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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조선실3] 새로운 질서의 모색

조선중기 임진왜란으로 동아시아 각국에는 크나큰 변화가 발생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중앙집권적인 동경중심의 막부정치가 시작되었고, 북방에서는 만주 여진족이 크게 성장하여 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허약함을 드러낸 국왕과 집권층에서는 중립외교를 추구한 광해군을 축출하고 명분론적이며 친명을 표방한 서인세력이 집권했다. 인조대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에 허망하게 굴복하고, 명나라 또한 농민혁명과 청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 정립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사회를 대표한 복고적인 현상이었던 예송논쟁과 붕당정치를 이끌었던 남인의 대표 허목과 서인의 대표 송시열의 초상화와 문집을 볼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숙종대까지는 예송논쟁을 중심으로 한 붕당정치가 시대를 대표하는 현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숙종대에는 국방의 강화를 위해서 강화산성과 돈대, 남한산성 등 오늘날 남아 있는 많은 성곽들을 크게 보강했으며,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배계층의 저항이 극심했던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상평통보의 유통같은 조치를 통해 영.정조대 중흥기를 준비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붕당정치
선조대 이후 성리학적 가치관을 지닌 사림이 중앙 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기존 세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이 생겨났다. 동인에는 이황(1501~1570)과 조식(1501~1572)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1536~1584)와 성혼(1535~1598)의 문인이 많았다. 이후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 따라 붕당이 세분되었는데,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추대하는 인조반정(1623)이 일어난 뒤에는 서인이 대표적인 집권세력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남인의 지도자 허목의 초상, 19세기,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인 허목許穆(1595~1682)의 초상화이다. 허목은 오랫동안 재야의 학자로 있으면서 깊이 있는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현종대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남인의 지도자로서 서인과의 예송논쟁에 참여하였다. 허목은 왕의 예와 사대부의 예는 서로 다르다는 예론을 주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허목의 글을 모은 책, 미수기언眉叟記言, 조선후기,

조선 중기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인 미수 허목의 문집이다. 이 문집에서 허목은 효종의 상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일년 동안 입는 상복인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이 효종을 둘째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이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인의 지도자 송시열의 초상, 19세기, 복제품,

조선중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인 송시열의 초상화이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공격하자는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서 효종이 죽은 뒤에 일어난 예송논쟁에서 남인과 대립하였고 천하에 적용되는 예가 동일하다는 예론을 옹호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송시열의 글을 모은 책, 우암선생문집憂菴先生文集, 조선후기,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인 송시열의 문집이다. 이 문집에는 송시열이 효종 대에 시급하게 할 일과 유교적 정치이상에 대하여 쓴 글인 「기축봉사己丑封事」(1649)와 「정유봉사丁酉封事」(1657)가 실려 있다. 여기에는 송시열의 북벌론이 담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예론에 관한 허목과 송시열의 1차 논쟁, 예송禮訟
현종 대에는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모후인 조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두 차례에 걸쳐 예송논쟁이 있었다. 예송은 표면적으로 복상服喪 기간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학파 간 예론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었다. 이는 정치세력 간의 대결로 이어져 정치권력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허목과 송시열은 각각 남인과 서인의 예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현종1년(1660)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기년복朞年服(만 1년상)을 주장하였고, 허목 등 남인은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주장하였다.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허목도 좌천되었다. 이후 허목은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글을 지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예론에 관한 허목과 송시열의 2차 논쟁, 예송禮訟
현종15년(1674) 효종의 비 인성왕후가 죽자, 조대비의 복상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2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주장에 따라 대공복大功服(만9개월)으로 정해졌다가 허목의 설이 옳았다고 인정됨에 따라 기년복으로 고쳐졌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게 되었고, 허목은 우의정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허목은 유배 중이던 송시열의 처벌에 강경론을 펴는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한 뒤, 허목은 관작을 당하였고, 송시열은 지위를 회복하여 남인에 대한 강경론을 지지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가례를 분류하여 정리한 책, 가례원류家禮源流, 유계兪棨, 조선후기,

조선중기의 학자 유계가 쓴 가정의례서인 『가례』에 대해 해석을 붙여 정리한 것을 기본으로 하여, 『의례儀禮』.『주례周禮』.『예기禮記』에서 관계되는 것을 뽑아 주를 붙여 원源으로 하고, 주자 이후 여러 학자들의 예설을 모아 유流로 사았다. 가례의 연원과 발달을 비교하여 가례의 본질과 전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엮은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장생이 예에 관해 제자들과 문답한 책, 의례문해疑禮問解, 김장생, 조선후기,

김장생의 예론을 그의 아들 김집이 모아 편찬한 책이다. 이 책에는 상례喪禮.제례祭禮를 비롯하여 관례冠禮.혼례婚禮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여러 가지 변칙적인 사례에 대해 예(변례變禮)에 관한 문답을 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구가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예설을 정리한 책, 오선생예설분류

정구가 중국 송나라 다섯 학자들의 예에 대한 의견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책은 단순히 예에 대한 내용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교를 중심으로 한 모든 법질서에 관한 것들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상의 신위를 보관하는 장, 감실龕室, 조선후기,

조상의 신주를 모시기 위한 감실로, 집모양으로 만들었다.

예학
양반 관료들은 각종 예禮의 정리를 통해 유교적인 가치를 사회에 정착시키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흐트러진 향촌사회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국가와 양반 관료들은 예학을 강조하였다. 특히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가례집람家禮輯覽>을 비롯한 각종 의례서를 지어 예학을 학문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학문은 아들 김집金集(1574~1656)에게 계승되었으며, 이후 하나의 학문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대동법 시행을 기념한 비석의 탁본, 효종10년(1608),

대동법 시행을 기념한 비석의 탁본, 대동법시행기념비 탁본. 평택시에는 대동법 시행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 대동법의 유래와 시행의 어려움 등 당시 사회환경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김육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준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 처음으로 실시된 이래 효종2년(1651) 김육의 주도하에 충청도에서 시행되었고, 이후 숙종대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비문은 김육에 대한 기념비인 동시에 대동법이 시행되기까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대동법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대동미大同米라는 명목으로 1결에 쌀 12두씩 징수하도록 한 것으로 옷감이나 돈으로 대신 납부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즉위년(1608) 이원익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서 대동법이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이후 효종대에 김육의 주도로 충청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숙종3년(1677)에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농민들의 경제적인 부담은 가벼워지게 되었고,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최실의 호적,

숙종16년(1690)에 작성된 호적이다. 호주는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를 가진 최실이다. 그의 나이는 65세이며 주소는 한성부 동부 숭교방崇敎坊으로 기재되어 있다. 직계와 처가의 증조曾祖까지의 간단한 관직, 이력이 적혀 있고 그 이하에는 가족과 노비들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홍중기에게 발급한 호적등본, 준호구準戶口,

1804년 한성부에서 관내에 거주하는 홍중기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이다. 홍중기의 가족과 소유 노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적었다. 준호구는 백성의 요청에 의해 관청에서 보관 중인 호적대장에서 해당 호戶에 기재된 내용을 그대로 베껴 발급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호적등본 또는 주민등록등본과 유사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단성현 호적대장

경상도 단성현 고을의 인구조사 장부인 경상도 단성현 호적대장이다. 조선시대 신분제에서 기본이 되는 자료로서 그 제도는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조선후기 경상도 단성현 (현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살았던 사람들을 3년마다 조사하여 수록한 인구 조사 장부이다. 호적대장에는 대체로 호 구성원의 직역, 이름, 나이, 본관, 사조의 직역과 이름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노비가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삶을 살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 중앙박물관>

조선후기 문관 김희의 호패, 정조8년(1784),

18세기 문신 김희의 호패이다. 상아로 만들어진 호패의 앞면에는 “김희 기유생 계사문관”, 뒷면에는 “갑진”이라 적혀 있다. 깁진년 즉 1784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희는 영조49년(1773)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직각, 대사성, 경기도 관찰사, 이조참의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임진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박진영의 호패, 17세기,

박진영이 사용한 호패이다. 기사년(선조2년, 1569)에 태어나서 갑오년(선조27년, 1594) 25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새로운 질서의 모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사회는 정치.사회.경제.문화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국왕을 비롯한 관료들은 대동법의 시행, 호적제도의 정비, 상평통보의 유통 같은 개혁을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 시기에는 건국 이래 발전해온 예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래서 국왕의 상례喪禮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정치세력간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상업이 발전하는 등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문서나 그림, 각종 생활용품을 통해 당시 사회상의 변화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 경제와 산업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조세를 부과하고 징수하는 조제제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 민간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각지방이 특산물을 정부에 납부하던 공물을 대동미라는 명목으로 쌀로 납부하게 하는 대동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동법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처음으로 경기지역부터 적용했다고 숙종때 전국적으로 시행했다고 한다. 전국적 시행에 100년 이상이 걸린 엄청나 지방토호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있었던 제도이다.

지금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현상이지만, 조선의 관료제도나 사회제도의 모순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 집안을 운영하는 경제력의 기반으로는 부족했다고 한다. 실제 관료나 양반들의 수입은 지방관들이 주는 뇌물성격의 선물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일부 탐관오리만 행했던 치부의 수단이 아니라 당대의 유학자나 존경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 또한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지방관들이 이런 선물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많이 사용했던 수단이 방납이라는 제도인데, 지방관이 쌀을 받고 특산품은 시장에서 구해서 중앙정부에 바치는 구조인데, 그 시행단계에서 많은 폭리를 취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았다고 한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크게 바뀐 현상이 국가는 필요한 물품을 상인을 통해서 구매함으로써 상업이 전시대에 비해서 크게 발전했고, 여러가지로 경제적인 순작용이 많았던 제도였다고 한다.

상업과 상인
조선후기에 상업이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서울의 여러 곳에 큰 시장들이 들어섰고, 지방에서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이 상설시장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보부상을 상대로 하는 도매상인으로서 객주客主와 그 활동공간인 여각旅閣이 등장하였다. 한편 화폐의 사용은 인조대 이후 몇차례 시도되다가 숙종4년(1678) 처음 주조된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확대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나무로 만든 저울대와 돌로 만든 저울추, 조선후기,

물건의 무게를 재는데 사용한 나무 저울대이다. 저울대에는 ‘천평天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돌로 만들어진 저울추에는 앞뒤에 ‘이로써 오래도록 경중을 알 수 있다’는 뜻의 ‘이시영년以是永年’과 ‘내지경중內智輕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네면에 각각 다른 척도를 새긴 놋쇠 자, 진유척眞鍮尺, 18세기,

역대 중국에서 제작된 4개의 척尺을 사각에 새겨 넣은 자이다. 건륭6년(1741) 청나라에서 제작된 영조척營造尺, 송나라에서 제작된 포백척布帛尺, 건초 3년(83) 후한後漢에서 제작된 건초척建初尺, 『주례周禮』에 규정된 주척周尺이 각각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세금을 걷는 관리의 신분증, 수세패收稅牌, 조선후기,

평시서平市署라는 관청은 한선부 종로에 있는 큰 가게(시전市廛)를 관리하고 각종 물가에 관한 일 등을 담당하였다. 평시서에는 시전을 관리하는 방법의 하나로 몇몇 가게를 정해 세금을 대신 거두도록 하였는데, 세금을 거둘 때 수세패를 착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수세패는 한성부에 있는 족두리전(족두리를 파는 가게)에서 관할 점포로부터 세금을 거두며 착용했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의 대표 화폐, 상평통보
상평통보常平通寶는 조선 후기에 전국에 걸쳐 널리 사용된 동전이다. 만들어진 시기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크기와 재질 등에 관계없이 모두 같은 값으로 쳤다. 앞면에는 ‘상평통보’라는 문자를 새겼고, 뒷면에는 만든 관청과 주조 번호를 새겨 넣었다. 엽전 한 닢은 한푼(分)이고, 10푼이 1전(錢),10전이 한냥(兩)이다. 상평통보 가운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발행한 화폐가 ‘당백전’이다. 당백전을 줄여서 당전當錢이라고 하였는데, ‘땡전 한 닢 없다’는 말에 쓰인 땡전은 이 당전에서 비롯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에 널리 유통된 화폐, 상평통보常平通寶,

조선후기에 널리 유통된 화폐이다. 숙종4년(1678)에 처음 발행된 상평통보는 ‘언제나 고르다’는 상시평준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통가치에 등가를 유지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앞면에는 ‘상평통보’라는 글자가, 뒷면에는 주조한 관청을 줄여 쓴 명칭, 천자문千字文(또는 오행五行) 중 한 글자, 숫자나 부호 등이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상평통보의 변천

다양한 형태로 발행된 상평통보.

동전을 보관한 상자, 목제 전궤 木製錢櫃, 조선후기

농업과 농민
조선시대에는 농업이 세상 일 가운데 으뜸이라 여겨 나라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다. 농민들은 절기마다 필요한 농사일에 힘썼고, 나라는 절기에 따른 농사 정보를 수집하여 농서農書를 편찬하였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이앙법(모내기) 같은 농업 기술이 개발되고 고구마,감자 같은 대용 식물이 도입되었다. 여성들은 농사 외에 길쌈을 하여 가족의 옷감을 만들고 국가에 내는 군포軍布를 충당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가난한 사람이 스스로를 노비로 판 문서, 노비자매문서奴婢自賣文書, 조선 순조22년(1822),

가난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노비로 파는 문서이다. 32세의 복쇠라는 남성이 아내와 함께 자신의 몸을 25냥에 파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후기 경제적인 위기에 처한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노비로 자신을 팔아야 했던 절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농촌생활을 경영하는 지혜를 적은 책, 증보산림경제, 홍만선 저, 유중림 평, 조선후기,

조선 영조 때 유중림이라는 사람이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를 보충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산림에 묻혀 살면서 지켜야 할 생활 규범과 농촌 생활의 지혜를 기록하고 있다. 농사짓는 법을 비롯하여 나무 심기, 가축 기르기, 건강관리, 질병 예방법 등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타작과 자리짜기, 김홍도 필 풍속화첩(보물)

조선후기 민간생활

국립중앙박물관 조선3실에서는 조선후기 민간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민간에서 즐겼던 놀이문화와 의.식.주 관련하여 각종 생활도구, 민간신앙 등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 놀이문화로 특색적인 것은 조선시대를 특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관료제를 들 수 있는데 양반가에서는 어린시절부터 승경도라는 놀이를 통해서 관직의 체계를 배우고, 입신양명의 꿈을 갖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 서민층에서 사용했던 놀이기구는 아마도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특별히 전시된 것은 없다. 당시의 놀이로는 서민들이 즐겨 놀았던 장기나 양반 계층이 즐겼던 바둑.쌍륙.투호.승경도와 같은 놀이가 있었다.

담배쌈지, 부시와 부시통, 담뱃대걸이, 조선후기,

쌈지는 부시와 담배를 넣어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을 말한다. 넣는 물건에 따라 각각 부시쌈지.담배쌈지라 한다. 부시는 불을 일으키는 도구로, 부시.부싯돌.부싯깃이 한 벌을 이루며 성냥이 없던 시절 담배를 피울 때 사용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담뱃대, 연죽煙竹, 조선후기,

담배는 임진왜란 이후에 서구로부터 도입되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피우는 기구로 대통, 설대, 물부리로 이루어져 있다. 17세기 초 임진왜란 후 조선에 들어온 담배는 초기에는 특수층의 기호품이어서 담뱃대도 양반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죽長竹이 유행하였다. 담배가 일반 서민들에게 널리 보급되면서 담뱃대 길이도 짧아지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서민들이 사용하던 짧은 담뱃대

토지를 사고 파는 문서, 토지매매문서土地賣買文書,

조선 정조22년(1798) 박수천이라는 사람이 보성군수를 지낸 윤아무개 집안에 토지를 매매한 사실을 기록한 문서이다. 당시 양반가문에서 상거래를 할 때, 집안 소유 노비가 대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토지 매입자가 윤씨가의 종인 삼취로 문서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실제 토지 구입자는 그 주인인 윤아마개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씨부인이 쓴 의식주 백과사전, 규합총서(1809).

한글로 쓰여진 생활백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 9년(1809) 빙허각 이씨가 여성을 위해 엮은 한글 생활지침서이다. 이 책에는 요리, 음식, 염색, 세탁, 밭갈기, 가축기르기, 제충, 태교, 구급방 등 여성들이 꼭 알아야 할 생활의 지혜를 상세하게 서술했다. 일반 실용서적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혀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떡에 무늬를 찍어내는 도구, 백자 떡살 白磁 餠型, 조선후기,

떡의 무늬를 찍는 도구이다. 무늬는 주로 연꽃.국화.매화.석류 등의 꽃무늬이며, 간혹 학무늬나 수복壽福, 원희圓喜 등의 글씨 무늬를 쓰기도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밥상, 그릇, 숟가락과 젓가락,

밥상에 식기가 갖추어진 작은 규모의 상차림이다. 밥상은 산지.형태.용도에 따라 60여 종으로 분류되며 각각 명칭과 구조가 다르다. 지역에 따라 경상도에는 죽절반竹節盤, 전라도에는 호족반虎足盤, 강원도.경기도는 구족반狗足盤이 주로 쓰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놀이문화
조선시대 놀이는 여가를 즐기기 위한 오락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풍년과 다산을 기원하고 재앙을 제거하여 복을 불러들이는 민간 신앙차원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서민들이 즐겨 놓았던 장기나 양반 계층이 즐겼던 바둑.쌍륙雙六.투호投壺.승경도陞卿圖와 같은 놀이가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바둑판,

조선후기에 사용한 바둑판으로 서랍 안에 바둑알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선녀와 악녀의 이름을 말판으로 삼은 주사위 놀이판, 조선후기,

규방에서 꼭 알아야 하는 여자 행실을 놀이로 만든 글미이다. 인현왕후가 궁궐에서 쫓겨나 사가私家에 머무는 동안 친정 여자아이의 교육용으로 손수 만든 놀이라고 전해진다. 맨 아래 줄에 ‘악녀’ 등이 씌어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지체가 높아져 맨 윗줄에는 ‘여성 중 성인聖人’이라는 ‘태임太任’이 씌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승경도 놀이에 사용한 주사위, 조선후기


우리나라의 명승지를 써서 말판으로 삼은 주사위 놀이판,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대로 말을 움직여 도표 위에 그려진 명승지를 유람하는 아동놀이이다. 이 놀이는 양반가에서 요구하는 자녀교육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 명승지를 익히고 풍토.산물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직명을 품계와 종별로 써서 말판으로 삼은 주사위 놀이판, 승경도.

승경도는 조선시대 양반가 아이들이 많이 즐겼던 놀이이다. 아이들에게 복잡한 관직체계를 익히게 하고, 관직진출에 대한 욕구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 크게 장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놀이문화와 관련된 유물 중에서 가장 많아 남아 있는 유물 중 하나일 것이다.

승경도는 벼슬살이하는 도표라는 뜻으로 종경도.승정도.종정도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의 관직은 등급이 많고 칭호와 상호관계가 매우 복잡하였다. 따라서 양반집에서는 관직체계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관직 진출을 위한 향학열을 높이기 위해 이 놀이를 장려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승경도 놀이방법
승경도에는 조선후기 관직 300여개가 경직(중앙관리)과 외직(지방관리)으로 구분되어 등급별 칸에 적혀 있다. 중앙부에 경직인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외곽 사방에는 외직인 8도의 감사.병사.수사 및 주요 고을 수령 등을 배치하였다. 놀이방법은 주로 4~8명의 인원이 두 편으로 나누어, 번갈아 윷이나 윤목을 굴려 거기에 나온 눈금(숫자)에 따라 칸을 이동하여 누가 먼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방식이다. 맨처음에는 출신 및 이에 따른 세부 사항을 정해야 하기 때문에 두 번 굴리고, 이후로는 한번씩 번갈아 굴려 놀이를 진행한다. 첫번째 굴려 정해지는 출신은 문과.무과.은일.남행.군졸로 나누어진다. 두번째 굴린 것은 문.무과 과거 중에서 증상과.식년과 등으로, 군졸도 갑사.정병으로 나뉜다. 그리고 두번째 말을 굴린 사람은 그 숫자에 따라 자기 출신의 칸에서 벼슬자리를 시작한다. 만약 ‘도’가 계속 나오면 점점 강등되어 파직에 이르며, 최악의 경우 사약을 받기도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글, 조선,

기사년 3월, 권가와 부인 홍씨의 회혼回婚을 맞이하여 이정년 등 여러 사람들이 지은 축시를 모은 책이다. 회혼은 부부가 혼인하여 함께 맞는 예순 돌 되는 날, 또는 그 해를 말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양반의 일생을 그린 그림, 평생도平生圖, 전傳 김홍도金弘道,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평생도 그림이다. 평생도는 많은 권문세가에 병풍으로 그려서 남겨오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많은 그림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생도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념이 될 만한 경사스러운 일들을 골라 그린 그림이다. 보통은 벼슬을 지낸 인물의 공적을 기리고 중요한 벼슬 생활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렸다. 대개 여덟 폭의 병풍으로 만들어졌는데, 돌잔치를 비롯하여 관례冠禮, 혼례婚禮, 과거급제科擧及第, 벼슬살이, 회갑연回甲宴 등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인생관과 출세관이 표현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과거합격자의 상징, 어사화관모御賜花冠帽, 20세기,

어사화와 관모의 재현품이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한 사람의 방을 발표할 때, 임금은 어사화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어 급제자들의 복두幞頭 뒤에 꽂아 주게 했다. 어사화를 머리에 꽂은 급제자는 유가遊街에 나섰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관리의 복식, 관복함冠服函.사모紗帽.각대角帶

돌찬치에 아기가 쓰는 모자

신부 측에서 혼인을 허락하는 문서, 허혼서

신부의 집에서 혼인을 허락하는 문서이다. 무신년 9월에 신부 측 이우경이라는 사람이, 신랑 집의 청혼을 허락하는 문서인 연길단자를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혼인 풍습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민간신앙
도교와 불교, 유교 등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해와 달, 북두칠성, 산과 나무, 새와 짐승 등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이러한 믿음을 민간신앙 또는 토속신앙이라 한다. 민간신앙은 보다 원초적인 기복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렸고, 불교.유교.도교 등과도 영향을 주고 받았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어난 날과 시간에 따라 사람의 운명을 풀이한 책, 본사주격本四柱格, 조선후기,

사주팔자四柱八字를 가지고 인간의 평생 운세를 풀이한 책이다.


홀로 도를 깨우친 성인을 그린 그림, 독성도獨聖圖, 고종15년(1878),

독성은 ‘나홀로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라는 뜻으로 대개 나반존자那畔尊者를 가리키며, 흰 눈썹을 지닌 신선이나 도인과 같은 풍채를 지닌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이 독성도는 송모, 김모 부부가 만39세 되던 해인 1878년에 아들을 얻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현재의 대전시에 소재한 계족산 비래사에 모셨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신을 그린 그림

산을 지키고 산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하는 산신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백발 수염의 신선과 그를 옆에서 지키는 호랑이가 아주 친근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맹수인 호랑이가 해학적으로 묘사된 점이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명당을 그린 그림, 명당도明堂圖, 20세기

, 명당으로 이름난 곳을 그린 풍수도이다. 지도의 왼쪽 상단에 ‘대전군 유성면’이란 지명으로 보아 1914년 이후에 그린 지도로 보인다. 대전군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처음으로 등장한 지명이다. 마을을 토양색에 따라 세 지역으로 구분하였고, 마을을 둘러가며 좌향坐向을 표시했으며 특정지역에는 28宿의 별자리를 배치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장사를 지내는 일시와 절차를 정한 기록, 장사택일지

장사택일지란 지관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여 작성해 준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장지의 형국과 좌향, 파묘, 안장, 계빈, 하관, 취토 시간을 비롯하여 하관 시 보아서는 안될 사람의 간지와 자손들의 간지가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300년 전 평양감사의 대동강 뱃놀이를 묘사한 그림이다.

대동강변에 위치한 누각에서 벌어졌던 잔치 모습을 담은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