인 광화문과 주변담장들이 훼손되었다가 2010년 원래의 위치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정문
궁궐 정문이자 신하들의 집무공간인 외조 출입문인 광화문은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문으로 석축기단에 2층 문루를 올려 놓고 있다. 출입문으로 3궐(三闕)의 홍예를 두고 있는데, 궁궐 또는 대궐이라는 의미는 광화문 출입문을 의미한다. 한양의 궁궐 중에 경복궁만 유일하게 궐(闕)을 두고 있다. 경복궁이 처음 창건되었을때는 정도전이 사정문(四正門)이라 이름지어졌으며, 남쪽에 있어 오문(午門)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세종대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 이름지였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구한말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 지어졌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되었다가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철근콘크리이트로 1968년 복원되었다가 2010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복원된 광화문을 도로에서 본 첫 느낌은 바뀐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원래 콘크리이트로 지었던 광화문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고 방향만 경복궁 근정전을 중심으로 한 축에 맞추어졌다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콘크리이트로 지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석축 성문에 전통적인 궁궐 건축의 자재인 금강송으로 지었다는 2층의 문루에서 궁궐 건물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복원된 광화문>
<안에서 본 모습>
성문형태로 지어진 궁궐 정문으로 궐(闕)을 의미하는 석축을 쌓은 성문의 3개의 홍예문을 두고 있다. 성문 위에는 2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원형대로 복원된 현재의 광화문 모습은 복원되기전 콘크리이트로 만든 광화문과 멀리서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이는 일제가 광화문을 철거하기전에 일본인 실무자가 정밀한 실측도면을 남겨 놓아서, 그 도면을 바탕으로 콘크리이트로 예전에 복원했으며, 현재의 건물 또한 그 도면을 바탕으로 복원했기때문에 그런 느낌을 갖게 만는 것으로 보인다.
<광화문 문루>
<옆에서 본 광화문 문루>
2층으로 지어진 건물로 다포계 공포에 웅장한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조총이 일반화된 구한말에 중건된 것을 복원하였는데, 조총의 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판문을 설치해 놓았다.
<광화문 현판.>
예전에는 한글로 적은 현판이 있었으나, 원래의 모습과 가깝게 복원하였다고 한다.
<3개의 궐문>
<석수(石獸)>
<석누조(石漏槽)>
광화문은 삼문의 형식에 따라 홍예로 만들어진 3개이 궐문(闕門)이 있는데, 국왕이 지나가는 가운데 홍예를 높게 만들었다. 성문내부 천장에는 남쪽을 상징하는 주작을 그려 놓았다. 홍예 중앙에는 벽사(僻邪)의 기능을 갖는 석수(石獸)를 새겨놓고 있다. 홍예 위쪽에는 용머리모양을 하고 있는 배수시설인 석누조(石漏槽)를 설치해 놓고 있다.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해 놓은 여장(女墻)>
<성문 양쪽 모통이에 세워놓은 석수>
<문루 추녀마루에 올려놓은 잡상>
<광화문 양쪽에 세워놓은 해치상(獬豸像)>
해태라고도 불렸던 전설상의 동물로 서울의 상징이기도 하다. 선악을 구별하고 정의를 지키는 존재이다.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제압하기 위하여 세워놓았다고 한다.
<공원으로 조성된 광화문 광장>
조선시대에는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를 비롯한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어 육조거리로 불렸다. 지금도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하여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다. 경복궁 외조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정부종합청사>
조선시대 예조(禮曹)와 구한말 삼군부(三軍府) 청사가 있었던 자리에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서 있다.
<광화문 안쪽에 위치한 수문장청(守門將廳)>
광화문을 지키는 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청건물이다.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 중문인 흥례문>
<복원하기전 광화문>
콘크리이트로 복원했던 옛 광화문 잔해 일부
동십자각(東十字閣), 경복궁을 지키는 망루
경복궁 남동쪽 도로변에 홀로 서 있는 동십자각은 서십자각과 함께 경복궁의 동.서를 지키는 망루로서 역할을 해 왔던 곳이다. 서십자각은 없어지고 동십자각은 도로에 홀로 남아 마치 원래부터 길거리에 있던 것 처럼 보인다. 북경 자금성과는 달리 경복궁은 성으로서의 방어시설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않은 궁궐 그 자체만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 동십자각은 많지 않은 경복궁 방어 시설 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대로변에서 서 있으며, 서울이 오래된 고도임을 말해주고 있는 여러 문화재 중의 하나이다.
<경복궁 동십자각>
원래는 경복궁과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지금은 도로 한가운데 홀로 서 있다.
<동십자각 문루>
원래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석축으로 쌓은 기단위에 앞면 3칸, 옆면2칸의 사모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누각이다. 주위에 조총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벽돌로 여장을 쌓아 놓고 있다. 궁궐 건물로 추녀마루에 잡상을 올려놓고 있다.
<서십자각이 있었던 경복궁 서쪽 모퉁이 부근 담장>
이 건물은 궁성(宮城)의 동남 모퉁이에 세웠던 망루와 같은 돈대(墩臺) 건물의 기능을 갖고 있던 것인데 궁성 원장(垣墻)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가에 독립건물같이 되었다. 이 건물은 궁성 전면 양모서리에서 궁내외를 감시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인데 서십자각(西十字閣)은 헐려 현재 볼 수 없다. 평면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 방형(方形)이며 축부(軸部) 구성은 하방(下枋)과 창방(昌枋)만을 짜아 돌리고 주간(柱間)에는 무벽(舞壁)의 개방식이며 바닥은 흙바닥으로 되었다. 공포(慊包)는 이익공(二翼工)으로 주간에는 장화반(長花盤)을 넣어 끼우고 네 귀에서 귀 한 대를 내어 추녀 뒷몸을 받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옥정(屋頂)에는 절병통을 얹었으며 귀마루에는 양성을 발라 그 위에 잡상(雜像)과 용두(龍頭)를 올려 놓았다. 건물 주변에는 여장(女墻)을 쌓아 편문(便門)을 내었고 기단(基壇) 상부는 당초문(唐草文)의 조각장식을 베풀어 의장(意匠)하고 있다. <출처:서울육백년사, 서울시청>
신무문, 건춘문, 영추문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출입하는 문으로는 정문격인 남쪽 광화문이 있고, 동쪽에는 건춘문, 서쪽에는 영추문, 북쪽에는 신무문이 있다. 현재는 광화문과 신무문을 통해서 경복궁을 출입할 수 있고, 동.서쪽의 건춘문과 영추문은 굳게 잠겨 있다. 그 중 신무문은 청와대 정문과 연결되는 문으로 최근에 일반에게 개방되고 있다. 경복궁 전체를 한번 둘러보고 건청궁과 집옥재, 향원정 일대에서는 최근에 개방된 신무문을 통해서 잠깐 바깥으로 나가서 청와대 정문과 신무문 바깥 모습을 관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경복궁 출입문 중 정문인 광화문은 삼문의 형식에 2층 문루를 올려 놓고 있으며, 나머지 동.서.북쪽 출입문은 단문의 형식에 1층 문루를 올려놓고 있는 구조이다. 북경 자금성과 비교해보면 자금성 정문은 5개의 출입문이 있는 오문의 형식이고, 북문인 신무문은 3분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마도 당시에 중국과 주변국간에 궁궐 건축 형식에 대한 예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의 동문에 해당하는 건춘문>
<안에서 본 모습>
정문인 광화문과는 달리 홍예로 만든 1개의 출입문(闕)을 두고 있다. 건춘문을 들어서면 세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을 비롯하여 왕실가족들이 거처하는 내전(內殿)과 연결되는 출입문으로 왕족.척신(戚臣).상궁 등이 드나들었던 출입문이다. 이런 까닭에 건춘문 바깥쪽에는 왕실 종친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인 종친부(宗親府)가 자리잡고 있었다.
<경복궁 동쪽편 담장>
<건춘문과 주변 담당>
<경복궁 동쪽편 도로와 담장>
도로가 개설되면서 담장은 동십자각과 연결되지 않고 원래보다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북악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천이 흐르는 곳이다. 옛 그림이나 사진에는 개천과 북촌과 연결되는 다리 등을 볼 수 있다.
<신무문(神武門)>
<안쪽에서 본 모습>
경복궁의 북문에 해당하는 신무문(神武門)이다. 이 문을 실제로 사용하지 않고 늘 닫혀있었다고 한다. 비상시 국왕이 숙정문(肅靖門)이나 창의문(彰義門)을 통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갈때 사용하기 위한 비상문이라 할 수 있다.경복궁을 처음 세웠을때는 없었으며, 세종15년(1443)에 만들어졌다. 중국 자금성 북문인 신무문과 같은 이름을 사용한다.
<신무문 밖 청와대>
<경복궁 후원 집옥재와 신무문 사이에 있는 중문에 해당하는 출입문>
삼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국왕이 드나드는 것으로 전제로 지어졌다.
<집옥재에서 신무문으로 연결되는 길>
<영추문(迎秋門)>
<안에서 본 모습>
<성문 내부 천정에 그려진 백호>
경복궁 서문에 해당하는 영추문(迎秋門)이다. 국왕을 직접 보필하는 관청인 궐내각사와 연결되는 출입문으로 관료들이 주로 출입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석축이 무너지면서 철거되었던 것으로 1975년에 복원하였다. 원래의 위치보다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도 영추문을 들어서면 궁궐에서 공식적인 연회가 열렸던 경회루 연못을 먼저 볼 수 있다.
<영추문과 주변 담장>
<경복궁 서쪽편 담장>
광화문과 궁궐담장
궁궐의 바깥 경계에 높은 담장을 쌓았고, 담장의 동서남북 네 곳에 대문을 만들었다. 건춘문(建春門-동), 광화문(光化門-남), 영추문(迎秋門-서), 신무문(神武門-북)은 각각 봄-여름-가을-겨울과, 나무-불-쇠-물 등을 상징하는 명칭으로 전통적인 오행설에서 유래했다. 1968년 재건된 광화문은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었고, 위치도 원위치에서 뒤로 물러서 있었는데, 2010년 원래의 위치에 제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담장의 동남쪽과 서남쪽 모퉁이에 동십자각(東十字閣)과 서십자각(西十字閣))을 세워 망루로 사용했는데,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고, 동십자각은 도로 확장으로 인해 담장을 안쪽으로 옮겨 쌓으면서 길 한가운데 나앉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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