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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조선실4] 탕평과 문화의 진흥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휴유증을 극복하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병자호란 이래로 송시열을 중심으로 계속되어온 당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영조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역량과 권위로 조금이나마 제압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또한 중국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심으로 안정화된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영.정조대를 대표하는 정책으로는 탕평책으로 대변되는 당쟁의 극복과 왕권의 확립, 균역법으로 대표되는 조세개혁을 통한 경제 안정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조대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학문장려, 중국 문물됩과 함께 크게 융성한 실학, 대량 출판을 통한 지식의 확산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큰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지만, 당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개척, 과학과 기술의 발전 등을 고려해보면, 중국.일본.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전쟁이 없는 안정된 사회를 구가했기때문에 학문과 기술의 발전이 서구에 비해 많이 뒤쳐질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영조와 정조
영조는 당쟁과 당화를 없애는 모든 방법을 강구한 적극적인 탕평의 임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자신에게 엄격했던 생활에서 나온 것이었다. 영조는 52년의 재위기간 동안 경연을 3,458회 실시하여 어느 왕보다 많은 경연을 통해 학문적으로도 신하들의 주장을 제어할 수 있었고, 천재지변에 근신하기 위해 음식을 줄이는 감선減膳을 행하거나 금주령을 반포하고 사치품의 사용을 금하는 등의 조처를 자주 내렸다.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선대의 탕평정치를 계승하면서 왕실의 친인척을 인사에서 배제하고, 규장각을 세워 학문정치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궁궐 숙위를 위해 설치한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발전시켜 군사력을 집중시켰다. 노론과 소론을 견제하며 남인을 등용하는 정조 탕평론의 기초 위에서 사도세자묘(영우원永祐園)의 천봉과 화성성역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집권의 정통성을 밝힌 책, 천의소감闡義昭鑑,

영조 집권의 정통성을 밝히기 위해 왕명으로 펴낸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영조 자신은 경종의 왕세제로 책봉되던 경종1년(1721)부터 나주 흉서凶書 사건이 있었던 영조31년(1755)까지 35년간의 정치적 사건들의 전말을 기록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조와 병조의 인사 평가 장면과 참여자 명단, 무진친정계첩戊申親政契帖,

왕이 관리들과 인사 평가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과 참여자 명단을 엮은 첩帖이다. 영조4년(1728) 7월 창덕궁 어수당魚水堂에서 이조판서 윤순 등 총 17명의 관리가 함께 모여 인사평가를 하고 있다.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4개월이 지난 시점에 영조가 친히 관리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에 참여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균역법에 관한 규칙을 적은책, 균역청사목.

균역법은 병역의 의무에 관한 법으로 당시 지방관들의 음성적인 수입의 당당부분을 차지했으며, 양반사회를 지탱해온 경제적 바탕 중의 하나인 병역관련 세금을 베로 납부하는 것으로 단순화한 제도이다. 하지만, 병역비리는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을 지탱해온 것 중의 하나로 균역법 시행 이후에도 지방관들이 횡포는 근절되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 28년(1752) 4월에 작성되어 같은 해 6월29일에 간행.반포된 균역법 시행세칙을 적은 책이다. 균역청사목은 이 <원사목>이 반포된 이후로도 여러 차례 개정이 있었는데, 이를 정리하여 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사목은 설청.결미.여결.급대 등 10개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머리에는 영조의 유음이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의 탕평정치
탕평이란 조선후기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고 정치 세력간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정책이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던 정국을 타파하기 위해 <辛酉大訓>을 반포하여 탕평정치의 기반을 다졌다. 탕평파 관료의 신임과 인재의 발탁에 적극적이었던 영조는 영조31년(1755) 나주의 흉서凶書사건으로 7개월여 간의 국문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으 처지를 변명하고 나라의 정책을 밝힌 <천의소감>을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 송준길의 문묘제향을 실행하고, 영조 40년(1764)에는 소론에 대한 배려로 박세채의 문묘제향을 지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탕평을 거의 마무리하면서 영조는 <속대전續大典.과 <속오례의續五禮儀>를 편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가 직접 짓고 글씨를 쓴 책, 어제수덕전편御製樹德全篇, 영조, 영조47년(1771),

이 책은 영조가 영의정 김육이 지은 『種德新編』을 읽고 난 뒤의 감회를 적은 것으로, 영조47년(1771)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하였다. 그 내용은 먼저 덕을 오랫동안 닦아야만 그 자리를 누릴 수 있다는 원리를 설명하고, 이어 조선 왕실을 여기에 비유하여 천여 년 전부터 그 덕의 씨가 뿌려져서 오늘날의 조선왕조가 이룩되었다고 칭송하였으며, 끝으로 세손과 후대의 왕들에게 덕행에 힘쓰라고 권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 임금의 초상화, 영조어진, 1900년, 보물, 복제품,

복제품으로 원본은 궁중박물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영조가 51세때에 그린 모습으로 비록 초상화이지만 그림에서 그의 깐깐한 성격이 잘 드러나 보인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로 탕평책으로 당쟁세력을 제압할려고 노력했으나, 집권과정과 관련된 많은 루머로 인해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여가면서까지 국왕의 권위를 살리려고 했었다.

조선 제21대 임금인 영조의 초상화이다. 영조의 5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머리에는 임금이 쓰는 익선관을 쓰고, 양어깨와 가슴에 용을 수놓은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고 있다. 이 초상화는 영조20년(1744) 장경주와 김두량이 그린 그림을 1900년 당대의 일류 초상화가들이 보고 그린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임금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그린 그림, <기사경회첩> 중 <영수각친림도>

영수각은 숙종이 기로소에 들 때, 왕이 직접 제목을 쓴 ‘어첩’을 보관하기 위해 기로소 옆에 새로 지은 전각이다. <영수각친림도>는 영조가 기로소에 들면서 영수각에 친림하여 어첩에 제목을 쓰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오봉병과 서안을 그려 왕의 존재를 표현하였다. <기사경회첩>에 수록된 행사 그림은 <영수각친림도>, <숭정전진하전도>, <경현당선온도>,<사악선귀사도>, <본소사연도> 등 모두 5폭이다. 영조가 51세되던 해인 영조 20년(1744) 9월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기로대신들에게 친히 베푼 연회 등 행사장면을 그린 그림과 참석한 기로신의 초상화를 함께 수록하여 제작한 화첩이다. 왕의 기로소 입소는 충효사상에 기반하여 왕권을 재확인하고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영조는 자신이 추진한 사업을 주제로 다양한 기념 계첩과 계병을 제작하여 자신의 통치를 선양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장치로 활용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영조와 영빈이씨暎嬪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장세자가 어린나이로 죽자 그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되었고 영조25년(1749)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였다. 영조31년(17550 윤취상의 아들 윤지가 나주객사에 영조와 노론을 비방하는 내용의 흉서凶書를 붙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사도세자의 보호세력인 소론의 영향력이 약해지게 되었고, 1757년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와 대왕대비인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세자는 마지막 의지처마저 잃게 되었다. 결국 정치적 소용돌이와 자신의 과실로 인하여 아버지 영조로부터 미움을 산 사도세자는, 영조38년(1762) 뒤주 속에 갇혀 8일만에 죽고 양주 배봉산排峰山(지금의 휘경동)에 묻히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가 지은 사도세자 묘지명, 영조38년(1762),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게 된 사도세자의 묘지명이다. 이글을 직접 지은 영조는 아버지로 하여금 이렇게 만고萬古에 없는 일을 하게 만든 것은 사도세자의 망령된 행동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역사 속에 남겨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역사와 문학 등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의 의궤
의궤란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중요 의식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주요 의식으로는 국왕의 혼인을 비롯한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와 장례, 궁궐의 건축 등이 있으며, 이러한 행사가 끝난 뒤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을 만들어 편찬하였다. 도감에서는 일방, 이방, 삼방 등의 담당한 업무 내용을 정리하였고 필요한 경우 도설과 반차도 같은 그림자료를 정리하였다. 정조 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園行乙卯整理儀軌>나 화성 건설에 관한 기록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등의 일부 의궤는 활자본으로 제작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기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정조13년(1789) 7월부터 10월에 걸쳐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부 화산華山으로 천봉薦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총7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의궤는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으로, 총7책 중 제4책만 남아 있다. 채색 반차도가 실려 있어 천봉 행렬의 구성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현륭원원소도감의궤』와 짝을 이루는 의궤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의 묘를 옮기는 과정의 기록, 휘경원천봉원소도감의궤(1863).

실록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기록문화로 의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의궤는 그 내용의 자세함으로 인해서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의 하나로 여겨진다. 실제로는 그전부터 의궤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영.정조대에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철종 14년(1863) 양주 순강원에 있던 현목수빈묘인 휘경원을 양주 달마동으로 옮기기 위해 묘자리를 준비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다가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되어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1993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하였을 때 전달되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영구 기탁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수원의 화성 축성에 대한 종합적인 기록, 화성성역의궤.

수원 화성 건설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서 실록과 함께 우리나라 기록문화를 대표하는 문헌이다. 수원화성은 건축적인 측면에서의 기술적인 독창성, 규모의 웅장함 등에 있어서는 중국의 많은 읍성이나 우리나라의 다른 산성에 비해서 아주 뛰어나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 축성과정과 목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때문에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이른 시기에 등록된 것으로 보여지면, 수원화성과 떼어낼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이 문헌일 것이다.

화성성역의궤

화성을 축성한 뒤 화성의 설계도와 당시 투입된 인원, 재정, 조직 등의 내용을 담아 간행한 종합보고서이다. 화성에 설치된 각 시설물과 축성 기계들의 설계도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동원된 석수, 목수, 미장이와 같은 장인들이 직종별, 지역별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고 장인들의 이름, 일한 곳과 날짜, 임금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가 화성에서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른 그림, 을묘원행정리의궤도

원행은 왕이 원에 행차함을 뜻한다. 원이란 왕실의 묘소 가운데 세자, 세손과 그 배우자의 묘소, 기타 왕을 낳은 후궁의 묘소를 가리킨다. 정조는 재위기간(1777~1800년) 중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13번 다녀왔으며 이 원행정리의궤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른 을묘년의 행차를 정리한 책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임금이 내린 책에 찍는 인장, 선사지기 인장

무예와 전술을 정리한 책, 무예도보통지.

정조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알려진 책자 중 하나이다. 태권도를 비롯하여 현재 성행하는 많은 무예들이 이 책자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조선시대 책자 중의 하나이다.

정조의 명에 의하여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가 무예와 전투기술을 표준화하고자 만든 책이다. 전투할 때 사용되는 각종 무기를 비롯하여 24가지의 서로 다른 무예가 그림과 함꼐 설명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김홍도가 그린 규장각 그림, 김홍도, 정조 즉위년(1776), 복제품, 정조 즉위년(1776).

정조가 영조의 글을 봉안하기 위해 창건한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 전경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는 뛰어난 젊은 관료들을 선발하여 이곳에서 연구에 전념케함으로써 규장각을 중추적인 학술기관으로 성장시켰다.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한 초계문신抄啓文臣 출신들은 이후 조선 정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때 만들어진 한자사전, 전운옥편全韻玉篇,

정조대 편찬된 한자운서인 『규장전운奎章全韻』의 부편으로 편찬된 한자 자전이다. 『규장전운』은 정조20년(1796)에 편찬되었으므로 『전운옥편』 역시 거의 같은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종래의 옥편이 운서에 들어 있는 글자를 찾아내는 색인의 구실을 하는데 그친 반편 『전운옥편』은 운서 없이도 옥편의 구실을 다할 수 있도록 편찬되어 오늘날 옥편 편찬의 규범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가 직접 짓고 쓴 시, 어제시첩御製詩帖, 18세기,

영조 43년경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지은 시문을 왕이 된 후 쓴 글씨의 탑본이다. 소요정消遙亭 등 총 1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정조의 시 세계와 글씨를 엿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편지
정조가 여러 신하나 친인척들에게 보낸 편지가 최근 공개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66건의 정조 편지가 소장되어 있고 이들은 정조가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것과 심환지에게 보낸 것이다.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는 어머니 혜경궁의 안부를 전하거나 집안의 경사에 기뻐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반면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당시의 정치적 현안들을 조정하며 정국을 이끌어 가고자 했던 국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가 외삼촌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

정조가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으로, 감색 비단에 쌍룡문을 베푼 표지로 장정된 첩본帖本이다. 상권은 86년으로 기미년(1799) 8월7일~9월25일, 하권은 경신년(1800) 정월1일~4월30일까지의 편지이다. 홍낙임이 살았던 마을 이름을 따서 봉투에 ‘번리집사’라고 썼다. 외삼촌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가 신하에게 보내 편지

정조가 쓴 편지로,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것과 심환지에게 보낸 것을 모은 첩이다. 당시 남인의 지도자 채제공과 정국을 함께 주도한 노론의 지도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는 첩과 두루마리 형식으로 봉투에 ‘삼청동즉전’이라고 쓰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의 화성행차 주요 장면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는 정조가 1795년 윤2월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에 행차하여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풀었던 일을 그린 것이다. 이 해의 화성능행의 모든 과정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정리되어 있다. 이 화성능행동도는 의궤의 행렬반차도와는 다르게 행차의 중요한 장면들을 8개의 그림으로 남기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낙남헌에서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왼쪽), 한강에서 배다리로 건너 환궁하는 장면(오른쪽), 

낙남헌에서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 낙남헌양로연도落南軒養老宴圖, 8폭의 병풍으로 된 <화성능행도> 가운데 윤2월14일 정조가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을 비롯한 노인 관료 및 화성의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어좌 앞 마루에는 노대신과 관원들이 앉아 있고, 섬돌 앞뜰에는 왕이 내린 비단 손수건을 지팡이 머리에 매고 앉은 사서노인들이 있다.  한강에서 배다리로 건너 환궁하는 장면,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8폭의 병풍으로 된 <화성능행도> 가운데 화성에 가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고 돌아오는 장면이다. 행차의 마지막 날인 윤2월16일, 노량진에서 배다리를 건너 환궁하는 모습이다.

조선후기의 활자 인쇄
조선후기에는 왕실의 활자 제조를 통해 관찬서의 출판이 활발하게 되었고 민간의 방각본坊刻本(상업을 목적으로 한 책) 출판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먼저 영조 48년(1772) 갑인자甲寅字로 인쇄한 <심경心經>, <만병회춘萬病回春>을 자본字本으로 주조한 15만자를 임진자壬辰字라 하는데 영조 51년(1775)까지 간행되었다. 임진자보다 5년 후에 이루어진 정유자丁酉字는 정조 즉위년(1776)부터 거의 130여 년간 사용되었다. 어제御製, 어정御定, 어찬御撰 및 윤음 등의 서저거 대다수가 정유자 인본이며 규장각 도서로 남아 있다. 또한 청의 사고 전서를 찍은 취진聚珍판식활자를 본 떠 만든 생생자生生字를 자본으로 하여 정조19년(1795) 조한 것이 정리자整理字이다. 이 활자는 <정리의궤整理儀軌>, <원행정례園行定例> 등을 인출하기 위해 만든 활자라서 이러한 명칭을 붙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에 사용된 주요 금속활자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찍기 위해 만든 활자, 정리자整理字, 정조20(1796),

정리자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간행하기 위해 주조한 활자이다. 정조19년(1795)에 주조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주조가 끝난 이 활자는 대자 16만자, 소자 14만자이다. 활자의 글자본은 『강희자전康熙字典』을 참조하였다. 철종8년(1857)에 주자소鑄字所 화재로 보관되어 있던 정리자가 불에 타자 이듬해에 다시 주조하였으며, 불에 타지 않고 남은 활자들과 함께 대한제국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리자로 찍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화성성역의궤』는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뒤 화성 성곽 축조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담아 편찬한 것이다. 이 의궤에는 화성 건설과 관련된 각종 문서, 축조 일지, 동원된 장인의 명단, 사용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 성곽과 각종 건조물, 공사에 사용된 부재와 기계.도구 등의 그림 및 그 설명을 실은 도설圖說을 수록하여 화성 축조와 관련된 모든 거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임진자壬辰字(영조48년, 1772), 

임진자는 갑인자甲寅字의 글씨체를 글자본으로 한 금속활자 가운데 다섯번째로 만든 활자로 오주갑인자라고도 한다. 영조48년(1772) 임진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주관으로 큰 자와 작은 자 15만자를 만들어 교서관校書館에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 금속활자를 만들었지만 갑인자의 글씨체가 가장 아름다워 여섯차례에 걸쳐 같은 글씨체의 활자를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임진자 활자로 찍은 명의록明義錄(정조1년, 1777년), 

임진자로 찍은 『명의록』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대리청정을 반대한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하고 정조 집권의 정당성을 밝히고자 한 책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현종실록자顯宗實錄大字(숙종7년, 1681).

현종실록자는 숙종3년(1677) 『현종실록』을 펴내기 위해 주조한 활자이며, 17세기 중반 민간의 낙동계洛東契에서 만든 낙동계자가 포함되어 있다. 이 활자는 『현종실록』 이후 역대 실록을 비롯하여 『열성어제列聖御製』 등 주로 왕실 관련 책을 인쇄할 때 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현종실록자 활자로 찍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統記(숙종45년, 1719), 

『열성지장통기』는 조선시대 왕실 인물들에 대한 공식 기록을 모은 것이다. 숙종7년(1677)에 처음 간행한 이후 계속 추가하였는데 이 판본은 1791년까지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두번째 만든 한구자再鑄韓構字(철종9년, 1858),

서호수가 명필로 알려진 한구의 글씨를 자본으로 하여 동활자 8만여자를 주조한 것이 임인자이다. 이는 김석주 가문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한구자를 다시 주조한 것으로, 재주한구자라고 불린다.

재주한구자는 서호수가 왕명을 받아 한구의 글씨를 자본으로 하여 동활자 8만여 자를 주조한 것으로 임인자壬寅字라고도 한다. 이는 숙종 초 김석주 가문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한구자를 다시 주조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재주한구자로 찍은 <규화명선>

정조17년(1793) 규장각의 초계문신들의 글을 왕명으로 간행한 책이다.

활자를 보관하던 서랍장, 활자보관장活字保管欌,

조선후기 국가에서 만든 활자를 분류하여 보관하던 장이다. 조선시대에는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와 출판에 노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금속활자의 보관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금속활자는 부수나 특정 활자별로 분류한 뒤 수를 세어 활자보관장에 보관하고 보관된 활자를 기록한 책인 자보字譜를 만들어 관리하였다. 이때 보관장의 책임자를 기록하여 활자의 관리에 철저함을 기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서랍에 보관되어 있는 금속활자.

인장과 인장 모음(조선)

인장과 인장모음


북부지방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그린 전국지도,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보물 1538호, 영조31년(1755)~43년(1767), 복제품,

정상기(1678~1752)의 <동국대지도>에 기초하여 제작된 우리나라 전국지도이다. 동국은 우리나라를 일컫는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지도에 이르러 비로소 북부지방이 정확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지도에는 정상기가 고안한 백리척이 활용되어 정확도가 획기적으로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지도상에서 실제 거리를 산출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독도인 우산도于山島,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鹿屯島 등이 분명하게 표기되어 있어 당시의 영토의식을 잘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동국대지도에 표현되어 있는 북부지방.

대동여지도를 찍어낸 판, 보물, 철종12년(1861),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인쇄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이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바탕으로 고을, 교통로와 통신시설, 군사시설 등의 각종 정보를 목판 위에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대동여지도> 전체를 위해서는 목판 60매 정도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수령100년 정도된 피나무를 사용하였고 목판의 앞뒷면에 모두 조각이 되어 있다. 목판이 완성된 것은 1861년이지만, 그후 여러 차례 수정작업을 거쳤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61년.

구한말에 만들어졌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도라 할 수 있다. 그 정확도가 상당히 뛰어나서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전체를 측량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김정호가 만든 우리나라 전국지도로 목판 인쇄본이다. 우리나라를 남북 12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마다 동서 방면의 지도를 수록하였다. 각층의 지도는 1권의 책으로 묶어 동서 80리를 기준으로 병풍처럼 접고 펼칠 수 있도록 하고 휴대하기 간편하게 만들었다. 물줄기는 곡선으로, 도로는 직선으로 표현하였으며 정확하고 상세하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정호가 만든 전국지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고종1년(1864),

김정호가 목판 인쇄본으로 만든 우리나라 전국지도이다. 우리나라를 남북 120리간격으로 구분하여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에 속하는 지도를 수록하였다. 각 층의 지도는 1권의 책으로 묶어 동서 80리를 기준으로 병풍처럼 펼칠 수 있도록 하였다. 물줄기는 곡선으로, 도로는 직선에 가깝게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대동여지도 중 서울 부근

조선시대의 묘지명
묘지명이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위하여 무덤 내부나 그 주변에 남긴 기록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의례를 숭상하여 조상의 묘를 받들고 유지하는 것을 자손의 큰 책임으로 생각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돌로 만든 묘지명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묘지명이 도자기로 만들어졌다. 제작과 운반이 용이했던 도자기는 묘지명의 제작증대와 수요층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도자기 묘지명은 분청사기, 청화백자, 철화백자, 순백자로 제작되었고, 시기가 지날수록 대부분 판 모양으로 규격화되었다. 한 벌은 대개 3판 이상, 많게는 60여 판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외에도 원통, 사발, 접시, 합, 필통, 기와 모양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성자 묘지명, 철종4년(1853),

영조시대를 살았던 김성자의 묘지명이다. 진천.옥천.파주.청주 등의 수령을 지냈고, 미호 김원행과는 어릴적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청화백자로 만들어진 둥근 묘지명으로 한벌이 11판이다. 묘지명을 담고 있던 합이 뚜껑과 함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합의 두껑에 김성자의 부인인 증정부인 연안이씨를 곁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성자 묘지명

안경위 묘지명, 19세기,

순암 안정복의 후손인 안경위의 묘지명이다. 안경위는 서양문물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19세기 전반기를 살았던 인물로 그의 묘지명에는 서양학문의 확산을 경계하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어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원래 청화백자 다섯판으로 제작되었으나 두판이 없어져 현재는 세판이 남아 있다. 묘지명의 전형적인 네모형태가 아닌 둥근 모양인데, 조산말기에 일부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원행 묘지명, 영조49년(1773),

조선후기 대표적 성리학자인 김원행의 묘지명이다. 김원행은 조선후기 노론의 대표적 집안인 김창협의 손자이며 뛰어난 학덕을 지닌채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이 묘지명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지명 양식인 네모판이며, 세 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첫판에는 묘지명의 제목인 ‘미호선생김공지묘’라고 써 있고, 나머지 두판에는 이름, 세계, 관직, 장지, 자녀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인흥군 첫째 아들의 묘지명, 인흥군 셋째딸의 묘지명, 인조10년(1632),

조선 선조의 서자 인흥군 이영의 큰아들과 셋째달의 묘지명이다. 이영의 큰아들은 인조8년에 태어나 2년 남짓 살다가 천연두로 죽었고 셋째 딸은 인조9년에 태어나 다음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과 딸을 안타까워 하며 백자접시에 음각으로 글을 새겼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 실학, 북학과 연행

실학은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대두된 현실개혁적인 조선시대 유학의 학풍을 말한다. 당시 청나라의 고증학과 더불어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에 그 근원을 두고 양국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면이 있다. 청대의 고증학은 경서의 해석에 치중한데 반해 조선의 실학은 서구문물의 영향과 함께 농업에서 부터 사회전반의 개혁을 추구한 학문으로 그 세부적인 내용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서는 조선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각종 저서들을 실제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이전에는 없었던 것들이 조선실을 개편하면서 당대를 대표하는 저서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행운을 만나게 된다. 조선시대 실학의 시초라 여겨지는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요약한 성호사설유선, 유형원의 ‘반계수록’,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는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 또한 이 곳에서 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실학관련 저서와 유물들은 그 수량이 아주 많다고 할 수 없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귀에 익은 여러 저서와 유물들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하며, 당시의 다른 사회현상과 비교하여 체계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안정복이 뽑아 엮은 이익의 백과전서,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이 『성호사설』의 중복되고 번잡한 것을 삭제하고 다시 종류별로 엮어 원래의 3분이1 정도로 줄여 엮은 책이다. 이책에는 이익이 편찬한 『성호사설』 원 책의 1/3인 1,332항목이 실려 있으며, 종류별로 간명하게 배열하고 주석까지 덧붙였기 때문에 찾아보기에 매우 편리하다. <출처:중앙박물관>

유형원이 국가윤영의 개혁을 주장한 책, 반게수록磻溪隨錄, 유형원,

조선중기의 학자 유형원이 통치제도에 대한 개혁안을 중심으로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은 유형원이 관직생활에 물러나 전북 부안에 머물며 22년에 걸쳐 연구한 결과물이다. 『반계수록』은 현실법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지역적인 불균등과 신분적인 특권을 해소하여 모든 사람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약용이 지방관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적은 책, 목민심서牧民心書, 정약용,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이 지방관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논한 책이다.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저술한 것으로 유배가 끝난 해인 순조18년(1818) 완성하였다. 이 책에서 정약용은 목민관 선임의 중요성, 목민관의 청렴과 검소한 생활신조, 백성 본위의 봉사 정신 등을 강조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수광이 지은 백과사전, 지봉유설.

교과서에 실학이 처음으로 등장한 저서로 잘 알려져 있는 당시의 상식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백과사전이다

북학北學과 연행燕行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북경까지 오가는데는 두달이 넘게 걸렸고 북경에서의 체류기간을 포함하면 반년 정도가 소요되는 험한 여정이었다. 이때 사행의 대표격인 정사正使나 부사副使 및 서장관書狀官들은 공식 행사에 동원되거나 감시에 묶여 있는 반면, 그들을 수행한 자제군관子弟軍官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실학자로 알려진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박지원 등이 북경에 갔을 때에도 이러한 자제군관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궐밖 세상을 살펴 기록할 수 있었고, 조선시대 3대 연행록으로 꼽는 <노가재연행록>, <을병연행록>, <열하일기> 등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은 연행을 통하여 청의 발전된 학문과 문물을 수용하여 이용후생의 도구로 삼자는 북학을 주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연경성시도>부분, 조선사신들이 책과 골동품을 구입했던 유리창,

현재까지도 그 모습과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 북경을 찾았던 사신들이 수많은 일가친척이나 지인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물건을 구경하고 구입하기 위해서 서성거렸던 거리이다.

<연경성시도> 부분, 조선의 사신단이 머물렀던 회동관 일대.

조선 사신단이 머물렀던 회동관 일대. 지금 이 곳은 천안문 서쪽편 중산공원으로 변신해 있다. 중산공원에는 사직단이 있고, 지금도 옛날 사신들이 천자를 배알하는 연습을 했던 습례정이 있다. 당시 많은 저서에서 습례정에서의 고통스럽고 모욕스렀던 부분을 글로 남겨 놓고 있다

옹방강이 쓴 『반야심경』을 탑본한 책, 청나라 19세기,

『반야심경』을 돌에 새기고 탑본한 첩이다. 청나라 섭지선은 부친의 6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스승 옹방강에게 글씨를 부탁하였다. 이에 옹방강이 1814년 여름 6월6일에 쓰고, 섭지선의 부친 섭계문이 돌에 새겨 탑본하였다. 발문에는 이후 1830년 봄날에 용천사 담장에 옮겨 새겨 놓으니 영원히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첩은 조선에 들어와서 여러 수장가의 손을 거쳤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과 이웃나라의 지도, 천하지도天下地圖,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채색 필사본의 종합 지도책이다. 천지도를 비롯하여 원형의 천하도, 중국, 일본, 유구와 조선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지도에서 한양도성도가 아닌 개성의 지도가 두점이나 수록된 점이 독특하다. 지도책 뒷부분에는 조선에서 중국 북경까지의 사신 행차 경로가 담긴 노정도路程圖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주학년이 신위에게 보낸 편지, 순조13년(1813) 2월3일

청나라 학자 주학년이 신위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주학년은 옹방강의 제자로 이 편지에서 그는 김정희의 소개로 1812년 겨울 청나라에 사신으로 온 신위를 만난 일을 회상하고,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나라 서화가 오승량이 추사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

1828년 1월26일 청나라 서화가 오승량이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 내용은, 오승량이 그려준 <기유십육도>의 각 그림에 김정희가 16수의 <기유도가영십육수>를 지어 보내준 데 감사를 표하고,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에게 <화훼도> 1폭을 보낸다는 내용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나라 학자 왕희손이 추사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

추사 김정희에 대한 명성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북경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희손이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 중국 청(淸), 1828년,

중국 청나라 학자 왕희손이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이다. 내요은 청대 시문학, 경학(經學) 등 학계의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에 대한 소개와 평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1827년 1월 26일 청나라 학자 왕희손이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이다. 왕희손은 김정희와 직접 만난 적은 없으나 서신을 통하여 친교를 맺었다. 청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에 대한 소개와 평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객관적 사실을 통해 정확한 해답을 얻어내는 실사구시, 즉 고증학적인 학문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나라수도 연경을 그린 그림, 연경성시도燕京城市圖, 정조14년(1790), 복제품,

세계 각국의 지도와 중국 천하를 그린 지도첩 중 청나라 수도 연경을 그린 지도이다. 연경은 북경의 별칭이다. 도성과 내부의 궁궐, 좌우 대칭의 가로망과 건물 배치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조선사신이 들어가던 문인 조양문朝陽門이 오른쪽에 위치해 있고, 외국 사신들이 머물던 회동관會同館, 조선사신들이 책과 서양의 물품, 골동품 등을 구입했던 유리창流璃廠도 표시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연경성시도 중 북경의 중심이 되는 자금성과 천안문광장 일대.

북경 내성 정문에 해당하는 정양문과 오늘날 천안문광장 일대를 볼 수 있다. 주로 관청에 해당하는 건물들이 내성 안쪽에는 배치되어 있다.

유리창 부근

서울의 남대문 시장 일대와 마찬가지로 정문 바깥쪽에 유리창을 비롯하여 상업지구가 형성되어 있다. 구글 위성지도에서 볼 수 있는 오늘날의 북경과 큰 차이가 없다.

외성 남쪽 출입문 주변.

북경에서 가장 큰 제사시설인 천단공원을 볼 수 있다.

박지원이 쓴 청나라 기행일기,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지원이 북경에 다녀와서 편찬한 기행일기로 박지원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정조4년(1780) 박지원은 그의 종형제인 사신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북경으로 떠났다. 『열하일기』는 이때 청나라 건륭제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북중국과 남만주 일대를 둘러본 후 그곳의 문인, 명사들과 교유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까지 실질적으로 중국을 출입하는 첫번째 출입문에 해당하는 산해관과 북경 출입문인 조양문을 그린 그림.

북경 내성 정문에 해당하는 정양문과 그 바깥쪽에 있었던 화려한 번화가였던 유리창을 그린 그림.

북경사신 일행들이 북경을 방문했을때 보았던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당시 사신일행들이 받았던 느낌이 반영되어 세워진 곳이 수원화성이다.

조선후기 중인문화

영.정조시대 중흥기를 거치면서 대동법을 기반으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양반계층이 늘어나는 등 신분의 변화가 많았다. 조선시대 중인은 서얼을 비롯하여 중앙정부와 지방에서 행정적인 실무와 전문적인 분야에 종사했던 계층이다. 대표적인 중인계층으로는 통역업무에 종사했던 역관, 의술에 종사했던 의관, 천문학 등에 능통했던 관상감 관원이 음양관, 도화서 화원, 중앙행정부서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서리 등을 들 수 있는데 오늘날의 기준으로 전문직 종사자라 할 수 있다. 이들은 18~19세기 이후 전문적인 역량과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의 중추가 되는 계층으로 발전하게 되며, 구한말 격변기에 주체세력으로 개화운동에 참여하며, 일부는 친일파로 바뀌게 된다.

중인문화
중인계층은 자신들의 전문적 역량과 행정실무 경험을 통해 점차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양반과 같이 한문을 읽고 쓸 수 있는 중인들은 18~19세기 이후 한문학에 대거 참여하였다.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시詩, 서書, 화畵에 두각을 나타내는 중인들이 등장하여 시회詩會와 계회契會 등의 활발한 모임을 이루어 나갔다. 이들은 <소대풍요>, <풍요속선> 등의 공동시집을 간행하거나 <호산외사>나 <이향견문록>, <희조일사> 등의 공동 전기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또한 <규사葵史>나 <연조귀감掾曹龜鑑> 등 자신들의 역사를 담은 책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허준이 지은 의학서적(東醫寶鑑, 허준, 조선후기), 허준이 그린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몸과 형체, 장기 그림>

허준 등이 선조의 명을 받아 편찬한 의학 서적으로, 그 이전까지 편찬된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서들을 참고하여 구체적인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기록한 한의학의 백과전서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었다. 허준은 『동의보감』의 맨 앞에 이 그림을 실어 의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허준은 하늘을 상징하는 머리와 땅을 나타내는 몸, 이 둘을 인체의 척추가 연결하며 하늘과 땅의 선천적 기운에 인체의 후천적 기운을 소통시키고 있다고 하였다. 다음은 이 그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쓴 글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람은 우주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고, 발이 네모진 것은 땅을 본받은 것이다.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다. 하늘에 오행(五行)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오장(五臟)이 있다. 하늘에 육극(六極)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육부(六腑)가 있다. 하늘에 팔풍(八風)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팔절(八節)이 있다. 하늘에 구성(九星)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구규(九竅)가 있다. 하늘에 12시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12정맥이 있다. 하늘에 24기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24유(兪)가 있다. 하늘에 365도(度)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365골절이 있다. 하늘에 일월(日月)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안목(眼目)이 있다. 하늘에 밤낮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오매(寤寐)가 있다. 하늘에 뇌전(雷電)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희로(喜怒)가 있고, 하늘에 우로(雨露)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눈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한열(寒熱)이 이씨고, 땅에 천수(泉水)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으며 땅에 초목과 금석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모발과 치아가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이 묘하고 아름답게 조화되어 성립된 것이다.

침과 뜸 놓는 자리를 그린책, 19세기,

침과 뜸자리에 대한 그림과 침과 뜸의 시술법, 그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송나라의 한림의관 왕유일이 1026년에 여러 의기의 학설 및 경험을 모아 편찬한 것인데, 효종5년(1654)에 주석을 보완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침과 뜸을 이용하는 치료법을 침구鍼灸라고 하는데 침구 공부를 위해 구리로 사람 모형인 동인을 만들어 침구 시술 위치를 표시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침통 및 침, 조선후기,

한의학에서 중요한 치료 기구로 이용되는 침과 그 침을 담은 침통이다. 침은 칼처럼 생긴 참침으로부터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호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굴기와 길이의 침이 사용되었다. 침을 담았던 침통에는 통풍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몇 개의 구멍을 뚫어 침이 녹슬지 않게 하였다. 침통의 겉면에는 건강장수와 관련된 글귀나 십장생과 같은 문양을 조각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침이나 뜸을 뜨는 위치를 그린 그림, 경혈도經穴圖,

인체에 있는 경혈의 위치를 그린 인체해부도이다. 경혈은 한의학에서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자리를 말한다. 인체의 뒷면을 그리고 빨강.노랑.검정의 선 위에 경혈의 이름을 적었다.

중국어 학습교재, 노걸대老乞大,

고려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널리 사용된 역관譯官들의 중국어 학습교재이다. 고려의 상인이 인삼 등 우리나라의 특산물을 중국 북경에 가서 팔고, 중국의 특산물을 사서 귀국할 때까지 여행 일정에서 여행자가 필요로 하는 회화를 중국어로 서술하였다.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개정되었고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諺解本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이 책은 갑인자본을 번각飜刻한 것으로 외교문서를 담당하던 관청인 승문원承文院 소장인이 찍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상형이 저술한 수학서(曆算, 이상혁, 조선 19세기)

조선후기 수학자인 이상혁이 저술한 수학서이다. 이상혁은 산학(算學) 계통의 전통적인 중인 가문 출신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계사(計士)를 지냈었다. 그는 현실적인 계산만을 하던 중인 수학의 단계를 뛰어 넘어 순수 수학을 연구하였으며, 서양 수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본 서적에서는 고차 연립방정식 및 계차수열을 다루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지관용 나침반,

지관들이 방위를 찾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다. 중심의 지남침指南針을 둘러싼 5층의 동심원으로 구성되었다. 동심원에는 24방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일반 나침반에는 동,서,남,북을 표시하지만 여기에는 팔괘八卦와 천간天干, 십이지十二支 등을 표시하였다. 나침반 뚜껑에는 십장생무늬를, 몸체의 바닥에는 도성의 풍경을 조각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강건이 만든 휴대용 해시계, 휴대용앙부일구携帶用仰釜日晷, 보물, 고종8년

(1871) 강건이 만든 휴대용 해시계와 나침반이다. 앙부일구는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해시계로 오목한 솥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시계를 만든 강건은 강세황의 증손이자, 혼천시계를 제작한 강이오의 아들로, 형 강윤과 함께 휴대용 해시계를 비롯해 서구식 평면해시계까지 다양한 해시계를 제작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의 중인계층
조선시대에 양반과 양인良人의 중간 신분계층을 중인中人이라고 하였다. 조선후기의 중인은 역관譯官(통역관), 의관醫官(의사), 율관律官(법관), 천문관天文官(천문학자), 산관散官(회계사), 화원畵員(화가) 등의 기술직과 행정실무를 담당한 서리書吏나 향리鄕吏, 그리고 양반의 첩의 자손인 서울庶孼 등 중간 계층을 포괄하였다. 중인들은 점차 자신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동류의식을 형성하고 혼인을 통해 신분적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신분적 유대의식은 영조 즉위 후에는 서얼통청운동庶孼通淸運動 등 중인들의 신분상승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중인들의 계모임, 금란계첩金蘭契帖, 철종8년(1857),

화첩 형식의 계회도契會圖이다. 서문에 의하면, 이 계회도는 안시윤이 정사년 음력3월 보름에 자사재, 묵제와 중흥사에 묵으면서 이웃의 여러 벗과 계를 이루어 모임을 가진 후 그 일을 기록하고 그린 것이다. 이 무렵에는 문인들의 계회, 글짓기 모임 등이 중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는데 이 화첩도 그러한 중인 계회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조희룡이 그린 대나무 그림, 19세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화가 조희룡이 그린 대나무 그림이다. 화면의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뻗어 올라간 대나무 줄기와 잎을 그렸으며 화면 왼쪽 위에 3행의 제발과 함께 ‘단로’라는 조희룡이 호를 새긴 도장을 찍었다. 조희룡은 중인 출신으로 1847년에는 유최진. 전기 등과 벽오사라는 시사를 결성하고 김정희파의 여항문인, 서화가들과 시.서.화를 통해 교유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난초(墨蘭圖, 조희룡,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우봉 조희룡의 난초 그림이다. 조희룡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고, 글씨는 추사체를 본받았다. 그림에 글을 많이 남긴 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19세기 대표적 여항시사인 벽오사(碧梧社)의 중심인물로,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리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희룡의 편지글(簡札帖, 조희룡, 조선 19세기)

조희룡의 다른 편지글.

조희룡이 쓴 편지글을 모은 첩이다. 정확한 수신자와 연대는 알 수 없다. 상대에 대한 안부 편지와 그림, 감상할 물건, 책을 빌리는 문제 등 여러 이야기가 실려 있다. 총37건의 편지글이 들어 있다. 조희룡은 매화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석우망년록』이나 『호산외사』등의 저술을 남긴 문인이기도 하였다. 특히 『호산외사』는 화가.승려.몰락양반 가운데 특이한 행적을 남긴 42인의 전기를 담은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계곡과 소나무(溪流圖, 최북,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이 작품은 과장되게 굴곡진 소나무 아래로 거친 물살이 흐르는 계곡을 그렸고, 이채롭게도 파란 색지에 먹으로 완성하였다. 소나무의 큰 옹이와 굵은 둥치를 심하게 휘어진 곡선으로 묘사하는 것은 최북의 중년기 이후의 그림 경향이다. 호생관 최북은 돈과 명예에 구애받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살았던 중인 신분의 직업 화가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암행어사란
암행어사暗行御史 제도는 조선시대의 독특한 관리파견 제도였다. 재주가 뛰어난 신하를 국왕이 직접 지방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생활과 지방관리들의 시정 득실을 몰래 관찰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국정에 반영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암행어사 결과보고서, 암행어사暗行御史 서계書啓, 고종11년(1874)

3월22일 충청좌도의 암행어사에 임명된 김명진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결과보고 문서이다. 대개 암행어사로 파견되면 임무를 마친 뒤 지방관의 업적은 서계로, 마을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 등은 별단別單으로 보고하였는데 이 문서에는 서계만이 적혀 있다. 앞부분에 어사로 파견된 내용을 간략히 적고 다음에는 지방관의 업적을 조목조목 적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출장가는 관리가 말을 이용할 수 있는 증표, 마패馬牌,

조선시대 공무로 출장가는 관원들에게 역마驛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지급을 규정한 증표이다. 마패의 앞면엔느 관원의 등급에 따라 마필의 수효를 새기고 뒷면엔느 자호와 발급일 및 상서원인尙瑞院印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초기의 마패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파손이 심해 세종16년(1434) 2월에 철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 후 <경국대전>이 반포되던 시기에 이르러 구리로 만든 마패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어사 박문수의 초상, 보물

박문수(1691~1756)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1723년 병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로 활약하면서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다. 붉은색의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화법이 정교한 반신상의 그림이다.

암행어사가 지방을 시찰하고 임금에게 올린 글, 암행어사 서계.

암행어사의 활동은 국왕에게 보고서를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이며, 춘향전에 나오는 암행어사가 고을수령을 파직하고 혼내주는 장면은 실제로는 없었고, 고을 수령의 착취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의 바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실제 남원부사는 지방수령 중에서 상당히 직위가 높은 사람으로 초임 관료가 대적하기에 쉽지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퇴계 이황선생만 하더라도 당대 이름높은 학자였지만, 부사보다 직위가 낮은 단양군수와 풍기군수 등을 역임하고 있었다.

고종11년 (1874) 3월22일에 충청좌도의 암행어사에 임명된 김명진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서계이다. 대개 함행어사로 파견되면 임무를 마친 뒤 지방관의 업적은 서계로, 마을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 등은 별단으로 보고하였는데 이 문서에는 서계만이 적혀 있다. 앞부분에 어사로 파견된 내용을 간략히 적고 다음에는 지방관의 업적을 조목조목 적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 서울과 지방

조선시대를 이야기할 때는 주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치와 사회, 과거제와 관료제, 붕당정치 등을 위주로 하기때문에 지방의 통치조직이나 통치제도에 대해서 논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특히, 조운과 교통로, 도시의 발달과 역할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작년에 개편된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시대 지방통치와 조운, 교역과 상업의 중심이었던 나루와 포구에 대해서 잘 정리해 놓고 있다.

전시된 내용 중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조선시대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 그림>을 들 수 있다. 옛말에 “평양감사도 저하기 싫으면…..”이라는 말이 실감할 수 있는 화려한 잔치그림이다. 여러 문헌과 연구자료 등에서 조선시대 관료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의 근간이 되는 지방수령들의 착취에 근거한 경제력을 잘 느낄 수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장면과 함께 박문수로 대표되는 암행어사 제도를 잘 설명하고 있는데, 춘향전을 비롯한 여러 이야기에서 암행어사에게 바랐던 일반 대중들의 바램과 지방관헌들의 착취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서울과 지방
18세기를 전후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인구의 자연증가와 농민의 게층분화가 심화되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다.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금속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도시민의 증가로 상품의 유통이 활발하게 되자 전국 각지에 장시와 포구浦口가 개설되고 이들을 연계하는 원격지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수공업 생산의 증가 그리고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 서울 지도, 도성도都城圖, 20세기초,

조선왕조의 정치.행정 중심지인 한성부漢城府 일대를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장용영壯勇營이 기재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대체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지도임을 알 수 있다. 백악산.인왕산.목멱산.낙타산을 연결하는 도성의 내부를 화면의 가운데에 배치하고 중심 가로와 물줄기를 중심으로 주요 궁궐, 관서, 행정구역 등의 지명을 기재하는 전형적인 도성도의 모습이다. 궁궐과 종묘.사직 등 국왕과 관련된 경관을 부각하여 표현하였고, 행정 구역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도성도 중 서울 중심부.

궁궐은 숲으로 표시해 놓고 있으며 주요 하천과 도로 등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

한양을 노래한 가사를 찍어낸 판,

한양의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의 목판이다. <한양가>는 이름은 같지만 내용이 다른 이본異本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헌종10년(1844)에 한산거사의 <한양가>와 이를 축약한 이용기의 것을 꼽을 수 있다. 내용은 한양의 유래와 지세를 노래한 뒤 여러 궁궐의 배치, 내직과 외직의 관아 모습, 서울 시가의 풍경, 저자에서 거래되는 상품 그리고 청루의 풍류 등을 담고 있으며, 태평성세의 백성으로 태평가를 부르자는 가사로 끝을 맺는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 동대문 밖의 말 목장 지도(東大門外馬場院全圖, 조선후기, 종이에 엷은 색)

서울 살곶이에 있던 말 목장과 이를 관리하던 관청인 마장원(馬場院)을 그린 지도이다. 목장과 관청 건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말의 조상인 선목(先牧)에 제사 지내며 말의 건강를 빌던 마조단(馬祖壇)을 비롯하여 마구간과 말에게 물을 먹이던 연못 등을 기록하였다. 아차산의 모습도 그려져 있는데 이곳이 목장의 동쪽 경계를 이룬다. 마장원은 1846년에 폐지되었으므로 이 글림 지도는 그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 그림,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

대동강에 베를 띄워놓고 평안감사가 잔치를 베푸는 장면이다. 국왕이 대신들을 모아놓고 펼치는 연회에 결코 뒤지지 않는 화려한 잔치의 모습이다.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의 화려한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대동강 위에는 평안감사가 탄 배를 중심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 및 관선이 늘어서 있고 뒤로는 관기들이 탄 배, 음식을 준비하는 배, 사대부나 아전들이 탄 작은 배들이 따르고 있다. 강가에서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있으며, 성안 마을 집집마다 환영 깃발이 세워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지방지도 들여보기
조선시대 지방의 마을을 그린 지도를 군현지도라고 부르며, 행정구역의 기본 단위인 부,목,군,현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군현지도에는 마을의 중심지와 주변 지역 등 지방 사회의 생활공간이 잘 묘사되어 있다. 관청,향교,읍성 등의 주요 시설을 마을의 중심에 표시하고, 주변의 산과 강 등 자연환경, 지명, 교통로를 표기하여 이해를 도왔다. 이러한 군현지도는 지방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전라도 무장현(전북 고창군 무장면)의 지도는 읍성의 내부가 크고 상세하여 동헌과 객사 등 관아의 실제 모습이 회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남문 앞에 시장이 있고 해안에는 고기를 잡는 도구의 일종인 어전이 그려져 있는 것이 흥미롭다. 또한 지도의 여백에는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 인구의 수, 논밭의 면적 등을 적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지방 지도, 함영읍지도咸營邑地圖, 19세기,

조선시대 함경도의 감영이 있던 함흥부의 읍치邑治를 그린 지도이다. 함흥부의 읍성을 화면 중앙에 가득 채우고 반룡산을 화면 우측 상단에, 성천강과 만세교를 좌측 하단에 배치하였다. 읍성 내의 주요 관청들을 상세히 묘사했을 뿐 아니라, 꽃이 만개한 숲과 민가의 지붕이 중첩된 모습을 표현하는 등 회화식 표현이 두드러진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군현지도는 회화적 성격과 지도적 성격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고, 당시 지방 통치에 중요한 사항들이 우선적으로 선택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읍성내 함흥부 관아를 구성하는 주요 건물들과 읍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압록강 국경지역을 그린 군사지도, 청북변성도.

국경지역의 국방을 위해서 만든 지도로 보인다.

함경도 지도(長津地圖, 조선후기)

조선시대 군사요지였던 장진을 중심으로 그린 함경도 지도이다. 삼수(三水).갑산(甲山).함흥(咸興).홍원(洪原).북청(北靑)지역이 함께 그려져 있다. 각 고을과 진보(鎭堡)를 잇는 도로를 붉은 선으로 표시했고, 산줄기를 회화식으로 유려하게 표현하였다. 장진이 첨사진(僉使鎭)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785년 이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 있었던 무장현 관내도이다.

읍성내부의 관아 배치를 비롯하여 관할지역내 산, 강, 교통 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관할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만든 지도로, 이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많은 군현의 관내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실제 사용을 위해서 대량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현 관내도 나타난 조선시대 읍성내 주요 관아 건물의 역할 및 배치도.

지방관원의 업무를 평가한 문서, 고종9년(1872),

전라도 지방 관원들의 업무에 대해 상,중,일천(임용한 날짜가 얼마지나지 않음) 등으로 평가를 내린 문서이다. 모두 세단으로 적혀 있는데 첫째 단에는 관직명이 판관, 목사, 부사, 군수, 현감, 찰방 등의 순서로 적혀 있고 둘째 단에는 관원의 성명이, 셋째 단에는 상과 중으로 포폄의 내용이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상좌우도 지방관리들의 명부, 19세기.

조선시대 경상도 각고을 수령들의 명단과 임명시기를 적은 글이다. 아마도 감사가 하부 기관들을 감독하기 위한 작성한 자료이거나, 각 고을 수령들이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 만든 자료가 아닐까 생각된다. 각 고을간의 우열관계와 수령들간의 상하관계를 정리할 목적인 듯 하다.

문서의 앞 뒤면에 각각 경상우도와 좌도의 주요 관료들의 명단과 임용 시기를 적은 인사 관련 장부이다. 상하 네 단으로 구성되어 첫째 단에는 관직명이, 둘째 단에는 관원명과 임명 연월일을 별도의 종이에 적어 임용순으로 덧대어 붙여 놓았다. 셋째 단에는 관할지역의 이름과 면적이, 넷째 단에는 전임 관원의 이름과 품계와 임명 연월일이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北征紀行, 김영학, 조선후기)

김영학이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며 쓴 기행 시문으로, 평안도 지역의 풍물과 풍속을 잘 묘사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아름다운 산과 강을 찾아서 유람을 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 후기에는 우리 땅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지역의 풍속에 대해 기록한 글들이 다수 지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지도로 보는 한강나루
조선시대의 한강은 서울로 모여드는 조운과 상품유통의 동맥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한강 가에 설치된 나루터는 주요 간선도로와 연결되어 남북 교통망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조선후기에는 한강漢江, 노량露梁, 양화도楊花圖, 삼전도三田渡, 임진도臨津渡에 별장別將을 두어 관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 주변의 주요 한강나루터.

조선시대의 한강은 서울로 모여드는 조운과 상품유통의 동맥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한강 가에 설치된 나루터는 주요 간선도로와 연결되어 남북 교통망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조선후기에는 한강, 노량, 양화도, 삼전도, 임진도에 별장을 두어 나라에서 관리하였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고 이름만 남아 있는 한강변의 주요 나루터.

한강에는 많은 나루터가 있었으며, 각 나루터마다 독특한 기능과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1) 광진: 의정부 동두천에서 내려와 광주, 여주, 충주 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예로부터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조선초기부터 별감을 두어 사람의 출입을 살피게 했다.
2) 송파진:  전국의 15대 장시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서울 외곽에서 가장 번창한 난전을 이루었다.
서울로 공급되는 경기도의 쌀, 숯, 연초, 소, 채소, 곡식 등이 모두 송파나루를 건넜다.
3) 삼전도: 한강 남쪽의 요새지인 광주부로 직접 통하는 제일 빠른 길목으로 번성했으나, 조선후기에는  송파나루가 이를 대신하였다.
4) 도모포: 어물, 목재, 고추, 마늘, 감자 등 농산물의 집산지였으며 동빙고가 있어 얼음을 나르는 배들이  모여들었다.
5) 한강진: 조선시대 제일의 나루터였으며 근처에 서빙고가 있었다. 서빙고에는 대략 137,974장의 얼음을  저장하였다.
6) 동작진: 한양 도성의 남대문을 지나 과찬으로 나가는 가장 빠른 길목이었다.
7) 노량진: 지형이 편리하여 백성의 부담이 적었기 때문에 임금이 온천이나 능에 행차할 때 거너는 나루로 주로 이용되었다.
8) 용산포: 경상, 강원, 충청, 경기 상류의 조운이 모이는 곳이다.
9) 서강: 황해.전라.충청.경기도 하류의 조운이 모두 모였던 곳이다.
10) 마포: 서해에서 들어오는 생선, 소금, 새우젓이 모인 곳으로 특히 새우젓이 유명하였다. 관원에게 녹봉으로 주는 곡식을 보관한 광흥창이 있었다.
11) 양화진: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곳이다. 서해에서 한강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었다.

한강 나루터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

나루터를 오가는 사람과 물자를 감시하던 관청과 주막 등 나루터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의 조운과 조창
조운遭運은 각 지방에서 거둔 현물 조세를 수도인 한양으로 운송하던 제도이다. 강을 이용할 경우에는 수운水運, 바다를 이용할 경우에는 해운海運이라 하였다. 육로를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도로와 운송수단의 문제로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조세로 거둔 쌀이나 곡물과 같은 현물을 수송하기 위해 강과 바다의 출발지와 도착지에 창고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 저장해 두었다가 중앙의 경창京倉(군자창, 풍저창, 광흥창)으로 운송하였다. 도성에 가까운 경기도와 강원도 철원, 평강, 금화군 등의 세곡은 육로로 경창에 직접 납부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세금와 물자를 나르던 조운(수운)과 주요 창고들.

 조운은 각지방에서 거눈 현물조세를 운송하던 제도로 주로 강과 연안바다의 해로를 이용하였다. 북부지방에서 걷어들인 세금은 국방비로 사용했기때문에 황해도 이남 지역의 큰 강과 해안에 위치한 주요 포구들에 조창이 설치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조장은 강원도 (원주 경흥창, 춘천 소양강창), 충청도 (아산 공진창, 충주 가흥창), 황해도 (배천 금곡포창, 강음 조읍포창), 경상도 (김해 불암창, 창원 마산창, 사천 통양창), 전라도 (용안 덕성창, 영광 법성창, 나주 영산창)에 설치되었다.

중부지방의 주요 조창과 조운로.

충청 강원지역의 주요 조창과 조운로

남해안 지방의 주요 조창과 조운로

탕평과 문화의 진흥
18세기와 19세기 전반은 조선시대에서 가장 큰 변화와 쇄신의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다. 정치, 사회, 예술 전반에 걸쳐 성숙한 문화를 꽃피우게 되었고, 여기에는 중국 신학문의 유입과 지식인 우대정책, 실용학문과 문풍혁신운동이 주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영.정조의 균역법 시행, 준천濬川사업, 규장각 설치 등 다방면의 정책 쇄신과 함께 지식인 사회의 사실주의적인 학문 경향은 실학과 진경이라는 풍조를 만들어 내었다. 한편 소외계층이던 중인출신들도 자신들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연행燕行을 통한 북학北學, 서학西學의 영향뿐 아니라 방각본의 대량 출판 등 출판문화의 확산이 기폭제가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